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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평점 :
먼저 읽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워낙 감탄하며 읽은 터라 앞으로 신형철 책은 읽기도 전에 무조건 별 다섯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만큼 멋진 문장 투성이였음에도, 다루고 있는 영화들이 왠지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그다지 들지 않아 별 하나를 뺐다. 예를 들어 김기덕의 영화는 천하의 신형철이 극찬한다 할지라도 전혀 볼 생각이 없다.
역시나 한번 읽고 말기에는 주워담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 꼼꼼히 공부하는 마음으로 정리해본다.
1부 신형철의 '사랑론'
스피노자는 '나는 너를 사랑해'가 상대방에게서 끌어낼 수 있을 두 가지 결과를 말한다. 사랑을 받기 시작한 사람이 자신은 확실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응, 나도 나를 사랑해." 과연 그럴 것이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 역시 옳은가? ... 사랑을 받기 시작한 사람이 자신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그가 필연적으로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될 거라 기대해도 좋은 것일까? 스피노자의 두 번째 설명은 언뜻 논리의 비약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지금 결과를 확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한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해본다면 받아들일 여지가 생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이 너의 '자부심'만을 북돋우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 '조건'하에서만 응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19)
신형철은 고백을 하는 사람보다 받은 사람의 입장에 서서 사랑론을 펴나가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고백받은 사람은 어떻게 이 관계에서 사랑을 실현할 수 있을까? 만약 그 고백에서 나의 '자부심'부터 부풀어오른다면 일단 빨간불 정지 신호다. 그것만으로는 나는 그 사랑에 응답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신형철의 사랑론의 출발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안의 무엇을 발견할 수 있어야 응답할 '자격' 혹은 '조건'이 생기는 걸까?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25)
이제 여기서는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26)
요약하자면 '나는 너를 사랑해'에 대해 '나도 너를 사랑해'가 가능하려면 고백을 받은 나는 먼저 나의 '없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조건 하에서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만나 무언가, 아마도 인생에서 만나는 어떤 힘든 무엇을 함께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내 눈에 밝힌 단어는 '견딘다'는 말. 신형철은 은연중에 사랑이란 사랑할 자격이 있는 두 사람이 함께 무언가를 견디는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상대방의 고백에 대해 나 역시 어떤 시절에는 내 '자부심'만을 즐기며 이를 동정이나 연민으로 돌려줬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사랑이 아니며, 나는 그 시절 사랑할 자격이 없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부부는 서로 사랑하지만 지금 함께 무엇을 견디고 있지 않다.
혹시 나의 '있음'과 너의 '있음'이 만나 사랑하게 되는 경우는 없는가? 우리가 서로 만나던 10년 전 당시 우리는 서로의 그 '있음'으로 충만했다는 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견디는 것뿐만 아니라 '누리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가? 누릴 수 있는 사랑이 어떤 순간에는 더 잘 견딜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나는 신형철의 사랑론을 좀더 확장하고 싶다. 이를테면 나의 '없음'을 정확히 직시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나의 '있음'도 발견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만이 누군가의 고백에 응답할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써 상대의 '있음'을 찬양함과 동시에 조금씩 발견되는 그의 '없음' 역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 두사람의 사랑은 '없음'의 연대일 뿐 아니라 '있음'으로 무장한 연대이기도 하다는 것.
다음은, 40대 초반 똑똑한 꼰대들이 만든 연애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 [러브픽션], [건축학개론], [내 아내의 모든 것]에 대한 신형철의 섬뜩한 한 말씀.
이제는 물어야 할 것 같다. 남자들의 연애 성장 서사는 어떤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고 또 나아가야 할까. 무엇이 우리 어리석은 남자들을 진정으로 성장하게 하는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연인을 의심했다가 이를 뉘우치면서인가, 아니면 사랑이라는 것에는 애초에 '그 자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성장이란,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에만 진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만을 해왔기 때문에 늘 같은 자리를 맴돌았을 뿐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너에게 용서받기 위한 반성, 아니, 이미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해버린, 그런 반성 말이다.(46)
꼰대가 되지 않겠다는 건강한 자의식이 있는 남자들은 이제 어디가서 [건축학개론]을 감명깊게 봤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위의 인용은 신형철이 그러라고 미리 뿌려놓은 지뢰같다.
[케빈에 대하여]에 대한 평
이것은 그저 서로를 '정상적으로' 사랑하는 데 실패한 두 사람의 이야기다. 한 사람은 덜 사랑했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은 너무 사랑했다.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둘은 노력했다. 엄마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는 척했고, 아들은 엄마를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척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파국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둘 모두를 기소하는 데 실패한다. 단지 이해하려고 애쓸 뿐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케빈을 소시오패스 살인자로, 에바를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나쁜 엄마로 기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두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이 이야기 내부에 있으며, 일단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는 한, 누구도 법적 판단 혹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휘두를 수 없게 된다.(56)
마을에서 점잖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우리 부부는, 우리끼리는 이 사람, 저 사람 많이들 씹고 비아냥대며 깔깔거리곤 한다. 뒷담화를 절대 우리 둘 너머로까지 발설하지 않겠다는 암묵적 합의가 나름 도덕적 변명이라면 변명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으며, 은연중에 그들을 판단하는 기준을 우리에게서 찾아온 셈이다. 일상에서 그들을 만날 때 우리는 진심으로 선의만을 갖고 대하려고 노력하지만, 위의 인용을 읽고 나면 그것만으로는 떳떳하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사랑과 서사의 유비 관계에 대한 신형철의 생각
인간의 내부에는 여러 마리의 짐승이 산다. 진화심리학은 그중 하나를 본능이라 부르고, 프로이트는 다른 하나를 충동이라 부르며, 라캉은 또 다른 하나를 욕망이라 부른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본능과 충동과 욕망이 어떤 법칙을 갖고 있는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사랑에 대한 대개의 정의는 시도되는 순간 실패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랑은 전칭명제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매번 개별적인 사례로 존재한다. 그래서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다만 '무엇도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그 내부에 있다.
... 왜 서사(이야기)라는 것이 필요한가. 이 세계에는 여러 종류의 판단체계들이 있다. 정치적 판단, 과학적 판단, 실용적 판단, 법률적 판단, 도덕적 판단 등등. 그러나 그 어떤 판단체계로도 포착할 수 없는 진실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런 진실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한 인간의 삶을 다시 살아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할 때에만 겨우 얻어질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000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나나]다.(65)
내가 소설을 읽게 된 이유다. 일상을 살면서 개개의 사건, 인물을 우리는 어떻게든 판단하게 되지만, 판단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실은 그것이 진실일 수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2부
2부 전체에서 이 책 덕분에 관심이 생긴 영화는, 김기덕과 홍상수를 빼고 나니 [멜랑콜리아]와 [테이크 셸터]가 남는다. 다음은 [테이크 셸터]의 주인공 커티스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밝힌 신형철의 방법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세 단계를 차례로 밟아가는 일이다. 그 세 단계를 각각 ‘주석’ ‘해석’ ‘배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것들의 ‘사실’ 관계를 확인해야 하고(주석), 확인된 사실에 근거해서 텍스트의 ‘의미’를 추론해내야 하며(해석), 이렇게 추론된 의미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평가하면서 그 텍스트가 놓일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배치). 특별할 것도 없는 이런 정리를 시도해본 것은 이 세 작업의 몫을 혼동하거나 작업의 단계를 무시하는 사례들이 더러 있어서다. 예컨태 밝혀지지 않은 사실 관계 앞에서 고된 실증 작업을 생략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공백을 메우거나(주석을 해석으로 대체하는 경우), 지난한 해석의 노동을 건너뛰고 신속히 텍스트를 분류한 다음 그것으로 해석이 완료됐다고 믿거나(해석을 배치로 대체하는 경우) 하는 일들 말이다. 우리가 이 영화를 두고 ‘금융 대란 이후 중산층의 불안’을 다룬다고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이 텍스트를 더는 ‘해석’할 필요가 없도록 신속히 ‘배치’해버리는 일이다.(114)
텍스트뿐만 아니라 현실의 사건과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위의 과정을 성실히 거쳐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너무 빨리 ‘배치’해버린다.
타인의 불행을 해석한다는 것
많은 훌륭한 이야기들의 원천이 대체로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불행인 것은 왜인가. 말년의 프로이트는 ... 세 종류의 고통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것. 자주 고장 나고 결국 썩어 없어질 ‘육체’, 무자비한 파괴력으로 우리를 덮치는 ‘세계’, 그리고 앞의 두 요소 못지않게 숙명적이라 해야 할 고통을 안겨주는 ‘타인’이 그것들이다. 그러고 보면 최근에 본 영화들만을 생각해봐도 [아무르]는 육체 때문에, [라이프 오브 파이]는 세계 때문에, [더 헌트]는 타인 때문에 불행해진 인간들을 그렸다고 할 만하다. 이런 식이니까 비평적 글쓰기라는 것은 많은 경우 타인의 불행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일이 되고 만다. 이 난감한 일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원칙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불행의 해석학’이 갖추어야 할 ‘해석의 윤리학’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 앞에서 사용한 개념을 다시 가져오자면, ‘주석’은 최대한의 정확성을, ‘해석’은 최대한의 단독성을, ‘배치’는 최대한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작업이다. 어떤 텍스트가 최대한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도록 ‘배치’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텍스트를 세상에서 하나뿐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며, 그것이 바로 ‘해석’이라 불리는 행위의 이상일 것이다. 특히 그 텍스트가 타인의 불행을 다룬 것일 때는 더욱 그렇다. 타인의 불행을 놓고 이론과 개념으로 왈가왈부하는 일이 드물게 용서받을 수 있는 길 중 하나는 그 불행이 유일무이한 것으로 남을 수 있도록, 그래서 쉽게 분류되어 잊히지 않도록 지켜주는 일이다.(118)
하나하나 옳은 말씀! 역시나 텍스트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맺는 외부와의 모든 관계에서도 적용되는 원칙이다.
3부
[더 헌트]
그러니까 이것은 광기의 지옥이 아니라 이성의 지옥이다. ... 광기의 창궐로 열린 지옥의 문은 이성으로 닫을 수 있지만, 이성의 집단적 사용이 자체의 한계 때문에 열어버린 지옥의 문은 무엇으로 닫을 수 있을 것인가.(127)
... 신이 아닌 인간의 이성이 과연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던 이 영화는 이제 다른 가능성 하나를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 진실은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 능력은 때로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어 발현될 수 있다는 것. 그를 통해 인간은 서로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것.(129)
... 그런데도 저 총성은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제 진실이 무엇인지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진실로도 설득할 수 없는 것을 무슨 수로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 이 메시지는 어쩔 수 없이 또 카프카를 떠올리게 만든다. ... 인간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소되기도 한다는 것.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그 재판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것. ...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도 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이 영화의 마지막 총성이 알려준다.(131)
... 내가 어떤 글에서 한 말이지만,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유죄추정의 원칙’에 몸을 싣는다. ...
비록 이 영화가 비관적이기는 하지만 비관적 결론이 거절하는 것은 낙관이지 희망이 아닐 것이다. 낙관의 논리는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이고 희망의 논리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진실에 도달하는 일이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불가능하지 않으므로, 필사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132)
...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133)
그런데 영화를 찾아보고 나서 이 글은 내 안에서 조금 빼걱거린다. 글에서는 영화 속 사건이 '이성의 집단적 사용' 때문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내가 직접 영화를 본 바로는 오히려 이성의 부족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어린이집 원장도, 그녀가 부른 상담사도, 친구들과 마을 주민들도 전혀 이성적이지 못했다.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은 거다. 그런 점에서 5살 클라라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악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성의 과잉이든 이성의 부족이든 신형철의 처방은 유효하다. 우리의 의지로 기댈 곳은 이성 밖에 없고, 이성의 한계에 부딪히더라도 때로는 진실이 스스로를 증명하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기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타인에 대해서는 필사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에 서야 한다는 것.
한편, 함께 영화를 본 아내는 고통을 받고 있는 피해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현실에서 이 영화가 본의아니게 가해자들을 옹호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 것 같아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단다고 많은 가해자들이 이 영화에서 나온 논리, 즉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 없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무협의를 받고 있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굳이 이런 영화가 필요한 것인지 의문스럽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