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2012 제2회 웹진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태용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태용 [머리 없이 허리 없이]

 

문체가 멋지다. 김훈처럼 짧게 끊어지는 건조한 대사를 쓰는데, 김훈의 '이순신'이 한껏 무게잡고 멋있는 척해서 거리가 느껴지고 불편한다면, 이 소설 속 남루한 '아버지'의 독백은 이런 상황이라면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겠다 싶어 더 가까워지고 쉽게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듣고 있느냐. 듣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믿어야지 어떡하겠느냐. 달리 도리가 없지 않느냐. 내가 언젠가 너에게 이런 말투를 썼느냐. 모르겠다. 너도 모르겠다고 말하지는 마라.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느냐. 너의 생각이 궁금한 것은 아니다. 오로지 나의 생각이 궁금할 뿐이다. 너도 나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느냐. 생각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 내가 여전히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 놀랍지 않느냐. 대답하지 마라. 어짜피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대신 대답해주랴. 좀더 간절히 원해봐라. 원하면 완망하게 되어 있다.(27)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가 어릴 적 실종되었다가 미국으로 입양되어 스미스가 된 아들 앞에서 속으로 하는 독백이다. 이보다 더 적확한 문체가 있을.! 몇 십년 만에 만난 낯선 아들에게 (과거의) 숟가락과 (현재의) 오줌통을 들먹이며 자신의 일대기를 속으로 읊는다. 속으로만 떠들 수 있을 뿐이다. 소설의 스토리를 모르고 첫 장부터 이런 말들이 쏟아지니 처음엔 읽기가 힘들엇는데, 끝까지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어보면 한 문장 한 문장 헛 말이 하나도 없다. 다 이해된다. 멋진 소설이다.

 

 

김미월 [질문들]

 

나는 끊임없이 질문을 받는다. 오빠는 원룸 보증금을 빌려줄 수 있는지 질문 하고, 집주인은 보증금은 줄테니 월세를 올려서 사는 건 어떤지 질문 한다.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관심사를 질문 한다. 또한 화자는 생계를 위해 스스로도 남들에게 질문을 해야한다. 앙케트 조사 요원.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나는 수많은 질문들을 상대해왔다. 요즘 청소년의 독서 경향에 대해, 우리나라 커피전문점의 커피 가격에 대해, 분리수거의 실효성에 대해, 성범죄자의 적절한 처벌 방안에 대해, ... 그것들은 항목도 다양했고 목적도 다양했고 대상도 다양했다. 다양하지 않은 것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지급되는 건당 수당뿐이었다.(180)

 

그런데 내가 하는 질문에 사람들은 답례품으로 지급되는 수건 하나 얻을 노력만 기울이며 건성으로 대답한다. 게다가 그 대답은 나나 그들에게나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나에게 쏟아지는 질문은 나를 목숨 내놓고 고민하게 만들지만, 사실 그 질문에 나는 선택권이 없다. 그것은 질문을 가장한 '명령'이니까. 그렇게 소설가 지망생 아르바이트생인 나와, 보경과 맞은 편 팻말 아르바이트생은 질문에 갇쳐 허우적대며 살고 있다.

 

순간 뜬금없이 나는 지금 쓰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을 살리기로 결심하면서 갑자기 사기가 충천해졌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무엇이든 묻고 싶었다. 다만 묻고 싶기는 하되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알 수가 없다는 것, 그것이 문제였다.(185)

 

그러나 질문할 주인공을 스스로 창조하고,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질문일지라도 누군가 그것을  쓸모 있게 만들어줄 답을 찾기 위해 애쓴다면'(171)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나는 행복할 것이다. 

 

 

황정은 [뼈도둑]

 

황정은 소설은 허투루 읽을 수가 없다. 왜 갑자기 외딴 곳에 들어가서 방에서 벽지를 뜯어내고 장작불을 피우고 살지? 왜 하필 옆집엔 개가 짖지? 왜 개수대에 개수구멍이 없지? 분명 생경한 소재 하나하나에 상징을 담아 치밀하게 짜놓았을 텐데, 나에게는 생뚱맞은 장면들이고 그 의미는 해독이 안된다. '그'가 동성 연인을 사고로 잃고 혼자 틀어박혀 죽지 못해 살다가, 연인의 유골함을 훔치러 떠난다, 떠난 길에 죽는다는 내용인데, 술술 읽히기는 한데 한 번 읽어서는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지 파악이 안 되고, 그렇다고 바로 다시 읽기는 소설이 무거워서 '다음에 다시 읽어봐야지' 미루게 된다.  

 

그렇게 궁금하세요 그렇습니다 이 새끼가 나한테 넣고 내가 이 새끼에게 넣습니다 안심하세요 내게도 취향이라는 게 있어 나는 당신들에겐 조금도 넣고 싶지 않습니다(208)

 

 

김이설 [부고]

 

인물들이 모두 원형적이고 사건들은 극단적이다. 심지어 작가가 소설에 개입해서 주인공의 심정을 설명한다. 수준 미달인 것 같은데, 의도적인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뒷맛은 나쁘지 않다. 한 편의 그리스 비극 같다는 '선정의 말'이 실감난다. 소설의 완성도를 왈가왈부하는 게 독자의 윤리는 아닐 것이다. 소설 속 인물에 최대한 몰입해서 감정이입해보는 것. 그거면 된다. 소설 속 아버지가 생생하다. 

 

평생 교육자로 살았다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그건 자기 논리일 뿐이었다.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이혼과 재혼을 철저히 숨긴 걸 투철한 자기관리라고 내세웠다. 자기의 외도로 집을 나간 사람의 죽음 앞에서, 저렇게 서슬 퍼런 영정 앞에서 밥술을 뜨는 사람이었다. 불운을 겪은 딸을 위해 이사하고, 국적을 바꾸겠다는 아들을 막지 못한 것도 자신이 아량을 베풀었기 때문이라고 믿는 장본인이었다.(239)

 

논문을 쓰다 보면 그것이 내 논문 같고, 내가 석사 박사가 된 것 같았다. 학원으로 출근하다보면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 같았다. 상준과 누워 있으면 상준의 아내 같고, 여자를 엄마라고 부른 뒤로는 여자의 친자식 같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 같았다.(241)

 

 

손보미 [육인용 식탁]

 

완전히,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같다. 멋지다. 친구 부부 두 쌍을 초대해 육인용 식탁에 둘러 앉은 자리에서 내내 불편해하던 나의 아내는 돌연 일어나 나와 친구의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폭로하고, 친구의 아내도 울면서 그건 실수였다고 인정한다. 나는 혼란에 빠지고, 흥분해서 그동안 쌓아두었던 아내와 장인에 대한 불만을 터뜨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결혼 후 매일 쓰고 있는 '가족 일기'를 쓰는데 도움을 얻으려고 읽었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글쓰기'라는 단어를 '가족 일기 쓰기'라고 바꾸어 읽었다.

 

사회구조적인 매트릭스에서 자신을 분리시킨 채 성급한 반성과 화해, 자기 정당성 확보의 글쓰기로 잠시 위안받고 산뜻하게 일상으로 복귀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그 삶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조금씩 불편해지며 깨어있는 게 목표라면 목표였다.(31)

 

단지 우리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오래 기억하고싶어 시작한 사초 같은 기록일지라도, 위의 목표를 무시하고 싶지 않다. 우리 가족이 함께 겪은 일 뿐만 아니라 가족 간에 생긴 일조차 사회구조적인 매트릭스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으므로 우리 가족에 대한 기록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는 행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Part 1 삶의 옹호자로서의 글쓰기

 

가족 일기를 쓸 때 '무엇을, 어떤 자세로 써야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조언.

 

글쓰기는 '나'와 '삶'의 한계를 흔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삶'은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의 지루한 반복이다. 기쁨과 슬픔을 자아냈던 대소사의 나열은 삶의 극히 일부분이다. '나'의 범위 역시 피와 살이 도는 육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정신의 총체이기도 하며 관계의 총합이기도 하다. 나는 나 아닌 것들로 구성된다.(53)

 

가족 일기 쓰기는 '우리 가족'과 '삶'의 한계를 흔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족 일기는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의 지루한 반복 속에서 선택된 대소사의 나열에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 가족의 일기는 우리 가족이 아닌 것들로 구성된다.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덮는 것은 일기다. 글쓰기가 아니다. 비밀이 한 사람에게라도 발언할 때 생겨나는 것이듯 글쓰기라는 것에는 어차피 '공적' 글쓰기라는 괄호가 쳐 있다. 그래서 글쓰기는 곧 남들에게 보여지는 삶, 해석당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일이다.(60)

 

대개는 자기가 자기를 대하는 태도로 남을 대한다. 만약 누군가가 자기 과거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유사한 삶의 경험치를 가진 타인을 동정과 수치로 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을 극복하는 과정은 자기의 편견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다.(62)

 

나도 그동안 내가 쓴 '가족' 일기를 '가족들' (중에 현재 문해가능한), 즉 아내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내 글같지 않은 글이 부끄러워서다. 그러나 가족 일기가 글쓰기가 되려면 그러면 안된다. 이 책을 읽은 이후로 가족 일기를 아내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꼭 대형마트 계산대이거나 먼지 휘날리는 작업장이거나 밀양 송전탑 반대 현장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존재 물음 과정에서 이른 곳이라면, 현실의 베일이 벗겨지는 곳이라면, 삶의 의미를 정의 내리게 되는 곳이라면, 거기가 바로 삶의 최전선이다.(78)

 

가족의 일상을 기록한다는 행위 역시 결국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과정일 때만 의미가 있다.

 

 

Part 2 감응하는 신체 만들기

 

1.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을 읽어야 하는데, '책 읽는 태도'에 대한 저자의 조언.

 

나는 학인들에게 책을 읽되 '진실한 독해'를 당부했다. 여기서 진실함이란 사실에 부합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 부학하는 것이다. 곧 책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저자의 의도에 맞추려 낑낑대지 말고 자기 삶의 구체적인 정황을 떠올리고 접목시키면서 '주관적'으로 읽어달라고 했다.(84)

 

2. 시집을 읽어라.

 

또한 시집을 읽고 나면 학인들은 어휘에 부쩍 관심을 갖는다. 언어에 대한 감수성이 활성화되는 모양이다. 시인이 공들여 고르고 삭히고 매만진 언어를 나누면서 학인들은 타인의 말을 깊게 들이마시고 어떤 생각이나 어떤 사물을 고정된 틀에서 해방시켜 바라보는 윤리적인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이다.(90)

 

저자가 일러주는 시집 읽는 방법은 아내가 말해 준 방법과 같다. 무턱대고 읽되, 인상적인 한 단어, 한 구절 찾기. 그리고 낭독하기. 함께 읽고 생각 나누기. 가능하다면 암송하기. 참고도서 들춰보며 학자들의 권위에 복종하지 말고 나만의 느낌에 집중하기.

 

3.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나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책을 읽자.

 

"알아야만 하는 것을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호기심"말이다. 푸코는 이어서 "앎에 대한 열정이 지식의 획득만 보장할 뿐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되도록이면 아는 자의 이랄을 확실히 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었다(106)

 

4. 합평하기

 

합평을 통해 우리는 배운다. 읽는 사람은 불쾌함 없이 자신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듣는 사람은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말하는 기술을 익힌다.(109)

 

 

Part 3 사유 연마하기

 

1. 자명한 것에 물음 던지기

 

그러니 글을 쓸 때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 어떻게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 알려고 해야 한다.(116) ... 좋은 글은 질문한다. 선량한 시민, 좋은 엄마, 착한 학생이 되라고 말하기 전에 그 정의를 묻는다. 좋은 엄마는 누가 결정하는가, 누구의 입장에서 좋음인가, 가족의 화평인가, 한 여성의 행복인가. 때로 도덕은 가족, 학교 등 현실의 제도를 보호하는 값싼 장치에 불과하다. ... 천 개의 삶이 있다면 도덕도 천 개여야 한다. ... '질문하는 글'은 '생성하는 삶'으로 이어진다.(118)

 

가족의 일상사, 특히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할 때, 내가 속한 사회 집단의 잣대로 해석하지 않기. 내 관점이 내 것이 맞는지 끊임없이 질문하기.

 

2. 자기 입장 드러내기

 

어떤 글을 읽어보았을 때 필자가 무슨 일을 경험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있어야 좋은 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딱딱한 말로 하자면 일종의 '당파성'인데 ... 당파성은 지지 정당이나 이념의 문제라기보다 내가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동조하는지에 가깝다.(123)

 

가족 일기를 쓸 때, 글을 쓰는 '나'가 드러나야 한다. 예를 들어 아이들 간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할 때처럼, 내가 등장하지 않는 어떤 사건을 쓸 때도 그 사건을 기록하기로 마음 먹게 된 이유, 내 시선의 톤, 나의 평가, 그 사건을 지켜볼 때의 나의 감정이 문체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3.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

 

작가든 기자든 글 쓰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대상에서 비범한 그 무엇을 찾아내는 안목,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비틀어 보고 뒤집어 생각하는 훈련이 요구된다.(128)

 

에세이, 칼럼, 논문 등 모든 글에는 하나의 메시지, 하나의 질문이 담겨 있어야 한다. ... 그러니 글쓰기 전에 스스로를 설득해야 한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글을 쓰기 전에 스스로에게 중얼중얼 설명하면서 자기부터 설득하는 오붓한 시간을 갖자. 두툼한 책이든 한 페이지 글이든 한 줄로 정리하고 시작하는 것이 글에 대한 예의다.(129)

 

4.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쓰자

 

어떤 경험을 했을 때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고 내 진짜 느낌에 집중하려는 노력이 글을 참신하게 만든다. 어떤 글이 읽힌다며, 독자의 눈길을 붙들었다면 그것은 진부하지 않다는 뜻이다.(132)

 

5. 사건이 지나간 자리 관찰하기

 

좋은 글에는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 있다. ... 어떤 느낌, 어떤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그것을 당연시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더 깊고 진지하게 팍드는 작업, 그게 문제의식이다. 우선은 나를 향해 '왜'라고 질문하는 것 말이다.(136)

 

사건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돋는가. ... 살면서 무수히 겪게 되는 별의별 일들, 소소하든 대수롭든 그것을 통과한 신체는 변화를 겪는다.(136)

 

6. 니체를 읽어라

 

 

Part 4 추상에서 구체로

 

1. 자기만의 글쓰기에 익숙지 않은 사람은 일단 문장을 짧게 써라

 

2. 베껴 쓰기

 

베껴 쓰기는 정신에 군불을 때주는 일용할 땔감이다.(156)

 

3. 글감을 찾는 법 : 마음에 걸리는 일 쓰기

 

글쓰기는 파편처럼 흩어진 정보와 감정에 일종의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주제'를 부각하는 행위다. 단계가 있다.

1.마음에 걸리는 것 일단 쓰기. 어지러운 생각들을 자유롭게 마구잡이로 풀어놓는다.

2.그리고 편집하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판단해서 덜어내고 보완한다.

3.행동 표정 대화를 떠올리고 그대로 묘사하여 글에 생기를 불어넣는다.이런 식으로 차분히 앉아서 하나씩 써나가는 거다.

4.내가 쓰고자 하는 화제에 대한 사전적이고 교훈적인 정의를 내리기. '나에게 그 화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 나의 경험의 의미는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 글 쓰는 과정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다.(159)

 

4. 관념적이고 모호한 표현을 피하기

 

지키고 싶은 것이 있을 경우 자기 검열, 사회적 검열로 글이 활발히 써지지 않는다. 용기가 필요하다.(160)

 

5. 글의 위치성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과 주례사가 재미없는 이유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말들이 특정 개인에게 와닿을 리 없다.(164)

 

내 글이 누구에게 가닿길 바라는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먼저 걸어가고 느낀 자로서 무슨 이야기를 건넬까.(166)

 

6. 별자리적 글쓰기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다.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세 단계가 있다. 구성을 생각하는 음악적 단계, 조립하는 건축적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짜 맞추는 직물적 단게다." 음악적 단계는 대략적인 글의 주제와 톤을 정하는 게 아닐까 싶다. 실연당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혹은 청년 실업의 이야기를 밝게 써볼까. ... 조립하는 건축적 단계는 레고 블록처럼 생각과 정보를 모아놓는 것이다. 직물적 단게는 별자리를 연결하듯 촘촘히 이음새를 엮고 모양새를 지어 완성하는 것이다.(169)

 

7. 힘 빼기

 

내가 쓴 글이 추상적인지 구체적인지, 잔뜩 멋 부렸는지 진실한 지는 바로 알기 힘들고 남이 쓴 글과 내가 쓴 글을 읽으면서 감각을 익힐 수 있다.(172)

 

8. 계몽적으로 마무리하지 않기

 

덤덤히 글로 썼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게 나를 철들게 한다더니 살림이 그렇다"고. 그런데 만약 내가 한참 살림과 육아에 지쳤을 때 누가 "살림이 널 철들게 할 거야"라고 당위처럼 말했으면 반감이 들었을 것이다. 글 쓸 때 주의해야 하는 지점이다. ... 그래서 계몽, 곧 도덕적 마무리는 위험하다. 상황을 단순화시켜버린다. 감정을 평준화한다.(173)

 

Part 5 르포와 인터뷰 기사 쓰기

 

사실에 근거한 취재에 배경지식과 비판의식을 더한 글이다. 그런 점에서 르포르타주는 글쓰기의 한 장르가 아니라 글쓰기의 기본 준칙이자 윤리에 가깝게 느껴졌다. 현장, 사람, 기록. 이것은 늘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세 가지가 아닌가.(1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먼저 읽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워낙 감탄하며 읽은 터라 앞으로 신형철 책은 읽기도 전에 무조건 별 다섯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만큼 멋진 문장 투성이였음에도, 다루고 있는 영화들이 왠지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그다지 들지 않아 별 하나를 뺐다. 예를 들어 김기덕의 영화는 천하의 신형철이 극찬한다 할지라도 전혀 볼 생각이 없다.

 

역시나 한번 읽고 말기에는 주워담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 꼼꼼히 공부하는 마음으로 정리해본다.

 

1부 신형철의 '사랑론'

 

스피노자는 '나는 너를 사랑해'가 상대방에게서 끌어낼 수 있을 두 가지 결과를 말한다. 사랑을 받기 시작한 사람이 자신은 확실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응, 나도 나를 사랑해." 과연 그럴 것이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 역시 옳은가? ... 사랑을 받기 시작한 사람이 자신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그가 필연적으로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될 거라 기대해도 좋은 것일까? 스피노자의 두 번째 설명은 언뜻 논리의 비약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지금 결과를 확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한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해본다면 받아들일 여지가 생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이 너의 '자부심'만을 북돋우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 '조건'하에서만 응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19)

 

신형철은 고백을 하는 사람보다 받은 사람의 입장에 서서 사랑론을 펴나가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고백받은 사람은 어떻게 이 관계에서 사랑을 실현할 수 있을까? 만약 그 고백에서 나의 '자부심'부터 부풀어오른다면 일단 빨간불 정지 신호다. 그것만으로는 나는 그 사랑에 응답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신형철의 사랑론의 출발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안의 무엇을 발견할 수 있어야 응답할 '자격' 혹은 '조건'이 생기는 걸까?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25)

 

이제 여기서는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26)

 

요약하자면 '나는 너를 사랑해'에 대해 '나도 너를 사랑해'가 가능하려면 고백을 받은 나는 먼저 나의 '없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조건 하에서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만나 무언가, 아마도 인생에서 만나는 어떤 힘든 무엇을 함께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내 눈에 밝힌 단어는 '견딘다'는 말. 신형철은 은연중에 사랑이란 사랑할 자격이 있는 두 사람이 함께 무언가를 견디는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상대방의 고백에 대해 나 역시 어떤 시절에는 내 '자부심'만을 즐기며 이를 동정이나 연민으로 돌려줬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사랑이 아니며, 나는 그 시절 사랑할 자격이 없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부부는 서로 사랑하지만 지금 함께 무엇을 견디고 있지 않다.

 

혹시 나의 '있음'과 너의 '있음'이 만나 사랑하게 되는 경우는 없는가? 우리가 서로 만나던 10년 전 당시 우리는 서로의 그 '있음'으로 충만했다는 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견디는 것뿐만 아니라 '누리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가? 누릴 수 있는 사랑이 어떤 순간에는 더 잘 견딜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나는 신형철의 사랑론을 좀더 확장하고 싶다. 이를테면 나의 '없음'을 정확히 직시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나의 '있음'도 발견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만이 누군가의 고백에 응답할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써 상대의 '있음'을 찬양함과 동시에 조금씩 발견되는 그의 '없음' 역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 두사람의 사랑은 '없음'의 연대일 뿐 아니라 '있음'으로 무장한 연대이기도 하다는 것.

 

 

다음은, 40대 초반 똑똑한 꼰대들이 만든 연애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 [러브픽션], [건축학개론], [내 아내의 모든 것]에 대한 신형철의 섬뜩한 한 말씀.

 

이제는 물어야 할 것 같다. 남자들의 연애 성장 서사는 어떤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고 또 나아가야 할까. 무엇이 우리 어리석은 남자들을 진정으로 성장하게 하는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연인을 의심했다가 이를 뉘우치면서인가, 아니면 사랑이라는 것에는 애초에 '그 자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성장이란,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에만 진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만을 해왔기 때문에 늘 같은 자리를 맴돌았을 뿐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너에게 용서받기 위한 반성, 아니, 이미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해버린, 그런 반성 말이다.(46)

 

꼰대가 되지 않겠다는 건강한 자의식이 있는 남자들은 이제 어디가서 [건축학개론]을 감명깊게 봤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위의 인용은 신형철이 그러라고 미리 뿌려놓은 지뢰같다.

 

 

[케빈에 대하여]에 대한 평

 

이것은 그저 서로를 '정상적으로' 사랑하는 데 실패한 두 사람의 이야기다. 한 사람은 덜 사랑했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은 너무 사랑했다.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둘은 노력했다. 엄마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는 척했고, 아들은 엄마를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척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파국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둘 모두를 기소하는 데 실패한다. 단지 이해하려고 애쓸 뿐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케빈을 소시오패스 살인자로, 에바를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나쁜 엄마로 기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두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이 이야기 내부에 있으며, 일단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는 한, 누구도 법적 판단 혹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휘두를 수 없게 된다.(56)

 

마을에서 점잖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우리 부부는, 우리끼리는 이 사람, 저 사람 많이들 씹고 비아냥대며 깔깔거리곤 한다. 뒷담화를 절대 우리 둘 너머로까지 발설하지 않겠다는 암묵적 합의가 나름 도덕적 변명이라면 변명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으며, 은연중에 그들을 판단하는 기준을 우리에게서 찾아온 셈이다. 일상에서 그들을 만날 때 우리는 진심으로 선의만을 갖고 대하려고 노력하지만, 위의 인용을 읽고 나면 그것만으로는 떳떳하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사랑과 서사의 유비 관계에 대한 신형철의 생각

 

인간의 내부에는 여러 마리의 짐승이 산다. 진화심리학은 그중 하나를 본능이라 부르고, 프로이트는 다른 하나를 충동이라 부르며, 라캉은 또 다른 하나를 욕망이라 부른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본능과 충동과 욕망이 어떤 법칙을 갖고 있는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사랑에 대한 대개의 정의는 시도되는 순간 실패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랑은 전칭명제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매번 개별적인 사례로 존재한다. 그래서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다만 '무엇도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그 내부에 있다.

... 왜 서사(이야기)라는 것이 필요한가. 이 세계에는 여러 종류의 판단체계들이 있다. 정치적 판단, 과학적 판단, 실용적 판단, 법률적 판단, 도덕적 판단 등등. 그러나 그 어떤 판단체계로도 포착할 수 없는 진실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런 진실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한 인간의 삶을 다시 살아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할 때에만 겨우 얻어질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000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나나]다.(65)

 

내가 소설을 읽게 된 이유다. 일상을 살면서 개개의 사건, 인물을 우리는 어떻게든 판단하게 되지만, 판단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실은 그것이 진실일 수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2부

 

2부 전체에서 이 책 덕분에 관심이 생긴 영화는, 김기덕과 홍상수를 빼고 나니 [멜랑콜리아][테이크 셸터]가 남는다. 다음은 [테이크 셸터]의 주인공 커티스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밝힌 신형철의 방법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세 단계를 차례로 밟아가는 일이다. 그 세 단계를 각각 주석’ ‘해석’ ‘배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것들의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하고(주석), 확인된 사실에 근거해서 텍스트의 의미를 추론해내야 하며(해석), 이렇게 추론된 의미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평가하면서 그 텍스트가 놓일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배치). 특별할 것도 없는 이런 정리를 시도해본 것은 이 세 작업의 몫을 혼동하거나 작업의 단계를 무시하는 사례들이 더러 있어서다. 예컨태 밝혀지지 않은 사실 관계 앞에서 고된 실증 작업을 생략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공백을 메우거나(주석을 해석으로 대체하는 경우), 지난한 해석의 노동을 건너뛰고 신속히 텍스트를 분류한 다음 그것으로 해석이 완료됐다고 믿거나(해석을 배치로 대체하는 경우) 하는 일들 말이다. 우리가 이 영화를 두고 금융 대란 이후 중산층의 불안을 다룬다고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이 텍스트를 더는 해석할 필요가 없도록 신속히 배치해버리는 일이다.(114)

 

텍스트뿐만 아니라 현실의 사건과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위의 과정을 성실히 거쳐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너무 빨리 배치해버린다.

 

타인의 불행을 해석한다는 것

 

많은 훌륭한 이야기들의 원천이 대체로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불행인 것은 왜인가. 말년의 프로이트는 ... 세 종류의 고통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것. 자주 고장 나고 결국 썩어 없어질 육체’, 무자비한 파괴력으로 우리를 덮치는 세계’, 그리고 앞의 두 요소 못지않게 숙명적이라 해야 할 고통을 안겨주는 타인이 그것들이다. 그러고 보면 최근에 본 영화들만을 생각해봐도 [아무르]는 육체 때문에, [라이프 오브 파이]는 세계 때문에, [더 헌트]는 타인 때문에 불행해진 인간들을 그렸다고 할 만하다. 이런 식이니까 비평적 글쓰기라는 것은 많은 경우 타인의 불행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일이 되고 만다. 이 난감한 일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원칙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불행의 해석학이 갖추어야 할 해석의 윤리학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 앞에서 사용한 개념을 다시 가져오자면, ‘주석은 최대한의 정확성을, ‘해석은 최대한의 단독성을, ‘배치는 최대한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작업이다. 어떤 텍스트가 최대한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도록 배치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텍스트를 세상에서 하나뿐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며, 그것이 바로 해석이라 불리는 행위의 이상일 것이다. 특히 그 텍스트가 타인의 불행을 다룬 것일 때는 더욱 그렇다. 타인의 불행을 놓고 이론과 개념으로 왈가왈부하는 일이 드물게 용서받을 수 있는 길 중 하나는 그 불행이 유일무이한 것으로 남을 수 있도록, 그래서 쉽게 분류되어 잊히지 않도록 지켜주는 일이다.(118)

 

하나하나 옳은 말씀! 역시나 텍스트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맺는 외부와의 모든 관계에서도 적용되는 원칙이다.

 

 

3

 

[더 헌트]

그러니까 이것은 광기의 지옥이 아니라 이성의 지옥이다. ... 광기의 창궐로 열린 지옥의 문은 이성으로 닫을 수 있지만, 이성의 집단적 사용이 자체의 한계 때문에 열어버린 지옥의 문은 무엇으로 닫을 수 있을 것인가.(127)

... 신이 아닌 인간의 이성이 과연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던 이 영화는 이제 다른 가능성 하나를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 진실은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 능력은 때로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어 발현될 수 있다는 것. 그를 통해 인간은 서로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것.(129)

... 그런데도 저 총성은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제 진실이 무엇인지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진실로도 설득할 수 없는 것을 무슨 수로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 이 메시지는 어쩔 수 없이 또 카프카를 떠올리게 만든다. ... 인간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소되기도 한다는 것.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그 재판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것. ...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도 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이 영화의 마지막 총성이 알려준다.(131)

... 내가 어떤 글에서 한 말이지만,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유죄추정의 원칙에 몸을 싣는다. ...

비록 이 영화가 비관적이기는 하지만 비관적 결론이 거절하는 것은 낙관이지 희망이 아닐 것이다. 낙관의 논리는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이고 희망의 논리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진실에 도달하는 일이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불가능하지 않으므로, 필사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132)

...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133)

 

그런데 영화를 찾아보고 나서 이 글은 내 안에서 조금 빼걱거린다. 글에서는 영화 속 사건이 '이성의 집단적 사용' 때문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내가 직접 영화를 본 바로는 오히려 이성의 부족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어린이집 원장도, 그녀가 부른 상담사도, 친구들과 마을 주민들도 전혀 이성적이지 못했다.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은 거다. 그런 점에서 5살 클라라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악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성의 과잉이든 이성의 부족이든 신형철의 처방은 유효하다. 우리의 의지로 기댈 곳은 이성 밖에 없고, 이성의 한계에 부딪히더라도 때로는 진실이 스스로를 증명하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기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타인에 대해서는 필사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에 서야 한다는 것.

 

한편, 함께 영화를 본 아내는 고통을 받고 있는 피해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현실에서 이 영화가 본의아니게 가해자들을 옹호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 것 같아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단다고 많은 가해자들이 이 영화에서 나온 논리, 즉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 없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무협의를 받고 있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굳이 이런 영화가 필요한 것인지 의문스럽다고 평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종옥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종옥 [거리의 마술사]

 

교실에서 왕따를 당하던 절반쯤 자폐아 '남우'가 모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복도 창밖으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이 사건이 남겨진 가해자와 방관자들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그 과제에 달성하기 위해 작가는 소설 속에서 어떤 마술적 장치를 만들었는가? (이 질문이 소설에 대한 제대로 된 질문이기는 한 건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남우가 자신을 때렸던 친구 '태영'에게 행한, 칼로 찔러 죽이는 마술은 성공했고, (즉 실제 보복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신을 공중에 띄우려는 마술은 실패했다. (즉 남우는 죽었다) 그런데 이 두 마술 덕분에 적어도 그의 옛 소꼽친구 '희수'는 남겨진 자로서 '마법'을 경험한다. 아래로 떨어진 친구를 보며 희수는 환상적인 느낌을 경험한다.

 

그가 분명히 무언가 실패했을 때, 자신의 시도 속에서 영원히 추락했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끔찍했고 고통스러웠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후에 아주 기적 같은 고요가 찾아왔다. ... 그것은 세상이 일순간 아주 평화로워진 것 같은 마법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남우를 내려다보는 학생들 모두가 일순간 그 세계 속에 포함되게 하는, 마치 그들 모두가 하나의 눈을 가진 하나의 영혼이 되게 하는 마법이었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이 본 모든 것이, 이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것은 분명히 남우가 그들 모두를 대신해서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 모두가 남우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세상 전부가 떨어졌다.(10)

 

소설 초반에 제시된, 정지된 그림처럼 묘사된 이 장면이 이 소설의 핵심인 것 같은데, 희수가 느낀 것이 나에겐 공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내 독서의 한계다. 작가는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남우는 마치 예수를 연상케 하고, 그 예수는 마술이라는 속임수, 그것도 절반 밖에 성공하지 못한 속임수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려고 했다는 구도... 잘 모르겠다.

 

 

이장욱 [절반 이상의 하루오]

 

말하자면 이런 느낌이었다. 여행자인 그녀와 나는 이쪽에 있고, 여행지의 풍경과 사람들이 저쪽에 있다. 이쪽과 저쪽은 서로를 바라보지만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유리막 같은 게 있다. 우리는 유리막 저편의 세계를 구경하고 저편의 세계는 우리에게서 어떤 식으로든 수수료를 받는다. 여행이든 관광이든, 우리가 그 풍경 속에서 살아간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 중간에 하루오가 슥 들어와 양쪽의 경계를 흩뜨려 놓는다. 유리막 같은 것이 갑자기 사라져버려서 바깥의 공기가 밀려들어온다. 그런 것이다.(64)

 

소설을 읽는 여러 즐거움 중에 하나는 실제로는 만난 적 없는 새로운 캐릭터를 생생하게 만나게 되는 경험이다. 이건 작가의 능력이 출중해야 가능한 일인데, 이장욱이 창조한 '하루오'는 마치 얼마전 읽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가 상정한 여행자(실은 여행자로서의 김영하)가 소설 속에 생생하게 현현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야기 구조는 수월하게 탄탄해서 읽는 내내 레고 블록을 설명서를 보며 하나씩 짜 맞추는 느낌이었다. 나에게 가장 하이라이트라면, 하루오와 헤어지고, 함께 여행했던 여자친구와도 헤어진 후 이런 저런 성년으로서의 쓴 경험(결혼과 부부 생활의 실패와 무책임한 도피로서의 이혼과 아버지의 죽음)을 한 뒤에 다시 하루오의 소식을 들었을 때이다. 과연 작가는 이 경험을 다 겪은 후의 너절한 화자에게, 아니 우리에게, 똑같은 시간을 살아낸 하루오를 어떤 모습으로 보여줄까. 잠깐 멈추고 상상을 해보았다. 여전한 하루오, 망가진 하루오... 어느 쪽일까. 정답은 절반의 하루오였다. 그리고 화자도 절반의 하루오가 된다. 꼼꼼히 읽지 않아서 왜 소설의 제목이 절반의 하루오가 아니라 절반 이상의 하루오인지는 잘 모르겠다)

 

 

황정은 [상행]

 

소설 초입에선 어렸을 적 경험이 겹쳤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간 결혼식 같은 행사에서 나이 든 분들이 "네가 갸 아들이냐?"고 아는 척 할 때의 불편함. 나는 알 리 없고 그 분들도 나를 촌수로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먼 관계. 이 소설의 화자는 그보다 더 먼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 내 친구의, 어머니의, 돌아가신 고모부의, 새 처와 그의 노모. 그 두 할머니가 돌아가신 고모부의 동생 소유의 집에서 살다가 동생이 죽으면서 동생의 자녀들이 팔려고 내놓은 그 집에서 쫓겨날 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다행히 화자는 나처럼 불편함을 느낀 것이 아니라 아득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질적이지만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자고 가.

밥 줄게.

 

다음에 오냐.

네.

정말로 오냐.

네.

나 죽기 전에 정말로 올 테냐.

......(158)

 

대화가 정말 리얼하다. 작가노트에서도 문경에서 경험했던 일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밝혔듯이, 소설속 두 할머니들이 쓰는 말투는 경상북도 북부 사투리가 맞다. 짧고 퉁명스러운 듯한 말투. 나도 고향이 근처라 더 잘 와닿았다.

 

화자는 딱 반나절을 그곳에 있었으면서 그 곳이 왠지 잊혀지지 않을 것임을 예감한다. 보자고 굳게 마음을 먹어도 언제나 잊었던 월식을, 이번에야말로, 잊지 않고 보고야 말리라 다짐한다.

 

피곤한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161)

 

목적 없이 떠난 짧은 여행에서, 목적을 갖고 그곳에 갔던 오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만, 화자는 무언가를 얻어왔다. 변한 것이다. 피곤했지만 이제는 눈을 부릅뜨고 기다리겠다고 의지하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염원했음에도 잊기만 했던 그 무엇을!

 

 

손보미 [과학자의 사랑]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준, 아주 오랬동안 나랑 친했던 그 사람이 떠올랐다. "난 너랑 제발 이성적으로 대화하고 싶어. 왜 맨날 감정적인거야. 왜 자꾸 외롭다고만 하는거야. 나보고 어쩌라고."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의 어떤 공포가 자신의 감정에 직면하는 것을 방해했다. 결국 매우 지적이고 오만한 태도와, 인간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감정들을 부정하는 무지와, 자신의 의해 상처받은 상대를 논리적으로 비난하는 몰염치를 드러낸 채 무책임하게 서둘러 우리로부터 도망쳤다.

 

그는 자신이 세상 이치에 아주 능통하다고 생각하는 '햇병아리'였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의 그런 태도는 평생 동안 유지된 셈이다. 그는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와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태도로 과학자보다는 영화배우에 걸맞다는 인상을 주었다.(175)

 

과학자 고든 굴드는 가정부 에밀리 로즈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억압했기에 자신을 '가정부의 유혹을 이겨낸 훌륭한 남편'이라고 정의했고, 여전히 아내 비비안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에밀리에게 '왜 나를 유혹했냐'고 비난했다. 이런 고든의 억압된 욕망을 알아본 사람은 당연히 그의 아내 비비안이었고, 그녀가 떠난 뒤에도 고든은 평생 아내가 왜 떠났는지, 에밀리가 왜 자신을 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남들은 관심없는 자신의 연구주제를 고개 끄덕여가며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다. 스스로는 상대와 지적인 대화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그의 감정 영역에서의 결함은 자신의 전문분야인 물리학에서조차 자신이 발견한 중력장 이론의 의미를 자신만 이해하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한다.

 

소설 말미에 고든이 에밀리에게 보냈다는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의미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당신은 언젠가 중력에 맞서서 날아오를 거요.

그리고 당신은 음탕한 여자가 아니오."(204)

 

 

정용준 [당신의 피]

 

다섯 살 때 엄마의 관자노리를 칼로 찔러 죽인 아버지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내 인생에서 퇴장했고, 화자는 이모집으로 입양이 되었다. 24년 후 그 아버지라는 사람이 다시 나타난다. 화자는 신장투석실에서 일하고 있고, 아버지가 그곳에 투석을 받으러 오면서 생기는 화자의 심경의 변화.

 

극적인 상황을 설정해놓고 그 상황에서의 작중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작품.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아버지를 만나기 전, 나는 미리 심리적인 방어막을 쳐 놓는다. 그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뭐라고 하든 신경쓰지 않겠다고, 철저하게 무시하겠다고. 실제 그는 내게 아무런 의미도없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그와 함께 했던 기억도 없고, 그렇기에 그가 내게 어떤 상처를 준 것인지 나도 의식하지 못한다. 완벽한 타인.

 

그런데 여기서부터 작가는 장난을 친다. 그와 화자의 관계가 화자가 생각한 것으로 끝나지 않게끔... 화자가 기대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행동 때문에 화자는 동요한다. 아버지는 관 속과도 같은 투석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주변 환자들과도 대화를 시도하고, 이제는 의사와 간호사들도 그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 때 화자의 마음은 요동친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그가 불행하게 살거나 어딘가에서 죽기를 바라지도 않았지만 또 그렇다고 그가 불행하지 않거나 잘 지내기를 바라지도 않고 있었다. 그것은 나로서는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었다.(233)

 

이런 복잡한 감정과 고민이 마음을 지배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규정하고 있는 그에 대한 내 입장을 부정하는 격이 아닌가. ... 그의 얼굴을 대하면 대할수록 점점 비참해지는 자신을 발견했고 마음이 상했으며 이상하게 억울했으며 기이한 수치심을 느꼈다.(234)

 

그래도 우린 ... 혈육이 아니냐.(238)

 

왜 화자는 아버지가 투석실을 도망치듯 떠난 뒤, 극심한 허기를 느끼며 달걀을, 투석을 받는 환자들이 먹는다는 달걀을 꾸역꾸역 우겨 넣어야 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가 말해주는 '여행을 하게 되는 9가지 이유'에 대한 나의 거친 요약

 

1. 무언가를 찾기 위해 떠났다가 원래 찾던 것과 전혀 다른 것, 훨씬 중요한 어떤 것을 얻는 것이 여행이기 때문에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51)

 

2. 낯선 환경이 나를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스스로 반복 극복하기 위해서

 

나의 유년은 잦은 이주로 점철되었다. 새로운 학교로 전학하여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원경험들이 쌓여, 그것이 프로그램으로 내 안에 저장되었을 것이다. 어떤 인간은 스스로에게 고통을 부과한 뒤, 그 고통이 자신을 파괴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안의 프로그램은 어서 이 편안한 집을 떠나 그 고생을 다시 겪으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디로든 떠나게 되고, 그 여정에서 내가 최초로 맛보게 되는 달콤한 순간은 바로 예약된 호텔의 문을 들어설 때이다. 벨맨이 가방을 받아주고 리펩션의 직원은 내 이름을 알고 있다. '나는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제 한동안은 안전하다.' 평생토록 나는 이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61)

 

3. 오직 현재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82)

 

4. 인류는 진화론적으로 끝없이 이동하도록 설게된 존재이므로

 

5. 타인의 여행을 엿보는 것도 여행의 한 방법이고, 세계를 이해하는데에는 타자의 시선도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나와는 다른 그들의 느낌과 경험이 그들의 언어로 표현되어 내 여행의 경험에 얹힌다.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에 비여행, 탈여행이 모두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다.(117)

 

6. 여행지에서라야 나는 나의 그림자의 유무를 자각하게 되므로. '그림자'란 타인으로부터 승인받는 나의 정체성이다. 고향에서 나는  타인들로부터 그 장소에 적합한 인물로 환대를 받는다. 반면 여행지에서 나는 그림자가 없는 인간이고, 그러므로 그 장소에 대한 어떠한 의무도 책임도 없다. 여행지에서라야 나는 나의 그림자를 의식하며 고향으로 돌아갈지 말지 고민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7. 여행지에서 우리는 모르는 타인의 환대에 의존하는 약한 존재가 되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 인류애를 느낄 수 있으므로

 

푸른 구슬에서 시인이 바로 인류애를 떠올린 것은 지구라는 행성의 승객인 우리 모두가 오랜 세월 서로에게 보여준 신뢰와 환대 덕분이었을 것이다.(148)

 

8. 여행지에서 우리는 '노바디'가 될 수 있으므로

 

젊은 날의 나는 특벼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지만, 나의 인종이나 국적에 따라 '특별하게' 분류되고, 일단 분류된 이후에는 사실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경험은 그전까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180)

 

그러니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는 키클롭스 이후의 오디세우스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노바디로 움직이는 것이다.(185)

 

9. 여행은 소설과도 같이 실험실적 상황 속에 의식적으로 들어갔다 돌아올 수 있으므로

 

여행 역시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움직이지만 이주나 피난과는 다르다. 여행은 자기 결정으로 한다. 자기 결정은 통제력과 관련이 있다. 이주자는 일상을 살아가는 반면 여행자는 정제된 환상을 경험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199)

 

그런데 이렇게 책을 요점정리하고 보니 작가에게 좀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이런 조악한 요점정리로 환원시키는 일은 부당하다는 생각도. 그러기에 이 책은 너무 재미있고, 요약으로는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이 사실은 이 책의 핵심이요, 진짜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이란 이 책을 읽고 나면 혼자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게 되는 마음이 그것이다. 요약된 글을 읽어본들 그런 느낌을 얻을 수 없다. 이 요점정리는 책을 읽고도 당장 여행을 떠나지 못해 안달이 난 나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한 복기일 뿐, 작가에게는 누가 되고,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해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