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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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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문학의 잊힌 영웅’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제임스 설터를 잊힌 영웅이라 평가했다. 그는 실제로 사관학교를 졸업해 전투기 조종사로서 한국전쟁에까지 참전했던 영웅이다. 『어젯밤』은 어두운 수채화 같은, 그러면서도 몽환적인 아름다움이 깃든 열편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이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어둠과 빛 사이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매력적이긴 해도 완벽하지는 않은, 『어젯밤』의 사람들……. 이 작품은 인간에 대한 미학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임스 설터는 그 미학 뒤에 숨겨진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 좀처럼 부각되기 쉽지 않은 본질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작가이다.


“그때 설터가 나(로버트 레드포드)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나뭇잎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보면 잎맥이 보이는데, 그는 다른 건 다 버리고 그 잎맥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어쩌면 이 말이 설터의 스타일을 가장 시적으로 잘 요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잎맥만 살리는. 인생을 관통하는, 가장 연약하면서도 본질적인 사실을 설터처럼 그려내는 작가를 또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미문(美文)으로 포장된 어두운 진실


『어젯밤』에 담긴 이야기들은 단편소설의 걸작들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하트포드 쿠란트( 코네티컷주 현지 신문)의 찬사와 같이 이 작품들은 시적이고 정밀한 문장, 이른바 미문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어두움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수채화처럼 설터가 쓰는 미문의 이면에는 어두운 진실이 존재한다. 열 개의 나뭇잎을 모두 들어 올려 잎맥을 살펴보면 좋겠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 이 단편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포기』, 『방콕』, 『어젯밤』에 대한 느낌들을 간략하게나마 적어볼까 한다.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또 바꿀 수 없는가. <포기>


서른한 살 생일을 맞은 아내 안나와 남편 잭, 그들은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아무리 부부라 해도) 타인의 취향이나 습관을 바꾸어놓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얼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로의 작은 습관들이 거슬릴 때 이 부부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까. 안나와 잭은 상대방이 지나치게 자주 사용하는 문구, 식습관, 그리고 옷 등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런 것들을 버리도록 요구했고 그걸 ‘포기’라고 불렀다. 말은 쉬워 보이나 사실 그리 간단하지 않은 방법이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몸에 베인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욕실 세면대 언저리에 물기 남기지 않기, 컵 들고 마실 때 새끼손가락 펴지 않기, 그들은 사소한 동작(습관)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고 그 요구는 받아들여졌다. 작품 내에서는 그 과정이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포기’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잭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그건 바로 데스와의 부적절(?)한 관계였다. 잭에게 있어 데스를 사랑하는 것은 큰 행복이었지만 그 (동성 간의) 사랑은 용납되기 힘든 것이었다. 안나는 자신의 생일에 잭에게 그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과연 ‘포기’라는 것이 신발에 들어간 자갈을 털어내는 일과 비슷할 뿐일까.


당신 날 사랑했어? <방콕>


설터가 생각나는 대로 써서 단시간에 완성했다는 작품 <방콕>, 그런데 난 ‘왜 제목이 방콕이지?’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이 작품은 한때 연인이었던 두 남녀의 대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들의 대화는 상당히 원색적아고 직설적이다. 서로를 사랑했었던 남과 여,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남자에게는 아내와 딸이 생겼다. 그는 그녀를 위해 가족과 일을 버릴 수는 없었다. 아마도 두 번 다시 그들이 마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자는 친구와 함께 방콕으로 떠나고 남자는 가족의 곁에 남는다. 입구에서 마지막으로 그를 돌아다보는 그녀, 무슨 말이 하고 싶었을까. 그녀가 떠난 후 그는 과거를 떠올린다.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기억들이었다. 대화중에 여자는 남자에게 묻는다. “당신 날 사랑했어?”라고……. 우리 모두는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리 길지 않다. <방콕>은 현실적인 사랑, 사랑이 가지고 있는 슬픔에 대한 이야기이다.


깨끗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아침 <어젯밤>


제임스 설터는 파티에서 들은 애기를 바탕으로 <어젯밤>을 썼다고 한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두 편이나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번역가인 월터 서치, 병에 걸린 그의 아내 마리트, 그리고 두 부부가 알고 지내는 친구 수잔나가 <어젯밤>의 등장인물들이다. 그들은 상상하기 힘든 일을 앞두고 있었다. 그건 바로 불치병에 모든 것을 빼앗긴 마리트의 자살을 돕는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약물을 투여해 병자에게 영원한 안락(죽음)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안락사라고 할까. 호텔에서의 특별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세 사람은 계획에 착수한다. 아내의 팔에 주사기를 꽂자 안에 든 용액이 혈관 속으로 들어가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남편은 친구이자 밀회를 즐기는 사이였던 수잔나와 탐닉의 시간을 보낸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이들의 행동, 이것은 우리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양면성을 표현하고 있다. 소설가 하성란의 말처럼 제임스 설터는 사람들의 위선을 다 폭로하는 작가이고 그 대표작이 『어젯밤』이다. 그런데 월터와 수잔나는 그들이 바라던 깨끗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제임스 설터가 어떤 작가인지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에 대한 찬사를 인용하면서 이 리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갈기갈기 찢긴 인간관계는 제임스 설터의 전문 분야다. 그는 생각지도 못하게 엉망이 되어버린 순간을 포착하는 데 가히 천재적이다. (…….후략……. 시애틀 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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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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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인터넷에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 메이저리그 투수의 킬리만자로 등반 준비 소식이었다. 연봉 425만 달러(약 50억 원)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가 해발고도 5,895미터의,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올라야만 했던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중학생 시절 읽었던 헤밍웨이의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이 준 감동 때문이었다. 그 감동은 꿈이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그 투수는 올해 1월 킬리만자로의 정상에 올랐다고 한다. 평생의 꿈을 이룬 그는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이렇게 어린 소년에게 감동과 꿈을 선물했던 헤밍웨이의 단편 13편을 묶은 단편집 『킬리만자로의 눈』 (문학동네)이 출간되었다. 『노인과 바다』가 작가의 노련함을 보여주는 소설이라면 이 단편집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 노련함이 ‘형성되고 축적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시인 거트루드 스타인의 말처럼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적인 문인(文人) 중 한 명이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체험한 후 등단한 그의 작품들에는 환멸. 공허와 고독, 그러면서도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우리 모두를 위한 기록 <킬리만자로의 눈>

 

『킬리만자로의 눈』은 헤밍웨이 최고의 단편으로 사랑받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생생함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작품은 실제로 킬리만자로산과 인접해 있는 아프리카 케냐의 암보셀리 국립공원에서 집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이 발표된 1930년대의 암보셀리 지역은 국립공원이 아니었으며 사냥도 가능했다.) 이 시기 그는 이미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라 있었지만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무릎이 가시에 긁혔을 때 완벽한 치료를 못해 오른쪽 다리가 썩기 시작하는 소설가 해리는 제대로 된 글이 나오지 않아 초초해하는 헤밍웨이 자신과 닮아 있다.

 

이제는 잘 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알게 되면 쓰려고 아껴두었던 것들을 영영 쓰지 못할 터였다. 뭐, 그것을 써보려고 애만 쓰다 결국 쓰지 못하는 일도 함께 없어지는 것이지만, 사실은 영영 쓸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랬기 때문에 옆으로 밀어놓은 채 쓰는 일을 미루어왔던 것인지도 몰랐다. (p. 14)

 

남편과 한 자녀까지 잃어버린 미망인 그녀(헬렌)에게 해리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녀는 그를 통해서 새로운 삶을 구축했고 그 또한 자신의 옛 것을 팔아 안정과 안락을 얻었다. 그러나 그 삶은 너무나도 공허하게 끝을 향해 달려간다. 마치 하얗게 빛나는 킬리만자로 정상의 만년설이 지구온난화로 인해 소멸되어 가는 것처럼 말이다. 『킬리만자로의 눈』은 어찌 보면 일장춘몽과 같은 인생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기록이다.

 

허무한 존재들의 안식처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일명 두꺼운 책의 대명사…….로 불리는 『율리시스』의 저자 제임스 조이스는 헤밍웨이에게 문학과 삶 사이의 장막을 축소한 작가라는 찬사를 보내면서 단편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을 언급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늦은 시간 텅 빈 카페에 홀로 남아 있는 노인, 그리고 두 웨이터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절망에 빠져 자살을 기도했던 노인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웨이터들의 상반된 시선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연로(年老)한 손님이 어서 집에 가주기를 바라고 나이가 위인 사람은 나뭇잎 그늘에 앉아 있는 손님의 심정을 이해했다.

 

“잠들고 싶지 않은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이고, 밤에 불을 켜두어야 하는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지.” (p. 131)

 

8페이지에 불과한 이 짧은 소설의 전면에는 허무가 깔려 있다. 연장자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이 알고 보면 허무 그 자체라는 것을. 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건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즉, 안식처라는 사실을……. 솔직히 내가 이 이야기의 참맛을 느끼기엔 아직은 좀 이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삶의 허무에 대해 논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게다.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은 독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혹시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하지 않나요?”라고.

 

영웅이 되기를 소망했던 청년 <이제 내 몸을 뉘며, 가지 못할 길>

 

이 단편집에 포함되어 있는 『이제 내 몸을 뉘며』와 『가지 못할 길』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영웅이 되기를 소망했던 청년 헤밍웨이는 적십자사의 운전병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두 단편을 통해 우리들은 그야말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었던 젊은 시절의 그를 간접적으로 만나 볼 수 있다.(그때 헤밍웨이의 나이가 19세였다고 하니 두려울 게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영혼이 언제 빠져나갈지 모르는 전쟁터, 여기저기 누워있는 시체들, 더운 날씨로 인해 그들의 몸은 부풀어 오른다. 그런 상황 속에서 편히 잠을 잔다는 건 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수면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다. 그 욕구를 물리치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유년시절 송어낚시를 하던 냇물을 떠올리고, 기도문을 외우고, 깨어있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젊은 운전병은 자신이 원하던 영웅이 되지는 못했지만 훈장을 받고 아무나 할 수 없는 경험을 쌓는다.

 

단편소설은 적은 분량 안에 심오한 메시지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간결해야 하는데 바로 그런 면에 있어서 헤밍웨이가 제격이라고 하겠다. 그는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체를 구사한 작가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킬리만자로의 눈』은 대작가의 탄생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인 동시에 그의 특색 또한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끝으로 라이프지의 글을 인용하며 리뷰를 마친다.

 

헤밍웨이의 스타일은 간결하고 깔끔하면서도 생생하고 풍부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스타일을 흉내 냈지만 그 누구도 똑같이 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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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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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태어나서 삶을 즐기다 죽는 사람이 있고 삶이라는 외줄 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있다. 배우들이 있는가 하면 줄타기 곡예사가 있다.” (막상스 페르민)

 

영국 근대소설의 개척자로 불리는 새뮤얼 리처드슨이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 이후 수많은 작가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랜만에 새 장편소설 『위풍당당』으로 우리들을 찾아온 성석제, 익살과 재치가 있는, 진정한 이야기꾼이라는 평가를 받는 소설가가 바로 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번에는 또 어떤 이야기로 사람들의 배꼽을 빼놓을 것인가.

 

하늘에 닿는다는 이름을 가진 백여 미터 높이의 절벽인 지천벽 아래에 있는 용소 근처에 자리 잡은 마을 같지 않은 마을이 『위풍당당』의 배경무대이다.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궁벽한 강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은 모두 여섯 명이다. (여산, 영필, 소희, 이령, 새미, 준호) 그들이 인적 드문 곳에 거주하게 된 사연이 살짝 궁금하긴 하지만 그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기로 한다.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삶을 영위해 가던 사람들의 공간에 침입자들이 들이닥치면서 위기가 찾아온다. 성석제의 손을 통해 표현되는 위기, 분명 심각한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중간 중간에 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실제로 많이 웃었다.) 『위풍당당』은 작가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소설이다.

 

유쾌한 코미디 속에 숨어있는 진실

 

생리대를 사러 산 넘어 태강면 면소재지까지 간 새미, 그런데 새미를 지켜보는 눈들이 있었다. 그들은 양정묵이 이끄는 건달, 아니 조폭들이었다. 새미는 조폭들의 끈적끈적한 시선을 눈치 채고 숨지만 정묵의 똘마니인 세동에게 발견되고 만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를 뒤따라왔던 동생 준호가 세동의 뒤통수를 후려쳐 큰 상처를 입힌다. 바로 이 일이 발단이 되어 촌스러운 강마을에 조폭들이 침입하게 되는 것이다. 약간은 심심하게 진행되던 이야기는 마을을 접수하려는 정묵 일행과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려는 여섯 사람이 대치하는 상황이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고비의 순간이 되었으나 성석제의 표현은 유쾌하기 그지없다.

 

“아 뭐, 이런 개젓같은 일이 생긴 거야? 어이, 아저씨 아줌마 지금 뭐하자는 거야? 우리 올려보내줘.”

양구가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하늘에서 누군가 말한다.

“저 봐, 저 말하는 거 좀 봐. 싸가지 없고 버르장머리도 없고 예의도 없고. 조폭 맞아. 진짜 조폭이라고. 재들이 밖으로 나와 보지? 우린 저 중에 한 놈도 못 당할걸.” (p. 138~139)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시골 사람들에 의해, 똥냄새 나는 구덩이에 빠져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에 빠진 조폭들, 그야말로 주객전도가 된 것과 같다. 이처럼 독자의 웃음보를 자극하는 장면들을 목격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성석제의 소설(글)이 해학적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위풍당당』 역시 작가의 입담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게 이 소설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작가의 말’을 통해 『위풍당당』이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주어진 운명으로서의 식구가 아닌, 자신이 선택해서 한 식구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외부의 부당한 간섭과 편견에 맞서 싸우며 가까이서 부대끼다 어느 결에 서로의 세포가 닿고 혈액이 섞이며 연리지처럼 한 몸이 된 사람들, 그들에게 강 같은 평화가 함께 하기를. (‘작가의 말’ 중에서......)

 

운명을 거부한 사람들, 그리고 피안의 세계

 

자! 이제 궁금증을 해결할 때가 되었다. 전혀 모르는 사이(새미와 준호는 남매)였던 여섯 사람은 왜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강마을 한 가족이 되었을까.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이들에게 각각 아픈 과거가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지역사회 유력자의 후취로 들어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노력했지만 인정받지 못한 소희, 부잣집의 적장자였으나 친인척들의 농간에 의해 모든 것을 잃고 정신병자 취급까지 당한 영필, 설상가상으로 아내의 쓸쓸한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준다. 자신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욕과 아픔을 주고 딸까지 죽인 남편을 피하는 마지막 방법으로 스스로 몸을 던졌던 이령, 의붓아버지에게 추행을 당하는 새미와 그 사실을 알게 된 준호……. 이런 연유들로 여섯 인물들은 운명이 정한 길을 따르지 않았다. 정형화된 틀보다 자신의 선택으로 한 식구가 된 사람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한 몸이 된 그들, 그네들에게 있어 마을이라는 공동체는 목숨만큼이나 소중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외부에서 볼 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세계 같지만 그곳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꿈꾸는 피안(彼岸)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강을 배경으로 여유롭게 떠 있는 일업편주, 그 위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고 자연과 영혼이 연결된 세계, 상처받은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자연의 품에서 치유 받는다. 그 공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조폭들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위풍당당』에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조폭 선발대를 잡은 마을 사람들이 흥분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술에 취해 미친 듯이 노래하고 춤추는 대목이다. 모든 것을 잊고, 정묵이 지켜보는지도 모르는 채 그들은 몸을 흔들어댄다. 마치 장례식장에서 춤을 춘다는 어느 나라의 조문객들처럼 참 아이러니하다.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코미디 속에 진실이 숨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성석제는 이 소설이 새로운 식구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했지만 그 이면에는 숭악하고 못생긴 늑대 호랑말코들(현대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리고 그는 소망한다. 모든 이들에게 강 같은 평화가 함께 하기를.

 

프랑스의 작가 막상스 페르민은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삶을 즐기는 사람과 애쓰는 사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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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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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한 영화감독 우디 알렌의 <매치 포인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소포클레스가 말했지. 태어나지 않는 게 더 큰 축복일 수도 있어.” 소포클레스는 아이스킬러스, 유리피데스와 더불어 그리스 3대 비극작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또한 그는 삶에 관한 수많은 명언들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과연 태어나는 것보다 태어나지 않는 게 더 큰 축복일까. 이 말에 대해서는 아마도 의견이 분분하지 않을지……. 소설가 김영하가 5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주인공 ‘제이’의 삶을 보노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해보게 된다. 이 소설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사랑도 받지 못했지만 자신이 처한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한 평범하지 않은 소년의 짧은 일대기를 이른바 김영하식 슬픔의 미학으로 표현하고 있다.

 

귓가에 솜털이 보송한 소녀가 고속버스터미널의 한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는다. 그 아기는 어린 친모의 손을 떠나 작은 구멍가게를 하는 돼지엄마의 품으로 넘어간다. 그 아이의 이름이 바로 ‘제이’이다. 그에게 있어 돼지엄마는 단순히 자신을 키워준 여성이 아닌 마음의 안식처였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음의 안식처는 점점 황폐해지고 멀어져간다.(술과 마약으로 인하여) 결국 제이는 돼지엄마에게 버림을 받게 된다. 그 후 보육원을 거쳐 차마 입에 담기에도 거북한 십대들의 밑바닥 삶 등을 체험하며 성장한다. 그렇게 제이는 책 후반에 나오는 진샘의 말처럼 강한 아이가 되어간다. 하지만 그는 어른이 아니었다. 어쩌면 작품의 서두에 등장하는 끔찍한 현장에 홀로 남겨졌을 소년의 후생(後生)이 즉, 제이가 아니었을까. 두 소년의 모습이 희한하게 오버랩 된다.

 

검은 꽃, 퀴즈쇼와 함께 소위 ‘고아 트릴로지(3부작)로 평가받는 이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고통과 슬픔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아이러니한 알레그로이다. 빠르게, 빠르게 주마등처럼 모든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홀로 감수하는 어린 소녀의 얼굴, 심장이 아파 한강 다리 아래에서 가슴을 쥐어뜯는 제이……. 우리가 미처 지각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포착해낸다. 건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생생한 문체가 두드러져 보인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대목은 제4장이다. 어린 나이에 산전수전을 다 겪고 열여덟 살에 폭주족의 리더가 된 제이가 광복절 대폭주를 저지하려는 순찰차와 의경들의 눈앞에서 승천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력을 느끼지 못하는 그의 영혼은 끝없이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버림받았던 한 아이는 전설이 되었다.

 

서평의 첫머리에 언급했던 소포클레스가 남긴 또 다른 명언처럼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일로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는 존재이다. 하지만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제이는 통곡도, 눈물도 거의 흘리지 않는다. 애초에 타인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참 슬픈 운명이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분명 독특한 매력을 가진 책이다. 그러나 이야기 곳곳에 보이는 적나라함이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물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들이 우리들의 불편한 진실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 소설이 출간되기 한 달 전에 김영하는 단편 『옥수수와 나』로 제36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는데 재미있었다는 평들이 많았다. 그에 반해 이 이야기는 지나치게 진지하고 무거운 느낌이다. 그 무거움을 약간만 벗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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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레레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2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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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된 피해자의 집에서 앨범 한 장이 눈에 뜨였다. 17세기 전반기에 시스티나 예배당 성가대의 일원이었던 그레고리오 알레그리가 쓴 <미세레레>라는 성악곡을 녹음한 앨범. 그 음악은, 아주 높은 선율을 따라가는 목소리는 듣는 사람을 홀리는 마력(魔力)을 지나고 있었다. 과연 이 성악곡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프랑스 스릴러 소설의 황제라는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제의한다. 그 비밀을 풀어보지 않겠느냐고…….

 

노쇠한 형사의 비밀 풀이

 

그랑제의 장편소설 <미세레레>는 파리의 아르메니아 성당에서 한 성가대 지휘자가 시체로 발견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마침 성당 사무실에 있었던 은퇴한 경찰관 리오넬 카스단이 제일 먼저 사건 현장에 도착한다. 엄밀히 말해 경감으로 퇴직한 카스단에게는 이 사건을 수사할 권한도,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60대의 말라깽이 남자 빌헬름 괴츠를 죽인 범인을 찾는 일에 착수한다. 이제부터 우리는 ‘말수가 적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던 사람을 누가 왜 죽었을까?’하는 의문을 지닌 채 골치 아픈 늙은 경찰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소설과 음악

 

소설 속에 음악이 등장하는 경우는 수없이 많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이다. 이야기에서 소개되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나 ‘평균율 클라비아곡집’ 등은 작품의 매력을 더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하루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작가들이 작품 안에 음악을 첨가한다. 그랑제 역시 그런 작가들 중 한 명이다. 아니, 한때 음악가가 되려고 했다던 그에게 소설과 음악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일 것이다. 검은 선, 돌의 집회……. 그의 전작들을 읽어보면 이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번 소설은 아예 음악을 전면(제목부터가)에 내세웠고 그 음악은 필수 불가결한 실마리로 작용한다.

 

카스단은 플레이를 중단시켰다. 그리고는 오디오를 끄고 음반으로 덮인 벽돌과 종이 계란판을 붙여놓은 천장 사이에서 자기를 휘감고 있는 침묵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잠재의식의 신호 같은 것이 들려왔다. 잠재의식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있었다. 듣는 사람을 홀리는 그 목소리, 또는 <미세레레>라는 성악곡에 살인사건의 단서가 있다는 통지였다. (1권, p. 73)

 

진리 속의 범죄

 

카스단은 자신과 비슷한 면을 지닌 후배 경찰관 세드릭 볼로킨과 팀을 이루어 사건 수사에 박차를 가한다. 괴츠를 죽인 살인자가 아이라는 볼로킨의 말, 그리고 그가 과거에 지휘했던 한 성가대 소년의 실종 등의 사실이 밝혀지며 사태는 오리무중으로 빠진다. 거기에 성도착증 환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의혹까지……. 범행 수법을 보면 아이가 살인을 했다고 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들은 결코 죄를 짓지 않습니다.”라는 한 영화 속의 대사가 결정적인 공리(公理)가 되기를 바라면서도 그 진리마저 의심해 봐야 하는 것이 두 형사들의 몫이었다.

 

괴츠와 친밀하게 지냈거나 연관이 있던 사람들이 연이어 죽임을 당하는데 그 현장들에는 어김없이 미세레레에 나오는 구절이 쓰여 있다. 볼로킨이 카스단에게 설명하는 것처럼 미세레레는 원래 속죄와 용서를 비는 구약성경 ‘시편’의 한 장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들은 ‘진정한 속죄, 용서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범인은 살인을 통해서 그들을 단죄하는 동시에 구원하고자 한다. 그런데 과연 타인의 혀나 눈동자 같은 인체기관을 훼손시키면서까지 하는 살인을 구원이라고 합리화 시킬 수 있을까. 비록 피해자들에게 죄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속죄(구원)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이 소설에 쓰인 내용들은 과장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무심히 넘기기엔 무리가 따른다. 아이들의 범죄도, 진리의 탈을 쓴 범죄도 현실의 삶 속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검은 진실 찾기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 <미세레레>가 악에 관한 하나의 설명이라고 말했다.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장르와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주제인 아이들의 순수한 목소리……. 그런데 그 목소리(음악)가 살인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런 색다른 설정과 이야기 곳곳에 보이는 치밀한 자료 조사의 흔적들은 독자들의 궁금증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미세레레> 1권은 괴츠의 과오와 사건의 배후에 나치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마무리된다. 카스단과 볼로킨은 점점 검은 진실에 다가간다. 프로이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말이다.

 

“프로이드가 뭐랬는지 알아? ‘우리는 누구나 어린이와 대형사건 범죄자에게 매료된다.’ 우리가 찾는 범인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어린이인 동시에 대형사건 범죄자 말이야.” (1권, p.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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