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의무감에 또 한 편의 리뷰를 작성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 의무감이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에 충실하기 위한 의무감인가. 물론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다른 번잡스러운 이유를 다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하나 뿐이다. 논문을 써야 한다는 것이 그 중심에 놓여 있다. 그 주변에 무엇이라도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다. 나는 무엇인가를 읽고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문은 쓰기 싫고, 쓰기 싫다기 보다는 용기가 없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까, 어쨌든 논문을 쓸 수 없으니까 다른 걸 읽고 쓰는 것이다. 그 다른 것 중에 오늘은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를 읽고 쓴다. 총 일곱 편의 작품이 있는데 내 마음대로 랭킹을 매겨 보면, 소풍-사육장 쪽으로-분실물-나머지 순이 되겠다. 그렇다면 제목을 기억하고 있는 세 편에 대한 개별적인 작품론을 쓰는 것으로 나머지 단락들을 구성해 보자.

1.소풍
남자와 여자가 있다. 남자는 아파트 짓는 일을 하느라 한 달 동안 하루도 쉬지 못했으며, 맥 빠진 비유를 자주 사용한다. 여자는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가르치며, 차 멀미를 심하게 한다. 처음 떠나는 여행이지만 고된 노동을 끝낸 밤 10시에, 자동차로 6시간이나 걸리는 여행이 안락할 리 만무하다. 게다가 가시거리 50미터의 안개 속이라면 운전이 쉬울 리 없다. 그래도 떠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모텔에 가서 하룻밤 보내는 게 이들에게는 훨씬 안락할 수 있겠지만, 이들은 구태여 그 먼 길을 떠난다. 남들처럼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데 우리도 흉내는 내야지 않겠는가. 이들은 피곤과 구역질을 참아가며,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서로 의지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들의 여행은 그래서 절박하다.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다.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와, 이들의 자동차를 뒤쫓는 탱크로리는 이들의 여행이 결코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과정에서 여자는 낯선 남자에게 호감을 보이고, 남자는 무엇인가를 죽이고 치운다. 그것 봐라. 이들은 결코 여행에 성공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이들은 타락했으며, 살인을 저질렀다! 한 달 동안 하루도 쉬지 못했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대필도 서슴지 않았지만, 그렇게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 많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여행이 주어질 수는 없다. 평생 이렇게 안개 속에 갇혀 타락하고, 누군가를 욕하고, 누군가를 죽이며 일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일상을 걷어치운다면, 모든 것을 가렸던 안개가 걷힌다면, 우리는 목적지에 닿을 수 있는 것일까. 남들처럼 버젓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모두다 이렇게 남들처럼 버젓이 살려고 이를 악물고 안개 속을 달리는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문제겠지.  

2.사육장 쪽으로
근대의 구조, 그것의 시선에 사로잡힌 근대인들은 파놉티콘에 갖힌 죄수들을 연상시킨다. 이 작품 속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근대의 우편제도를 통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집으로 배달된 종이쪼가리 한 장에 의해 존재 전체가 흔들린다. 이는 그녀의 문장을 통해 명확해진다. 예컨대, "그들은 날마다 비슷한 시각에 차를 타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그 시각에 나가지 않으면 대개 아홉시로 정해진 직장의 출근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가장들이 탄 차가 순서대로 신작로 너머로 사라졌다. 그중에는 그의 차와 차종은 물론 색깔까지 똑같은 차가 서너 대 끼어 있었다. 다른 때라면 그 역시 고속도로로 향하는 행렬에 섞였을 터였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각에 집을 나서기 위해서 같은 시각에 잠에서 깨어났고,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비슷한 시각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에게는 졸음이나 식욕, 성욕 따위도 시간을 지키며 찾아왔다." 근대의 시선에 완전히 노출된, 거의 무방비 상태로 구조화된 삶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 작품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소풍>에서도 봤듯이 이 구조화된 상태가 얼마나 견고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특히 수신자 입장에서 이것은 잔인한 폭력성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 꾸역꾸역 참았지만 한 순간 내동댕이 쳐졌던 <소풍>에서의 남녀처럼, 이 작품 속의 가정 역시 구조 속에 있다고 생각한 순간, 그 구조에서 배제된다. 원하지 않는 경고장을 받아야 하고, 원하지 않는 개들에게 물어 뜯겨야 하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자동차를 몰지만 병원은 어디에도 없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러한 상태, 즉 내부와 외부가 없어지는 상태가 구획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외부자로 만들 수 있는 잠재성의 영역, 즉 아감벤의 '호모사케르' 개념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잠재적으로 모든 인간들이 쫓겨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가정 역시 어딘가를 향해 차를 몰아가지만 결코 그곳에 도달할 수는 없다.

3.분실물
그는 자신의 승진을 보장해 줄, 그렇게 함으로써 가정의 평화를 보장해 줄 중요한 서류를 잃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그는 사람들의 얼굴을 잃어버린다. 그는 사람들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자, 말버릇이나 얼굴의 특징들을 통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유추해낸다. 안면인식장애자들이 사람을 구분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안면인식장애는 유전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것이라 갑자기 발병하거나 감염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는 안면인식장애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아마 심리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평온했을 하루가 하나의 사건으로-그것이 서류를 잃어버린 것이든, 아파트 외벽에 금이 가는 정도의 지진이든(그러나 이 정도의 지진도 기록적인 강진이라는 아이러니가 있는데)-끔찍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비극은 그저 사람 얼굴을 잘 구분 못할 뿐인 안면인식장애나 아파트 외벽에 금이 가는 정도의 지진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끔찍함을 도드라지게 한다. 아무도 느끼지 못한 지진이 기록적인 강진이었듯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숫자들의 배열에 불과한 서류가 자신의 일상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끔찍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부분이 마음에 걸린다."송과 박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필요 없는 서류였다. 송에게 사실을 말해봤자 소용없을지도 몰랐다. 송에게는 부하직원이 많았다. 그들은 언제라도 송의 지시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자 어쩐지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깟 일로 눈물을 흘리다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마 큰 소리로 울지 못하는 게 유감스러웠다.(200면)" 내가 아니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이것이 너무 억울해 정말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찌질해지는 내 모습이 한심스러워 표정을 추스르면서, 마음 놓고 울기에도 나이를 너무 많이 먹은 자신이 참 유감스러워지는 것이다. 이 와중에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두통이란! 그는 아마 두통약을 먹으면서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세 편의 작품을 정리해보니, 딱 편혜영스러운 작품들만 골랐다는 생각이 든다. 끔찍하다면 끔찍한 작품들인데, 뭐랄까, 이 끔찍함이 낯설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한 편의 논문을 소설로 바꿔놓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비평가들이 다루기에 딱 좋은 주제들로 가득한 소설이라고나 할까? 이 글을 쓰는 과정이 즐겁지 않았다는 것을 나를 위해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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