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 147호 - 2010.봄
창작과비평 편집부 엮음 / 창비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여름호가 나왔지만 아직 내 몸과 마음은 여름을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된 관계로, 봄의 끄트머리를 낚아채 세 편의 단편소설들을 정리함으로써, 무심하게 지나가는 시간의 뒤통수에, 그리고 지지부진한 내 일상의 옆구리에, 아무도 새겨 듣지 않을 소심한 야유와 찬사를 새기고자 한다.


1.김유진의 <희미한 빛>-실업자, 히키코모리, 히피, 혼혈아, 잉여로운 삶

옛 남자친구와 동거하는 여자, 옛 여자친구와 함께 사는 집에 현재 여자친구를 데려와 사진을 찍는 남자, 옛 여자친구와 함께 사는 남자친구의 집에 아무렇지 않게 드나드는 여자, 태어난 나라와 자란 나라 어느 쪽에서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남자. 이들의 비정상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혹은 이들을 비정상으로 인식하는 나의 정서는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가? 편의상 이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어야겠다. 실업자, 히키코모리, 히피, 혼혈아가 그들의 이름이다.
실업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경제적 무능력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것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 실업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지리멸렬함'이다. 그녀는 알고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그녀는 히키코모리의 버릇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히피에 대해서도 잘 알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뿐만 아니라 혼혈아가 모국에 있을 때 함께 지낸 사람도 그녀가 유일하며 따라서 그에 대해, 그의 경직성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누구도 이해하고 있지 않다.

"B를 어디까지 이해하고 용인해야 할지 감당할 수 없었다."(202면)
"B는 아령을 과장된 몸짓으로 들어 보이며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억울한 일을 겪으면 참을 수가 없어. 그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204면)
"남부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라는 소개를 거친 중년의 여성은, 삭힌생선 요리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하나하나가 다 다른 맛을 지닌 음식이며, 그 맛으로 그것을 담근 사람과 그 집안의 내력을 이해할 수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나는 이해라는 말이 참으로 재미있는 말이라는 생각을 문득 했다. 우리는 생선의 숙성과정을 보며 맥주를 들이켰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빼드는 L을 위해 창문을 조금 열었다. 죽은 화분을 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207면)

위에 인용한 문장들은 그녀의 이러한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 준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어떠한 의지도 개입되지 않은, 말 그대로 상태에 가깝다. 그녀의 수동성이 그녀를 장악하고 있다. 그녀는 발화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그녀는 대립하거나 갈등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행동 역시 의식적인 노력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반응일 뿐이다. 이 지리멸렬, 지지부진함, 무기력이 바로 이 작품의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잉여, 남은 것, 구조의 바깥, 따라서 어떠한 변화도 초래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 역시 결코 변화시킬 수 없는 존재. 
다시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나는 왜 이들을 비정상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나는 여전히 나 스스로를 구조 속에 속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현실은 그렇지도 않은데. 사실 나는 실업자면서, 가끔은 히키코모리이기도 하고, 가끔은 히피를 꿈꾸기도 하지만, 순결한 혈통을 갖지 못해 언제나 스스로를 검열하는 혼혈아가 아니었던가? 잉여에 가까운 존재이면서 여전히 잉여를 향해 야유를 보내는 이 상태. 차라리 그냥 지리멸렬한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지지부진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는 작품 전체의 색조를 결정하고 있는 '희미한 빛'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경박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희미한 빛'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 질문이 잘못된 질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작가는 수목원의 '희미한 빛'에서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인가? 이 질문은 괜찮은 것 같다. 확실히 작가는 무언가를 보았다. 마지막 문장 "공작의 생태에 관한 안내문과 경고문구가 적힌 표지판을 단 원형철조망, 그 주변을 에워싼 개화한 모감주나무, 나뭇잎과 닮은 모양새의 비늘구름 사이로 이제 막 들이치기 시작한 희미한 빛을, 나는 바라보았다."(208면)에서 "나는 바라보았다" 앞에 있는 저 쉼표 때문이다.
비슷한 문장이 하나 더 있다. "건조하고 시원한 바람, 푸른 활엽수들, 잎 사이로 산산이 부서지며 쏟아지는 햇빛 냄새와 뒤섞인 나무줄기의 풋내를, 나는 무감하게 받아들였다."(202면) 그녀는 수동적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진 것 같다. 그러나 그녀-여기에서 그녀는 작가를 의미한다-는 볼 수 있고 구분할 수 있다. 원형철조망, 개화한 모감주나무, 나뭇잎과 닮은 모양새의 비늘 구름, 그리고 그 사이로 '막' 들이치기 시작한 '희미한 빛'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잎 사이로 산산이 부서지며 쏟아지는 햇빛 냄새와 뒤섞인 나무줄기의 풋내'를 그녀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쉼표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볼 수 있으며,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작품의 성취는 바로 이것,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까지는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 이 작품이 말하고 있다고 해석한다면 너무 멀리 간 것일까.


2.박민규 <루디>-하드보일드한 알레고리

표면적으로 이 작품은 미국소설의 전통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드보일드 소설을 연상케 하는 과한 폭력성과 액션의 전면화, 부적절한 유머의 공존이 그것을 연상케 한다. 주인공이 미국인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관계, 고용주의 직업이 금융회사 부사장이라는 점 등이 겹쳐지면서, 결국 조선의 정통 단편소설이 갖는 미덕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신자유주의 시대 대한민국(혹은 더 보편적인 세계)의 자화상을 알레고리화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 지 난감하다. 박민규 특유의 말장난과 하드보일드 스타일에 초점을 맞춰야 할 지,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와, 그 구조를 드러내는 인물들의 대사에 집중해야 할 지. 만약 후자로 보자면, 이 작품의 한계는 명백하다. 언데드로 표상되는 노동기계,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지루한 알레스카의 풍경들처럼, 피와 살이 튀지만 절대 끝이 날 리 없는 지루하고 비참한 인생에 대한 비판은 전망의 부재로 인해 무력할 뿐만 아니라, 비판의 입각점이 날카롭지 못해(도대체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비판이 가능하겠는가) 제대로된 비판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 작품에서 그나마 작가가 신경쓴 부분이라면, 주인공이 일상의 습관 혹은 감각을 하나하나 잃어가는 지점일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 상태 그대로 계속 달려야 하기 때문에 절망감만을 증폭시킨다. "쉽게 끝낼 '일'을... 왜 질질 끌고 지랄이었어? 내가 물었다./ 끝이... 안 나니까, 하고 놈이 말했다./ 또 우린// 러닝메이트니까... 라고도 놈은 말했다"(236면) 이 상태, 이 상태 그대로가 하나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죽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살아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이 작품의 메세지인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현실 혹은 일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정도로 독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문제의 중심을 건드릴 수 있을까?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남은 것은 재미 뿐이다. 박민규 소설의 문장들은 '재밌게' 읽힐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 대부분의 '재미'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를 통해 발생한다. 살인자와 인질의 부적절한 대사, 수다스러움,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 등이 순간순간 웃음을 일으킨다. 그러나 웃겨서 눈물을 찔끔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다. 


3.구병모 <학문의 힘>-본능으로서의 '학문하는 힘'과 분노의 방향

원래 이 작품은 씁쓸하게 웃겨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학문의 힘'에 대한 조소가 빚어내는 효과여야 하는데,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불쾌함과 불쾌함과 불쾌함과 분노만이 남는다. 이 작품은 잘 쓴 작품이 아니다. 필요 없는 수사가 남발되고 있으며, 구태의연한 대사와 사건들이 산재해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이 소설가가 들려주는 시간강사의 삶, 학문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논평의 생생한 현장감 때문이다. 수요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학문하는 자들, 그들의 비정상은 단지 숫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태도에서 말미암는다. 그들은 학문을 계속하기 위해 교수가 되어야 한다. 교수 임용은 실력으로 정해져야 한다. 교수에게 실력이란 다름 아닌 '학문하는 능력'일 것이다. 그러면 '학문하는 능력'은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논문의 숫자, 논문의 질, 학벌, 성적? 이런 것들이 '학문하는 능력'을 드러내 주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단단하고 강력한 줄을 예민하게 구분하여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을 구비한다고 해도, 예컨대 주인공처럼 매번 교수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남편 동료들에게 예의바르고 선량한 모습을 보여주며, 직장탈출을 참아가며 남편 뒷바라지를 해도(남편 입장에서는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해도) 교수에 임용될 수 있는 적정 수준의 '학문하는 능력'에는 미달한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능력이라 노력한다고 쉽게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장탈출을 참아내는 힘이 본능적이듯, 학문하는 능력 역시 본능에 따라 결정되며, 결국 우열은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것이다. '학문의 힘'은 그래서 '항문의 힘'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뭔가 다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다른 것과 똑같을 때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분노하게 된다. '학문의 힘'은 '항문의 힘'과는 다를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가 배신 당했을 때, 우리의 분노 게이지는 붉은 색 바를 가득 채우게 되며, 필살기를 시전하여 그 분노의 파괴력을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의 불온한 상상력은 아마 그 필살기 시전의 전 단계가 아닌가 싶다. '학문하는 공간'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 할 때 발생하는 폭주들을 우리는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정말 힘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힘이 분노에서 비롯되어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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