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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평점 :
‘미국 문학의 잊힌 영웅’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제임스 설터를 잊힌 영웅이라 평가했다. 그는 실제로 사관학교를 졸업해 전투기 조종사로서 한국전쟁에까지 참전했던 영웅이다. 『어젯밤』은 어두운 수채화 같은, 그러면서도 몽환적인 아름다움이 깃든 열편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이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어둠과 빛 사이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매력적이긴 해도 완벽하지는 않은, 『어젯밤』의 사람들……. 이 작품은 인간에 대한 미학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임스 설터는 그 미학 뒤에 숨겨진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 좀처럼 부각되기 쉽지 않은 본질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작가이다.
“그때 설터가 나(로버트 레드포드)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나뭇잎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보면 잎맥이 보이는데, 그는 다른 건 다 버리고 그 잎맥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어쩌면 이 말이 설터의 스타일을 가장 시적으로 잘 요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잎맥만 살리는. 인생을 관통하는, 가장 연약하면서도 본질적인 사실을 설터처럼 그려내는 작가를 또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미문(美文)으로 포장된 어두운 진실
『어젯밤』에 담긴 이야기들은 단편소설의 걸작들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하트포드 쿠란트( 코네티컷주 현지 신문)의 찬사와 같이 이 작품들은 시적이고 정밀한 문장, 이른바 미문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어두움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수채화처럼 설터가 쓰는 미문의 이면에는 어두운 진실이 존재한다. 열 개의 나뭇잎을 모두 들어 올려 잎맥을 살펴보면 좋겠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 이 단편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포기』, 『방콕』, 『어젯밤』에 대한 느낌들을 간략하게나마 적어볼까 한다.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또 바꿀 수 없는가. <포기>
서른한 살 생일을 맞은 아내 안나와 남편 잭, 그들은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아무리 부부라 해도) 타인의 취향이나 습관을 바꾸어놓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얼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로의 작은 습관들이 거슬릴 때 이 부부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까. 안나와 잭은 상대방이 지나치게 자주 사용하는 문구, 식습관, 그리고 옷 등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런 것들을 버리도록 요구했고 그걸 ‘포기’라고 불렀다. 말은 쉬워 보이나 사실 그리 간단하지 않은 방법이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몸에 베인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욕실 세면대 언저리에 물기 남기지 않기, 컵 들고 마실 때 새끼손가락 펴지 않기, 그들은 사소한 동작(습관)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고 그 요구는 받아들여졌다. 작품 내에서는 그 과정이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포기’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잭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그건 바로 데스와의 부적절(?)한 관계였다. 잭에게 있어 데스를 사랑하는 것은 큰 행복이었지만 그 (동성 간의) 사랑은 용납되기 힘든 것이었다. 안나는 자신의 생일에 잭에게 그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과연 ‘포기’라는 것이 신발에 들어간 자갈을 털어내는 일과 비슷할 뿐일까.
당신 날 사랑했어? <방콕>
설터가 생각나는 대로 써서 단시간에 완성했다는 작품 <방콕>, 그런데 난 ‘왜 제목이 방콕이지?’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이 작품은 한때 연인이었던 두 남녀의 대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들의 대화는 상당히 원색적아고 직설적이다. 서로를 사랑했었던 남과 여,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남자에게는 아내와 딸이 생겼다. 그는 그녀를 위해 가족과 일을 버릴 수는 없었다. 아마도 두 번 다시 그들이 마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자는 친구와 함께 방콕으로 떠나고 남자는 가족의 곁에 남는다. 입구에서 마지막으로 그를 돌아다보는 그녀, 무슨 말이 하고 싶었을까. 그녀가 떠난 후 그는 과거를 떠올린다.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기억들이었다. 대화중에 여자는 남자에게 묻는다. “당신 날 사랑했어?”라고……. 우리 모두는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리 길지 않다. <방콕>은 현실적인 사랑, 사랑이 가지고 있는 슬픔에 대한 이야기이다.
깨끗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아침 <어젯밤>
제임스 설터는 파티에서 들은 애기를 바탕으로 <어젯밤>을 썼다고 한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두 편이나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번역가인 월터 서치, 병에 걸린 그의 아내 마리트, 그리고 두 부부가 알고 지내는 친구 수잔나가 <어젯밤>의 등장인물들이다. 그들은 상상하기 힘든 일을 앞두고 있었다. 그건 바로 불치병에 모든 것을 빼앗긴 마리트의 자살을 돕는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약물을 투여해 병자에게 영원한 안락(죽음)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안락사라고 할까. 호텔에서의 특별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세 사람은 계획에 착수한다. 아내의 팔에 주사기를 꽂자 안에 든 용액이 혈관 속으로 들어가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남편은 친구이자 밀회를 즐기는 사이였던 수잔나와 탐닉의 시간을 보낸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이들의 행동, 이것은 우리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양면성을 표현하고 있다. 소설가 하성란의 말처럼 제임스 설터는 사람들의 위선을 다 폭로하는 작가이고 그 대표작이 『어젯밤』이다. 그런데 월터와 수잔나는 그들이 바라던 깨끗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제임스 설터가 어떤 작가인지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에 대한 찬사를 인용하면서 이 리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갈기갈기 찢긴 인간관계는 제임스 설터의 전문 분야다. 그는 생각지도 못하게 엉망이 되어버린 순간을 포착하는 데 가히 천재적이다. (…….후략……. 시애틀 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