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은 투쟁 이야기거나 사랑 이야기이다. 혹은 투쟁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혁명 뒤의 이야기, 이른바 후일담. 더 이상 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쓰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종결되었다. 혁명은 '사건'으로서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진리'가 되지 못했다. 그러한가? 황석영은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가? 혁명은 현실에 조그마한 흔적만 남긴 채 끝나버렸고 그때의 치열했던 외침들과 그것을 억눌렀던 총소리들은 지금 돌이켜보건데, 실제보다 너무 요란했다는 멋쩍음을 남겼다. 사소한 일 때문에 다퉜던 연인들이 지나간 일들을 돌이켜보며 서로의 잘잘못을 하나하나 주워섬길 때 느끼는 낯뜨거움을 혁명 뒤의 멋쩍음에 비유한다면 아마도 나는 생각없는 젊은놈으로 낙인 찍힐 게다. 혁명과 사랑이 어떻게 비교대상이 될 수 있겠나? 투쟁과 연대는 그러나 동일한 목적을 위한 다른 방법이 아니었던가. 허니 어쩌겠는가? 나는 혁명을 모르고, 그들은 내 사랑을 모른다.

많은 블로거들은 이 소설을 말할 때 이렇게 시작하곤 한다. '나는 운동권이 싫다... 나는 혁명을 모른다...' 80년대에 태어난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다. 단어만 몇 개 바뀌었을 뿐, 똑같은 의미의 문장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에 태어난 독자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라는 것을 황석영이 몰랐을까? 황석영은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은결이의 존재 때문이다. 그는(작가) 자신들의 혁명을 80년대생 아이들에게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만나지 못한다. 오현우는 마지막까지, 여전히 과거의 한윤희에게서, 그리고 감옥의 감각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그는 은결을 만나지 못한다. 그는 환상 속에서 은결을 만날 뿐이다. 그들은 화해할 수 없다.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뭐랄까, 서로...... 타이밍이 안 맞았어요.
(...중략...)
왜 그랬을까......?
서로 섭섭하게 생각하구 있는 거예요. 그러다가 미안해져서 지나치게 잘 해주려고 하고, 둘 다 알아채고, 그 반복이에요.(하권, 314면)

그들과 우리 80년대생은 타이밍이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서로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의 혁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그래서 더 잘 해주려하지만 결국 서로의 차이만을 확인하게 된다. 차이에 대한 확인이 반복되다보면 우리는 포기하거나 체념하게 된다. 작가의 후기는 이것을 재확인시켜주며, 쓸쓸한 마음으로 책을 덮게 만든다.

새로운 세기에 지난 세기의 암울한 고통과 상실과 좌절을 되새기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질문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언제나 다시 출발할 것이다.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나의 벗들에게도, 오늘 우리 같이 가자고 오랜만의 인사를 전하면서.(후기, 318~319면)

작가는 자기들의 벗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오현우가 수많은 인파 속에서 윤희의 환영을 보듯, 수많은 독자들 속에서 작가는 자신이 사랑했던 그때 그 사람들을 찾아내 말을 건낸다. 뭔가 쓸쓸하다. 오래된 정원을 찾아낸 작가가 그 곳에 자신의 친구들을 초대한 뒤 입구를 패쇄한 것 같은 느낌. 초대장이 없는 나는 사라진 정원에 대해, 그것의 아름다움에 대해 부러움을 느끼지만 그것은 나의 정원은 아니며, 혁명은 결코 나의 혁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마 작가도 그것을 어렴풋이 느꼈나 보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 나는 지금 이곳에서 시작할 뿐이다.

이 소설에 나쁜 놈은 없다. 원래 좋은 소설에 나쁜 놈은 없는 법이다. 다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나쁜 놈들은 추상화되어 있다. 그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분노는 마땅히 투사될 대상을 찾지 못하고 부서진다. 나쁜 놈들은 역사이고 구조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있지 않은 우리들은 항상 선하며 억울하고 쓸쓸하다. 거대담론에 의해 삭제되었던 작은 주체들을 복원시키는 이러한 작업들은 이천년대 초반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들을 옹호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그러므로 착하고 올바르다. 소설이 존재하는 좌표는 항상 이러하다. 지나고 난 것들에 대해, 패배한 것들에 대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에 대해, 소설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경험 많고 지혜로울 것 같은 노소설가에게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작과 비평 147호 - 2010.봄
창작과비평 편집부 엮음 / 창비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여름호가 나왔지만 아직 내 몸과 마음은 여름을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된 관계로, 봄의 끄트머리를 낚아채 세 편의 단편소설들을 정리함으로써, 무심하게 지나가는 시간의 뒤통수에, 그리고 지지부진한 내 일상의 옆구리에, 아무도 새겨 듣지 않을 소심한 야유와 찬사를 새기고자 한다.


1.김유진의 <희미한 빛>-실업자, 히키코모리, 히피, 혼혈아, 잉여로운 삶

옛 남자친구와 동거하는 여자, 옛 여자친구와 함께 사는 집에 현재 여자친구를 데려와 사진을 찍는 남자, 옛 여자친구와 함께 사는 남자친구의 집에 아무렇지 않게 드나드는 여자, 태어난 나라와 자란 나라 어느 쪽에서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남자. 이들의 비정상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혹은 이들을 비정상으로 인식하는 나의 정서는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가? 편의상 이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어야겠다. 실업자, 히키코모리, 히피, 혼혈아가 그들의 이름이다.
실업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경제적 무능력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것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 실업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지리멸렬함'이다. 그녀는 알고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그녀는 히키코모리의 버릇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히피에 대해서도 잘 알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뿐만 아니라 혼혈아가 모국에 있을 때 함께 지낸 사람도 그녀가 유일하며 따라서 그에 대해, 그의 경직성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누구도 이해하고 있지 않다.

"B를 어디까지 이해하고 용인해야 할지 감당할 수 없었다."(202면)
"B는 아령을 과장된 몸짓으로 들어 보이며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억울한 일을 겪으면 참을 수가 없어. 그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204면)
"남부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라는 소개를 거친 중년의 여성은, 삭힌생선 요리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하나하나가 다 다른 맛을 지닌 음식이며, 그 맛으로 그것을 담근 사람과 그 집안의 내력을 이해할 수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나는 이해라는 말이 참으로 재미있는 말이라는 생각을 문득 했다. 우리는 생선의 숙성과정을 보며 맥주를 들이켰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빼드는 L을 위해 창문을 조금 열었다. 죽은 화분을 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207면)

위에 인용한 문장들은 그녀의 이러한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 준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어떠한 의지도 개입되지 않은, 말 그대로 상태에 가깝다. 그녀의 수동성이 그녀를 장악하고 있다. 그녀는 발화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그녀는 대립하거나 갈등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행동 역시 의식적인 노력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반응일 뿐이다. 이 지리멸렬, 지지부진함, 무기력이 바로 이 작품의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잉여, 남은 것, 구조의 바깥, 따라서 어떠한 변화도 초래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 역시 결코 변화시킬 수 없는 존재. 
다시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나는 왜 이들을 비정상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나는 여전히 나 스스로를 구조 속에 속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현실은 그렇지도 않은데. 사실 나는 실업자면서, 가끔은 히키코모리이기도 하고, 가끔은 히피를 꿈꾸기도 하지만, 순결한 혈통을 갖지 못해 언제나 스스로를 검열하는 혼혈아가 아니었던가? 잉여에 가까운 존재이면서 여전히 잉여를 향해 야유를 보내는 이 상태. 차라리 그냥 지리멸렬한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지지부진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는 작품 전체의 색조를 결정하고 있는 '희미한 빛'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경박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희미한 빛'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 질문이 잘못된 질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작가는 수목원의 '희미한 빛'에서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인가? 이 질문은 괜찮은 것 같다. 확실히 작가는 무언가를 보았다. 마지막 문장 "공작의 생태에 관한 안내문과 경고문구가 적힌 표지판을 단 원형철조망, 그 주변을 에워싼 개화한 모감주나무, 나뭇잎과 닮은 모양새의 비늘구름 사이로 이제 막 들이치기 시작한 희미한 빛을, 나는 바라보았다."(208면)에서 "나는 바라보았다" 앞에 있는 저 쉼표 때문이다.
비슷한 문장이 하나 더 있다. "건조하고 시원한 바람, 푸른 활엽수들, 잎 사이로 산산이 부서지며 쏟아지는 햇빛 냄새와 뒤섞인 나무줄기의 풋내를, 나는 무감하게 받아들였다."(202면) 그녀는 수동적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진 것 같다. 그러나 그녀-여기에서 그녀는 작가를 의미한다-는 볼 수 있고 구분할 수 있다. 원형철조망, 개화한 모감주나무, 나뭇잎과 닮은 모양새의 비늘 구름, 그리고 그 사이로 '막' 들이치기 시작한 '희미한 빛'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잎 사이로 산산이 부서지며 쏟아지는 햇빛 냄새와 뒤섞인 나무줄기의 풋내'를 그녀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쉼표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볼 수 있으며,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작품의 성취는 바로 이것,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까지는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 이 작품이 말하고 있다고 해석한다면 너무 멀리 간 것일까.


2.박민규 <루디>-하드보일드한 알레고리

표면적으로 이 작품은 미국소설의 전통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드보일드 소설을 연상케 하는 과한 폭력성과 액션의 전면화, 부적절한 유머의 공존이 그것을 연상케 한다. 주인공이 미국인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관계, 고용주의 직업이 금융회사 부사장이라는 점 등이 겹쳐지면서, 결국 조선의 정통 단편소설이 갖는 미덕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신자유주의 시대 대한민국(혹은 더 보편적인 세계)의 자화상을 알레고리화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 지 난감하다. 박민규 특유의 말장난과 하드보일드 스타일에 초점을 맞춰야 할 지,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와, 그 구조를 드러내는 인물들의 대사에 집중해야 할 지. 만약 후자로 보자면, 이 작품의 한계는 명백하다. 언데드로 표상되는 노동기계,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지루한 알레스카의 풍경들처럼, 피와 살이 튀지만 절대 끝이 날 리 없는 지루하고 비참한 인생에 대한 비판은 전망의 부재로 인해 무력할 뿐만 아니라, 비판의 입각점이 날카롭지 못해(도대체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비판이 가능하겠는가) 제대로된 비판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 작품에서 그나마 작가가 신경쓴 부분이라면, 주인공이 일상의 습관 혹은 감각을 하나하나 잃어가는 지점일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 상태 그대로 계속 달려야 하기 때문에 절망감만을 증폭시킨다. "쉽게 끝낼 '일'을... 왜 질질 끌고 지랄이었어? 내가 물었다./ 끝이... 안 나니까, 하고 놈이 말했다./ 또 우린// 러닝메이트니까... 라고도 놈은 말했다"(236면) 이 상태, 이 상태 그대로가 하나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죽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살아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이 작품의 메세지인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현실 혹은 일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정도로 독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문제의 중심을 건드릴 수 있을까?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남은 것은 재미 뿐이다. 박민규 소설의 문장들은 '재밌게' 읽힐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 대부분의 '재미'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를 통해 발생한다. 살인자와 인질의 부적절한 대사, 수다스러움,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 등이 순간순간 웃음을 일으킨다. 그러나 웃겨서 눈물을 찔끔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다. 


3.구병모 <학문의 힘>-본능으로서의 '학문하는 힘'과 분노의 방향

원래 이 작품은 씁쓸하게 웃겨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학문의 힘'에 대한 조소가 빚어내는 효과여야 하는데,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불쾌함과 불쾌함과 불쾌함과 분노만이 남는다. 이 작품은 잘 쓴 작품이 아니다. 필요 없는 수사가 남발되고 있으며, 구태의연한 대사와 사건들이 산재해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이 소설가가 들려주는 시간강사의 삶, 학문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논평의 생생한 현장감 때문이다. 수요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학문하는 자들, 그들의 비정상은 단지 숫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태도에서 말미암는다. 그들은 학문을 계속하기 위해 교수가 되어야 한다. 교수 임용은 실력으로 정해져야 한다. 교수에게 실력이란 다름 아닌 '학문하는 능력'일 것이다. 그러면 '학문하는 능력'은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논문의 숫자, 논문의 질, 학벌, 성적? 이런 것들이 '학문하는 능력'을 드러내 주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단단하고 강력한 줄을 예민하게 구분하여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을 구비한다고 해도, 예컨대 주인공처럼 매번 교수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남편 동료들에게 예의바르고 선량한 모습을 보여주며, 직장탈출을 참아가며 남편 뒷바라지를 해도(남편 입장에서는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해도) 교수에 임용될 수 있는 적정 수준의 '학문하는 능력'에는 미달한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능력이라 노력한다고 쉽게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장탈출을 참아내는 힘이 본능적이듯, 학문하는 능력 역시 본능에 따라 결정되며, 결국 우열은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것이다. '학문의 힘'은 그래서 '항문의 힘'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뭔가 다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다른 것과 똑같을 때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분노하게 된다. '학문의 힘'은 '항문의 힘'과는 다를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가 배신 당했을 때, 우리의 분노 게이지는 붉은 색 바를 가득 채우게 되며, 필살기를 시전하여 그 분노의 파괴력을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의 불온한 상상력은 아마 그 필살기 시전의 전 단계가 아닌가 싶다. '학문하는 공간'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 할 때 발생하는 폭주들을 우리는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정말 힘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힘이 분노에서 비롯되어도 되는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의무감에 또 한 편의 리뷰를 작성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 의무감이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에 충실하기 위한 의무감인가. 물론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다른 번잡스러운 이유를 다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하나 뿐이다. 논문을 써야 한다는 것이 그 중심에 놓여 있다. 그 주변에 무엇이라도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다. 나는 무엇인가를 읽고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문은 쓰기 싫고, 쓰기 싫다기 보다는 용기가 없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까, 어쨌든 논문을 쓸 수 없으니까 다른 걸 읽고 쓰는 것이다. 그 다른 것 중에 오늘은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를 읽고 쓴다. 총 일곱 편의 작품이 있는데 내 마음대로 랭킹을 매겨 보면, 소풍-사육장 쪽으로-분실물-나머지 순이 되겠다. 그렇다면 제목을 기억하고 있는 세 편에 대한 개별적인 작품론을 쓰는 것으로 나머지 단락들을 구성해 보자.

1.소풍
남자와 여자가 있다. 남자는 아파트 짓는 일을 하느라 한 달 동안 하루도 쉬지 못했으며, 맥 빠진 비유를 자주 사용한다. 여자는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가르치며, 차 멀미를 심하게 한다. 처음 떠나는 여행이지만 고된 노동을 끝낸 밤 10시에, 자동차로 6시간이나 걸리는 여행이 안락할 리 만무하다. 게다가 가시거리 50미터의 안개 속이라면 운전이 쉬울 리 없다. 그래도 떠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모텔에 가서 하룻밤 보내는 게 이들에게는 훨씬 안락할 수 있겠지만, 이들은 구태여 그 먼 길을 떠난다. 남들처럼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데 우리도 흉내는 내야지 않겠는가. 이들은 피곤과 구역질을 참아가며,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서로 의지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들의 여행은 그래서 절박하다.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다.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와, 이들의 자동차를 뒤쫓는 탱크로리는 이들의 여행이 결코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과정에서 여자는 낯선 남자에게 호감을 보이고, 남자는 무엇인가를 죽이고 치운다. 그것 봐라. 이들은 결코 여행에 성공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이들은 타락했으며, 살인을 저질렀다! 한 달 동안 하루도 쉬지 못했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대필도 서슴지 않았지만, 그렇게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 많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여행이 주어질 수는 없다. 평생 이렇게 안개 속에 갇혀 타락하고, 누군가를 욕하고, 누군가를 죽이며 일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일상을 걷어치운다면, 모든 것을 가렸던 안개가 걷힌다면, 우리는 목적지에 닿을 수 있는 것일까. 남들처럼 버젓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모두다 이렇게 남들처럼 버젓이 살려고 이를 악물고 안개 속을 달리는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문제겠지.  

2.사육장 쪽으로
근대의 구조, 그것의 시선에 사로잡힌 근대인들은 파놉티콘에 갖힌 죄수들을 연상시킨다. 이 작품 속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근대의 우편제도를 통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집으로 배달된 종이쪼가리 한 장에 의해 존재 전체가 흔들린다. 이는 그녀의 문장을 통해 명확해진다. 예컨대, "그들은 날마다 비슷한 시각에 차를 타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그 시각에 나가지 않으면 대개 아홉시로 정해진 직장의 출근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가장들이 탄 차가 순서대로 신작로 너머로 사라졌다. 그중에는 그의 차와 차종은 물론 색깔까지 똑같은 차가 서너 대 끼어 있었다. 다른 때라면 그 역시 고속도로로 향하는 행렬에 섞였을 터였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각에 집을 나서기 위해서 같은 시각에 잠에서 깨어났고,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비슷한 시각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에게는 졸음이나 식욕, 성욕 따위도 시간을 지키며 찾아왔다." 근대의 시선에 완전히 노출된, 거의 무방비 상태로 구조화된 삶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 작품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소풍>에서도 봤듯이 이 구조화된 상태가 얼마나 견고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특히 수신자 입장에서 이것은 잔인한 폭력성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 꾸역꾸역 참았지만 한 순간 내동댕이 쳐졌던 <소풍>에서의 남녀처럼, 이 작품 속의 가정 역시 구조 속에 있다고 생각한 순간, 그 구조에서 배제된다. 원하지 않는 경고장을 받아야 하고, 원하지 않는 개들에게 물어 뜯겨야 하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자동차를 몰지만 병원은 어디에도 없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러한 상태, 즉 내부와 외부가 없어지는 상태가 구획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외부자로 만들 수 있는 잠재성의 영역, 즉 아감벤의 '호모사케르' 개념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잠재적으로 모든 인간들이 쫓겨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가정 역시 어딘가를 향해 차를 몰아가지만 결코 그곳에 도달할 수는 없다.

3.분실물
그는 자신의 승진을 보장해 줄, 그렇게 함으로써 가정의 평화를 보장해 줄 중요한 서류를 잃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그는 사람들의 얼굴을 잃어버린다. 그는 사람들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자, 말버릇이나 얼굴의 특징들을 통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유추해낸다. 안면인식장애자들이 사람을 구분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안면인식장애는 유전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것이라 갑자기 발병하거나 감염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는 안면인식장애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아마 심리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평온했을 하루가 하나의 사건으로-그것이 서류를 잃어버린 것이든, 아파트 외벽에 금이 가는 정도의 지진이든(그러나 이 정도의 지진도 기록적인 강진이라는 아이러니가 있는데)-끔찍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비극은 그저 사람 얼굴을 잘 구분 못할 뿐인 안면인식장애나 아파트 외벽에 금이 가는 정도의 지진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끔찍함을 도드라지게 한다. 아무도 느끼지 못한 지진이 기록적인 강진이었듯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숫자들의 배열에 불과한 서류가 자신의 일상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끔찍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부분이 마음에 걸린다."송과 박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필요 없는 서류였다. 송에게 사실을 말해봤자 소용없을지도 몰랐다. 송에게는 부하직원이 많았다. 그들은 언제라도 송의 지시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자 어쩐지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깟 일로 눈물을 흘리다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마 큰 소리로 울지 못하는 게 유감스러웠다.(200면)" 내가 아니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이것이 너무 억울해 정말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찌질해지는 내 모습이 한심스러워 표정을 추스르면서, 마음 놓고 울기에도 나이를 너무 많이 먹은 자신이 참 유감스러워지는 것이다. 이 와중에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두통이란! 그는 아마 두통약을 먹으면서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세 편의 작품을 정리해보니, 딱 편혜영스러운 작품들만 골랐다는 생각이 든다. 끔찍하다면 끔찍한 작품들인데, 뭐랄까, 이 끔찍함이 낯설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한 편의 논문을 소설로 바꿔놓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비평가들이 다루기에 딱 좋은 주제들로 가득한 소설이라고나 할까? 이 글을 쓰는 과정이 즐겁지 않았다는 것을 나를 위해 기록해 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귀뚜라미가 온다
백가흠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백가흠의 <<귀뚜라미가 온다>>를 읽었다. 단상들이 몇 가지 스쳐간다. 손톱 깎는 버릇이 바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제자리에서 손톱을 깎지 않는다. 차분하게 앉아, 신문지를 깔고, 손톱 모양을 동그랗고 예쁘게 깎던 버릇은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는 것이다. 나는 길을 걸으며 손톱을 깎는다. 신호등 앞에 서서, 셔틀 버스를 기다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손톱을 깎는 것이다.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버릇이다. 처음에는 시간을 아껴보자는 의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 내 생활 자체가 길거리 인생으로 바뀐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더 이상 어딘가에 정주하거나 안주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무슨 행동이나 말을 하든지 조심스럽고 여러 생각을 거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되는대로, 거침이 없다. 특히 나 자신을 대하는 행동에서 무례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그야말로 길거리 인생이 된 것이다. 단순히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어디서부턴가 이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얇은 벽을 사이에 둔 하나의 생활공간이 있다. <귀뚜라미가 온다>의 두 남자, 전어철이 되어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무인도에서, 얇은 벽을 두고 한 명의 여자에 의지해 살아가는 데깔코마니 인생. 그 공간 안에서 그들에게는 어떠한 가능성도 없으며, 매일 애널섹스를 하고, 술을 마시며, 노모를 때리는 것으로 하루를 소여한다. 물론 소설에서는 계속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소설은 리얼이 아니니까. 소설 속에는 항상 외부의 무언가가 침투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소설을 소설이게 한다. 이것을 국어 교과서에서는 '사건'이라 가르친다. 이 소설에도 사건이 있다. 그것은 '귀뚜라미'이다. '귀뚜라미'가 무인도에 들어오는 순간 내부의 단단한 구조는 일순간 허물어진다. 빛에 노출된 먼지들처럼, 혹은 사시미칼에 회쳐진 전어처럼.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는 전어를 구하려다 물고기밥이 되어 바다로 밀려간다. 모든 것이 드러난다. 현실에 '사건'이 개입하는 순간 모든 것은 낯설게 되거나, 본질적인 모습을 되찾게 된다. 모텔로 도망간 남자들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미련 때문에 소금기둥이 된 아내를 바라보는 롯의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본다. 심판이 임한 것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임하는 심판은 어떠한 목적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피심판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부조리할 뿐이다. 남은 것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 받은 자와 심판 받지 않은 자의 구획 뿐이다. 남자는 살아남고 여자는 죽는다. 가해자는 살아남고 피해자는 죽는다. 외부에서 임하는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그 반대여도 상관없겠지만, 이 소설의 문법 상 그 반대는 있을 수 없다. 남자들은 살아야 하고 여자들은 죽어야 한다. 아닌 것 같았던 남자와 여자의 구획,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획이 명확해지면서 두 남자의 데깔코마니는 완성된다. 합리성과 잉여의 삶은 계속되며, 인간과 생에 대한 쓸데없는 집착은 심판받는다. 외부에서 임하는 것들은 질문을 받지 않는다. 그냥 주어진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백가흠의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남자와 여자의 성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따라서 해설자처럼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읽는 것이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의 정답에 가까울 것이며, 그것을 근대문명 일반으로 확장하여 결론을 맺으면 더 없이 좋은 작가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그것을 수긍하면서도 미심쩍은 느낌을 버리기 힘든 것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 때문이다. 이 작품집의 비판적 요소들은 해설자의 말처럼 유아적이면서 폭력적인 남성성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남성의 유아적 폭력성에 노출된 여성인물들이 남성인물들에 의해 심미화된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 부분을 해설자는 작품의 비판적 입각점으로 보고 있는 듯 한데, 나에게는 그냥 포즈로만 보인다. 예컨대, 나에게 백가흠이라는 작가의 포즈는 이런 것이다. '봐봐, 남자들은 대체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 얼마나 심한 지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야. 하지만 나는 그걸 말로 표현하고 있지. 이걸 쓰고 있는 내가 얼마나 괴로운 지 당신들은 모를 걸.' 그러나 독하게 쓴다고 해서 포즈가 가려지지는 않는 듯 하다. 포즈 다음에는 무엇이 와야 할까. 이것이 이 작가가 다음에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서두에서 자기반성 비슷한 걸 했던 것 같다. 익숙해지는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이 익숙함 속에서 어떠한 것이든 합리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선험적인 지표도 없어진 시대에서는 포즈만으로도 충분히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포즈마저 익숙해지면, 그 때는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생각할수록 막막하다. 뜬금없이 바다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물고기들처럼 온몸으로 살아 움직이고 싶은가 보다. 오로지 살아 움직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상태가 그리운가 보다. 우리는 대체로 말이 너무 많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기억에 남는 것은 쓰레기 더미와 시궁창 냄새, 피범벅 등의 이미지다. 활극을 연상시키는 사건들이 긴박하게 이어지면서 흥미를 잃지 않게 하되, 다양한 공간 모티프를 활용하여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 '예외상태', '생명정치' 등의 개념을 끊임없이 건드렸다. 그러나 이러한 포장들을 다 제거하면 무엇이 남는 걸까? 국경을 넘어, 법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나 예외상태에 놓이고, 생명정치의 시대에 벌거벗은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재의 인간군상을 극단화한 그것을 제거한다면, 이 소설에서 남는 것은 결국 '소통의 부재' 혹은 '소통의 불가능성'이다. 아내와 나는 소통할 수 없었으며, 다른 사람을 찾아 이혼했지만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여있다. 이천년대 이후 한국현대소설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이 주제는 아무리 거창한 포장을 하고 있어도 그 자체의 본질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은 소통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 사건을 현대의 사회정치적인 맥락의 문제틀로 전환시킨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현대의 사회정치적 한계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정말 모든 문제들이 이 사회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물론 작가는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포장을 해댔지만 결국 모든 것이 쥐 한 마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복잡한 사회정치적 문제들도 쥐한마리로 표상되는 '우연'이라는 것 보다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꺼운 서사들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진실로 진실로 작가의 말을 듣고 싶다. 쥐가 먼저인가, 아감벤이 먼저인가?
 


작가의 답변을 예상해보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그녀는 아마 대답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문제라고. 그것이 현실이라고. 한국 대통령의 별명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설치류 동물과 같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이 별명은 아주 악랄하다. 내가 이 별명을 갖고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아주 천박하게, 이 소설을 알레고리화하면, 현재 대통령이 문제가 많지만, 사실 그것은 어떤 우연적인 요소에 불과할 뿐이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대의 사회구조 자체가 그 설치류 동물과 유사하게 생긴 대통령을 만들어냈고, 항간에 그 설치류를 닮았다고 소문이 나 있는 대통령은 그 구조를 더 공고하게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다 나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부터가 어려운 것인데, 사실 쥐는 항상 있어 왔던 것이고, 이 구조는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근대라고 불리는 사회구조는 끽해봐야 2~300년 정도 밖에 안 되었다. 그에 비해 쥐는 인간보다 오래 살아왔으니 비교가 안 된다. 그럼에도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에 나오는 쥐가 보통 쥐가 아니라는 점이다. 평소의 쥐는 인간에게 위협적이지 않다. 그러나 전염병이 돌고, 쥐가 전염병을 옮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쥐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된다. 이때의 쥐는 평소 보이지 않는 벽을 오가며 여러가지 음식물을 갉아먹는 설치류 동물과는 구별된다. 전염병을 옮기고, 그것이 여러가지 매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소문이 되는 사회구조에서만 존재하는 동물인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쥐는 근대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종류의 쥐새끼다. 이러한 쥐새끼들의 수요는 셀 수 없는 것이어서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쥐는 단지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이 쥐는 마치 항상 존재하는 설치류 동물을 지칭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쥐이며, 현재의 사회구조와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존재이면서 그것의 모순이 도달하는 극점을 보여주는 동물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쥐새끼에 불과하며, 따라서 쥐새끼들 사이에 무언가 소통이 있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쥐새끼 불알 만지는 소리인 것인가, 라는 질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소설가는 아마 이 질문에 긍정할 것이며, 실제로 작품을 그렇게 끝맺고 있다. 쥐새끼를 잡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이유를 정당화하는 존재, 타인의 비윤리성-비도덕성-비인륜성 뭐, 하여튼 비-머시기들을 들추어냄으로써만 자신의 윤리적-도덕적-인륜적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존재가 우리들 아닌가. 설치류 별명을 가진 대통령을 욕하는 것으로 자신의 윤리적-도덕적-인륜적 성숙도의 우위를 맛보는 우리들도 결국 쥐새끼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이야기를 이렇게 끌고 가게 되면, 우리 모두는 똑같은 쥐새끼들이다, 라는 비관적 결말에 이를 수밖에 없다.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가 되고 마니까. 그것이 아니라 쥐가 진짜 우연을 표상한다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두꺼운 서사는 결국 구운몽이나 솔로몬의 잠언이 우리에게 준 교훈과 달라질 것이 없게 된다. '헛되고, 헛되고, 또 헛되도다.' 
 


두 개의 이야기를 하나로 붙이는 것은 별로다. 소설가는 조각가여야 하지 않을까. 하나의 돌덩이에서 하나의 형상만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