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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제2회 웹진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태용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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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용 [머리 없이 허리 없이]

 

문체가 멋지다. 김훈처럼 짧게 끊어지는 건조한 대사를 쓰는데, 김훈의 '이순신'이 한껏 무게잡고 멋있는 척해서 거리가 느껴지고 불편한다면, 이 소설 속 남루한 '아버지'의 독백은 이런 상황이라면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겠다 싶어 더 가까워지고 쉽게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듣고 있느냐. 듣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믿어야지 어떡하겠느냐. 달리 도리가 없지 않느냐. 내가 언젠가 너에게 이런 말투를 썼느냐. 모르겠다. 너도 모르겠다고 말하지는 마라.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느냐. 너의 생각이 궁금한 것은 아니다. 오로지 나의 생각이 궁금할 뿐이다. 너도 나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느냐. 생각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 내가 여전히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 놀랍지 않느냐. 대답하지 마라. 어짜피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대신 대답해주랴. 좀더 간절히 원해봐라. 원하면 완망하게 되어 있다.(27)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가 어릴 적 실종되었다가 미국으로 입양되어 스미스가 된 아들 앞에서 속으로 하는 독백이다. 이보다 더 적확한 문체가 있을.! 몇 십년 만에 만난 낯선 아들에게 (과거의) 숟가락과 (현재의) 오줌통을 들먹이며 자신의 일대기를 속으로 읊는다. 속으로만 떠들 수 있을 뿐이다. 소설의 스토리를 모르고 첫 장부터 이런 말들이 쏟아지니 처음엔 읽기가 힘들엇는데, 끝까지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어보면 한 문장 한 문장 헛 말이 하나도 없다. 다 이해된다. 멋진 소설이다.

 

 

김미월 [질문들]

 

나는 끊임없이 질문을 받는다. 오빠는 원룸 보증금을 빌려줄 수 있는지 질문 하고, 집주인은 보증금은 줄테니 월세를 올려서 사는 건 어떤지 질문 한다.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관심사를 질문 한다. 또한 화자는 생계를 위해 스스로도 남들에게 질문을 해야한다. 앙케트 조사 요원.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나는 수많은 질문들을 상대해왔다. 요즘 청소년의 독서 경향에 대해, 우리나라 커피전문점의 커피 가격에 대해, 분리수거의 실효성에 대해, 성범죄자의 적절한 처벌 방안에 대해, ... 그것들은 항목도 다양했고 목적도 다양했고 대상도 다양했다. 다양하지 않은 것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지급되는 건당 수당뿐이었다.(180)

 

그런데 내가 하는 질문에 사람들은 답례품으로 지급되는 수건 하나 얻을 노력만 기울이며 건성으로 대답한다. 게다가 그 대답은 나나 그들에게나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나에게 쏟아지는 질문은 나를 목숨 내놓고 고민하게 만들지만, 사실 그 질문에 나는 선택권이 없다. 그것은 질문을 가장한 '명령'이니까. 그렇게 소설가 지망생 아르바이트생인 나와, 보경과 맞은 편 팻말 아르바이트생은 질문에 갇쳐 허우적대며 살고 있다.

 

순간 뜬금없이 나는 지금 쓰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을 살리기로 결심하면서 갑자기 사기가 충천해졌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무엇이든 묻고 싶었다. 다만 묻고 싶기는 하되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알 수가 없다는 것, 그것이 문제였다.(185)

 

그러나 질문할 주인공을 스스로 창조하고,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질문일지라도 누군가 그것을  쓸모 있게 만들어줄 답을 찾기 위해 애쓴다면'(171)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나는 행복할 것이다. 

 

 

황정은 [뼈도둑]

 

황정은 소설은 허투루 읽을 수가 없다. 왜 갑자기 외딴 곳에 들어가서 방에서 벽지를 뜯어내고 장작불을 피우고 살지? 왜 하필 옆집엔 개가 짖지? 왜 개수대에 개수구멍이 없지? 분명 생경한 소재 하나하나에 상징을 담아 치밀하게 짜놓았을 텐데, 나에게는 생뚱맞은 장면들이고 그 의미는 해독이 안된다. '그'가 동성 연인을 사고로 잃고 혼자 틀어박혀 죽지 못해 살다가, 연인의 유골함을 훔치러 떠난다, 떠난 길에 죽는다는 내용인데, 술술 읽히기는 한데 한 번 읽어서는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지 파악이 안 되고, 그렇다고 바로 다시 읽기는 소설이 무거워서 '다음에 다시 읽어봐야지' 미루게 된다.  

 

그렇게 궁금하세요 그렇습니다 이 새끼가 나한테 넣고 내가 이 새끼에게 넣습니다 안심하세요 내게도 취향이라는 게 있어 나는 당신들에겐 조금도 넣고 싶지 않습니다(208)

 

 

김이설 [부고]

 

인물들이 모두 원형적이고 사건들은 극단적이다. 심지어 작가가 소설에 개입해서 주인공의 심정을 설명한다. 수준 미달인 것 같은데, 의도적인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뒷맛은 나쁘지 않다. 한 편의 그리스 비극 같다는 '선정의 말'이 실감난다. 소설의 완성도를 왈가왈부하는 게 독자의 윤리는 아닐 것이다. 소설 속 인물에 최대한 몰입해서 감정이입해보는 것. 그거면 된다. 소설 속 아버지가 생생하다. 

 

평생 교육자로 살았다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그건 자기 논리일 뿐이었다.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이혼과 재혼을 철저히 숨긴 걸 투철한 자기관리라고 내세웠다. 자기의 외도로 집을 나간 사람의 죽음 앞에서, 저렇게 서슬 퍼런 영정 앞에서 밥술을 뜨는 사람이었다. 불운을 겪은 딸을 위해 이사하고, 국적을 바꾸겠다는 아들을 막지 못한 것도 자신이 아량을 베풀었기 때문이라고 믿는 장본인이었다.(239)

 

논문을 쓰다 보면 그것이 내 논문 같고, 내가 석사 박사가 된 것 같았다. 학원으로 출근하다보면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 같았다. 상준과 누워 있으면 상준의 아내 같고, 여자를 엄마라고 부른 뒤로는 여자의 친자식 같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 같았다.(241)

 

 

손보미 [육인용 식탁]

 

완전히,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같다. 멋지다. 친구 부부 두 쌍을 초대해 육인용 식탁에 둘러 앉은 자리에서 내내 불편해하던 나의 아내는 돌연 일어나 나와 친구의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폭로하고, 친구의 아내도 울면서 그건 실수였다고 인정한다. 나는 혼란에 빠지고, 흥분해서 그동안 쌓아두었던 아내와 장인에 대한 불만을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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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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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여동생 집에 놀러 갔다가 빌려 본 책이다.

 

화제가 된 TED 강연을 책으로 냈다는데, 동영상을 직접 찾아 보진 않았지만, 활자로 읽는 감동은 기대만 못했다. 그래도 일독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남자들의 적대적인 오해에 대해 쉽고 선명한 사례와 명쾌한 논리로 잘 설명해준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남자아이들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하도록 가르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습니다. 하지만 거꾸로는 하지 않습니다.(27)

 

그런데, 우리가 남자들에게 저지르는 몹쓸 짓 중에서도 가장 몹쓸 짓은, 남자는 모름지기 강인해야 한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의 자아를 아주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스스로 더 강해져야 한다고 느낄 수록 사실 그 자아는 더 취약해집니다. 또한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도 대단히 몹쓸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아이들에게는 남자의 그 취약한 자아에 요령껏 맞춰주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자신을 움츠리라고, 자신을 위축시키라고 가르칩니다.(31)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그랬어"라는 말은 남자든 여자든 공히 자주 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그 말을 할 때는 보통 어차피 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포기한 경우입니다. ... "아, 우리 마누라가 매일 밤 클럽에 가는 건 안 된다고 하잖아. 그래서 이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주말에만 가기로 했어." 반면에 여자들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말할 때는 보통 직장이나 경력이나 꿈을 포기한 경우입니다.(35)

 

오늘날 젠더의 문제는 우리가 각자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도록 돕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어야만 하는지를 규정한다는 점입니다. 상상해보세요. 만일 우리가 젠더에 따른 기대의 무게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해질까요? 각자의 진정한 자아로 산다면, 얼마나 더 자유로울까요?(37)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쓰죠? 그냥 인권옹호자 같은 말로 표현하면 안되나요?" 왜 안 되느냐 하면, 그것은 솔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페미니즘은 전체적인 인권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쓰는 것은 젠더에 얽힌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를 부정하는 꼴입니다. 지난 수백년 동안 여성들이 배제되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는 꼴입니다. ... 이 문제가 그냥 인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콕 집어서 여성에 관한 문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꼴입니다.(44)

 

또 어떤 남자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좋아요, 이건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나는 젠더를 의식조차 하지 않는다고요." 어쩌면 정말 의식하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문제의 일부입니다. ... 그리고 많은 남자들이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점 말입니다.(45)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봐요, 가난한 남자들도 어렵게 살아간다고요." 그건 실제로 그렇습니다. ... 가난한 남자들은 부자의 특권은 누리지 못할지라도 남자의 특권은 여전히 누립니다. ... "당신은 왜 자신을 여성으로만 봅니까? 왜 그냥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까?" ... 왜 당신은 그냥 남자나 그냥 인간으로서의 경험을 말하지 않나요? 왜 하필 흑인 남성으로서의 경험을 말하나요?(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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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초원학교 - 탄자니아의 사람.문화.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들
구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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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누가 빌려보고 책카트에 놓아둔 걸 우연히 발견하고 재미있을 것 같아 빌렸다. 재미는 있다. (결코 이 책을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닌데) 화장실에서 술술 읽기 아주 좋다.

 

우리 가족도 아이들이 좀 더 크면 방학 때 한 나라, 한 도시를 정해서 여행 말고, 한 달 간 현지인들 속에서 장 보고 밥해 먹으며 그야말로 '살다'가 오고 싶다는 로망이 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보다 어린 아이들 둘을 데리고, 한 달도 아닌 6개월을, 다른 곳도 아니고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살다 온 이야기라니,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아프리카에는 가지 않겠다는 것.  가장 큰 이유는 거기서 '백인 무중구(외국인)'로 사는 것이 아이들에게 결코 좋을 게 없다는 생각. 거기 사람들은 우리같은 황인족도 '돈 많은 백인'이라고 생각한단다. 현지인과 어울려 사는 게 아니라, 현지인 위에서 살아야한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가정부로 고용해주길 바란다. 대등하게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 우리 아이가 인종적 특권의식을 은연중에 내면화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단지 한 달이라도. 책의 저자도 그런 고민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아프리카까지 가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냥 여행만 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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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과 반전의 순간 Vol.1 -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 전복과 반전의 순간 1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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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한 사람이 쓴 책이라면 그 책의 주제가 무엇이든 명쾌하고 재미가 있어서, 나도 덩달아 똑똑해지고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다. (이 책 이전에 비슷한 느낌을 받은 작가는 '남경태'다. 종횡무진 역사 시리즈!) 책의 주제에 대해 완전히 통달한 상태에서 자신만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맥락을 잡아 이야기를 끌고 간다. 손바닥 위에 놓고 맘대로 주무르는 느낌.

 

책 내용은 생략. 엄청나게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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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프로젝트 - 남자들만 모르는 성폭력과 새로운 페미니즘 푸른지식 그래픽로직 5
토마 마티외 지음, 맹슬기 옮김, 권김현영 외 / 푸른지식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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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여동생이 지나가듯 말해준 성폭력 경험에 충격을 받은 오빠가 주변 친구들의 비슷한 경험들을 모아 팩트만 가지고 썼다는 만화책이다. 지난 주에 여동생 집에 놀러 갔다가 아내가 이 책을 빌렸고, 나도 아내의 추천으로 덩달아 읽었다. 프랑스나 한국이나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비일비재한 '남성에 의한 성폭력' 경험담이, 곱씹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어 다시 남성에게 전달되는데 이렇게 많은 단계를 거치게 된다는 게 시사적이다. 남성들이 이 책에 도달하는 게 쉽지 않다는 말이다.

 

프랑스 여성-그 여성의 오빠-책-한국 여성의 번역-내 여동생-내 아내-남성인 나

 

본문에서 모든 남자가 악어로 표현되었다는 점이 프랑스에서도 논란이 되었나 보다. 그 얘기는 저자의 서문에도 나오고 번역자의 후기에도 나온다. 왜 남성 독자들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하고는 억울해 하냐고. 피해를 당한 여성 입장에서는 모든 남성이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보일 수밖에 없을텐데 말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내내 아슬아슬 했다. 나 역시 저 '악어'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성폭력 가해자가 되고 안 되고는 정말 한 끝 차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가해자가 될 수 있다, 평소 성인지감수성을 예리하게 벼려 놓지 않으면 무심코 던진 말이나 행동이 여성에게는 비수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내 입장은 반박이 가능하다. '성폭력의 원인을 남성의 타고난 본성 탓으로 떠넘기는 것이냐. 모든 남성이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란 말이냐. 등등' 모든 남성이 내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나는 그렇다. 나는 나 자신을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인식하고 내내 조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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