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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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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어도 우리는 먼 우주에 갈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 말고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우리의 문제를 결정한다,

그러니 우리에겐 주도권이 없다,라고 말하는 건

당연히 당연하지 않다.

사실은 우리가 현실을 구성하고 있으니까(소설의 현실 얘기다. 안나와 현실의 관계).


그러니,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라 말하는 건 징후다.

물론 징후가 아니라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이 명백함조차 징후다.

정확하게 옮기자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이라는 징후.

'조차'라는 말. 

사실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었으나

현실의 냉혹함 때문에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는가 여부와는 무관하게

문제가 발생해버렸다. 그걸 인식한 후에야 '조차'가 등장한다.

우리와 현실의 명백한 분리. 현실로부터 버림받은 우리의 운명.


이게 징후다. 


무엇의 징후냐 하면, 소설의 운명을 드러내는 징후다. 소설은 이렇게

우리와 현실을 구분짓는 용도로 오랫동안 활용되어 왔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는 뜻. 

'조차'라고 말하는 건, 우리에게 주도권이 없다는 걸 인정하는 자의

포즈인데, 이건 사실이라기보다는 (근대)소설의 관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우리에게 주도권이 없다 생각하기에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이라 말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가도 사실은 먼 우주에 못 가는 건데,

그래도 무언가 하고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 이 안도감이 사실상

'우리'와 '현실'을 분리하고, 우리에게 주도권이 없다고 믿는, 

근대소설의 오래된 통념을 통해 완성되는 느낌.

그러니까 근대소설의 관습을 반복하는 것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소설의 관습이 현실로, 그러니까 소설의 현실이 아니라 진짜

우리의 현실로 범람해들어오는 느낌. 되게 uncany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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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사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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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도 '이어달리기 소설'인데, 계속 이어달리다보면 이 달리기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 잊어버리게 된다. 올림픽 400미터 계주랑은 다르니까. 바톤을 넘겨준 뒤 제자리에 서서 숨을 몰아쉬는 육상 선수들은 다음 주자가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 달리기를 구경한다. '이어달리기 소설'의 선수들은 바톤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잠깐 손을 잡고 함께 뛴다. 잠깐, 함께 뒤는 거다. 다음 주자가 달리는 모습을 지켜보지만, 그가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윤성희는 오랫동안 이런 소설을 써왔고, 이 소설도 이런 소설이다. 이런 소설 쓰기를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한때 궁금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이런 소설을 오래 쓰는 것은 작가의 정신 건강과 건전한 정신문화 창달에 해롭다, 라고 생각했었다. 생각했었다?

 

"생각했었다."라고 손가락이 썼다. 손가락이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아직 다음에 쓸 말을 결정하지 못한 것 같네. 해로운가? 아닌가? 이 소설은 해로운가? 아닌가? 한국소설은 해로운가? 아닌가? 한국소설 중에서도 윤성희의 소설은 특히 해로운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다, 손가락이.

 

윤성희도 손가락으로 소설을 썼겠지. 손가락으로 이어달리기 소설을 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레이스를 지켜보며, 손가락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고와 죽음으로 연결된 이어달리기 소설을 쓰면서 손가락은 망설였을까? 손가락. 갑자기 왜 손가락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방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아니지. 직접적인 이유가 있고, 사후적으로 구성된 이유가 있다. 직접적인 이유는 아마도 바톤 터치 때문이었을 거다. 바톤은 손으로 주고 받는 거니까. 그리고 바톤에서 손을 잡고 뛴다는 생각을 연결시켰지. 그렇지만 더 직접적인 이유는 위에서 쓴 그대로, 내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손가락을 보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망설이고 있구나. 이 소설에 대해 판단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구나, 이런 걸 손가락을 보며 깨달았던 거다.

 

그런데 <작가의 말>을 '다시' 읽어보니, 왜 판단을 망설이게 되었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왜 손가락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알 것 같다. "작가는 어느 정도의 슬픔이 적절한지, 또 어느 정도의 희망이 적절한지 판단할 수 잇는 존재일까? 두 손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나는 물었다.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어서 나는 무서웠다."(310) 이게 사후적으로 구성된 이유였다.

 

손가락에게 묻다보면 무서워지기 마련이다. 손가락은 너무나 솔직하고 영특해서, 내가 감추려했던 것도 기가 막힌 방식으로 표현해내고야 만다. 이렇게 손가락을 나로부터 분리해내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야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윤성희도 알고, 나도 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한 건 손가락이 아니라 나인데, 용기라는 건 언제나 무모하고 뒷감당을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뒷감당은 용기가 아니라 내 몫인데, 뒷감당을 하다보면 나는 어느 새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좋은 쪽으로도, 안 좋은 쪽으로도.  

 

"아니에요. 어느날 프로야구 중계를 봤거든요. 유격수가 간단히 잡을 수 있는 공을 빠뜨리자 해설자가 그러더라고요. 저 선수는 어려운 걸 잘 잡고 쉬운 걸 못 잡아요." 양조장 주인에게 그 말이 오랫동안 맴돌았다. "그래서 내려왔어요. 쉬운 걸 잘 잡기 위해." 형민은 왠지 그 말이 슬펐다. 쉬운 걸 매번 놓치는 선수 때문에 슬펐다. 그래서 그날 밤 술을 꽤 마셨다. (279-280)

 

해설자들이 제일 나쁜 게, 쉬운 공을 못 잡는다고 자꾸 그러면 쉬운 공을 잡을 때 긴장을 하겠냐 안 하겠냐. 이 세상에 쉬운 공보다 어려운 공을 더 잘 잡는 유격수는 없다. 그런 건 이 세상에는 없다고. 물론 어려운 공만 잡으려는 사람들은 있는데, 나도 뭐 그런 부류라는 걸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다. 저 공만 잡고 다음부터는 쉬운 공을 잘 잡겠어, 라고 다짐하지만 어려운 공이 왜 이리 많은지 쉬운 공의 차례가 돌아오려면 한세월이다. 하지만 어려운 공을 잡는 것이 현실적이다, 라고 변명하지는 않겠다. 쉬운 공을 잡는 루틴이 필요하다는 걸 부정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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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손보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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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순은 진짜 웃겼다. 최근에 읽은 가장 웃긴 소설이었다.

 

고양이의 보은도 꽤 웃겼는데, 그래도 몬순이 가장 웃겼다. 작가의 유머가 일취월장했다.

 

작가의 말도 꽤 웃겼는데, '웃겼다'라는 말을 반복하다보니, 이 단어가 낯설어진다. '웃겼다'는 건 말 그대로 '웃겼다'는 뜻이다. 다른, 이중의, 반어적인, 그런 뜻이 아니다. 마지막 문장을 옮겨보자.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이 책에 씌어진 문장들을 통해 자신들의 시간과 공간을-아주 잠시라도-마주하게 되기를 지금의 나는 온 마음을 다해 바라고 있다."

 

마주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사실 나는 며칠 전부터 '마주치다'라는 단어를 머리속에서 굴리고 있는 참이다. 마주치다, 서로 닿았다가 지나가는 것. 그 한 점의 시공간을 생각하는 건 기적과도 같은 것이어서, 마주침을 생각하는 건 언제나 지나치다. 지나치다는 생각을 한다. 너무 지나쳐. 그건 너무 지나친 행동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무 지나쳐. 기억할 만한 지나침이란 지나침이며, 지나침이다. 그 지나침을 기억하는 건 지나친 일이지. 그건 그냥 지나침이니까, 기억하는 건 지나친 일이지. 그렇지만 우리는 그 지나침을 기억하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해석하고 그렇게 지나치게 마주하다보면 결국 지나쳐버리고 마는 거지. 그러니까 마주하는 건 언제나 지나치는 걸 전제로 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마주침이다. 다른 방향과 속도를 가진 두 개의 선이 부딪히는 점으로서의 마주침이다.

 

어쨌든 집이 있는 고양이들에게 세금을 매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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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1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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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다른 문장. 시작도 끝도 없고, 인과도 끼어들지 않는 문장들의 평등한 나열, 을 꿈꾸는 건 내가 지겹기 때문. 즐겁지 않은 문장의 연쇄를 그만두고 싶은 사람들, 이 있다. 동화같은 이야기들을 잔혹하게 그만두는 것. 산문을 배격하자. 비유를 파산시키자. 쓴 걸 다시 쓰지 말고 다시 쓴 걸, 그냥 지워버려.야 한다면 왜 쓰지 말까. 정말로 정말이다. 엉망진창이네. 고양이들은 잘 지내겠지. 집을 가진 고양이들에게 세금을 물려야 한다.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닌데. 집 한 채쯤 괜찮지가 않다. 꾸역꾸역 쓰지만 그걸로 설득이 되겠냐. 글쎄. 정상인 척 비정상임을 호소하는 비정상인들은 정상인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라. 힘이 없는 척 힘 없음을 호소하는 힘 센 자들은 힘 센 자들에 대한 굴복을 중지하라. 성찰하는 척 성찰하는 것이 즐거운 지성인들은 성찰할 정신이 없는 무지한 자들에 대한 관조를 창문 틈 사이에 집어쳐넣어라. 밥을 먹고 싶지만 밥을 남기는 것이 죄악이라 생각하는 포식자들은 이빨을 갈아서 요거트로 만들어라. 기타 인간들은 알아서 살고 기타 등등은 밑줄 긋고 읽어야 할 문장이 있,지만 읽지 못하겠지. 새야새야 파란새야. 녹두밭에서는 녹두꽃이 떨어지는데, 청포장수는 무엇을 사고 무엇을 파는가. "따로 새겨진 서로만의 진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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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생 자르기 Fired K-픽션 13
장강명 지음, 테레사 김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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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소설이 다른 곳에 속한 각각의 사람들에게 각각 다르게 읽힌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이해한다. 알바생을 쓰는 편의점 주인과 편의점에서 일하는 알바생의 독법이 어찌 같을 수 있겠나. 그래도 최선의 독법을 찾고자 텍스트 내부를 탈탈 털어서 뭔가 먼지나 머리카락 몇 올이라도 건지면 좋겠지. 그 먼지들과 머리카락들을 잘 분석하면 저자의 의도라는 것이 조금은 더 정확히 이해될 것이고,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면 저자도 미처 마름질하지 못한 얼룩 같은 것도 발견될 거고, 그걸 대서특필해서 사회비판도 좀 하고, 사회적 수준의 무의식도 발견하고, 뭐 그렇게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정리하고 돌아가다 밤길이 너무 어두워 전봇대에 부딪히면 정신이 번쩍 드는 거다.

 

관조할 수 있을 만큼 거리를 두지 못하면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힌다. 누구나 한 번은 그렇게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히는 일이 오고야 만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고, 그래서 상대의 발을 밟기도 하고, 머리를 박기도 하고, 혹은 너무 멀어져, 노안이 와서,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간다. 필연적인 거다. 머리를 박고 하나의 독법을 선택하는 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당하는 거다. 머리를 박는 순간 내가 속한 곳을 정확히 알게 된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거리를 두는 것, 관조하는 건, 아주 특별한 예외적인 순간이다. 예외적인 것들은 예외적이므로 계산에 넣어서는 안 된다. 아니, 애초에 독서에는 계산이 개입하지 않는다. 계산은 작가가 하는 것. 나는 이미 결정된 내 위치를 책에 투사할 뿐이다. 머리를 박는다는 뜻이다. 이 소설은 중간관리자의 언어로 잘 마름질되어 있지만 여전히 다성적이다. 마름질되었음에도 얼룩들은 얼룩인 채로 남는다. 얼룩을 피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도 이해된다. 그러니 얼룩을 볼 수 없는 노안도 이해해주어야겠지. 

 

혹시 이제 텍스트의 다성성은 중요하지 않게 된 것 아닐까? 우리가 다성성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텍스트의 다성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그런데 이제는, 누구나, 더 많이, 더 다양한 목소리를 식별하고, 흉내낼 수 있게 되었고, 흉내가 아니라 어쩌면 실제로 다양한 목소리를 가져야 하는, 그러한 위치를 갖게 되어버렸는데, 그래서 이제는 텍스트가 아니라 독자 개개인의 독서 스크린에 각각 다양한 목소리가 투사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성적인가.

 

우리는 머리를 박는다. 어떻게 된 걸까? 분명 더 잘 식별할 수 있게 되었고, 내 목소리도 여러 가지인데, 여전히 머리를 박고 소설을 읽는다. 볼펜으로 밑줄을 긋는다. 이 밑줄은 나의 것이다. 내가 밑줄을 긋는 순간 이 텍스트는 나의 것이다. 그러니까 머리를 박은 거다. 이건 도저히, 분리해낼 수가 없는 게 아닐까? 분리할 수 있다고 관조하는 그 시선은 정말 순간에 불과한 것 아닐까?  이 불리불가능한 위치에서 발화되는 단성적 목소리의 불협화음은 우리를 앓게 한다. 우리를 낡게 한다. 이 불협화음을 견디는 건 모진 일이고, 그걸 관조하는 건 너무나 어렵다. 모범적인 답은 구조적 원인을 찾는 것이지만, 구조적인 원인을 찾는 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거라 권장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결국, 머리를 박고 얼룩에서 피를 보아야 다음 단계가 시작된다. 현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굴러간다. 소설이 현실과 관계맺는 것도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는 걸 더 말해 무엇하랴. 소설을 읽고 머리를 박는 사람이 다수일 때 다음 스테이지가 현실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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