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귀뚜라미가 온다
백가흠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백가흠의 <<귀뚜라미가 온다>>를 읽었다. 단상들이 몇 가지 스쳐간다. 손톱 깎는 버릇이 바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제자리에서 손톱을 깎지 않는다. 차분하게 앉아, 신문지를 깔고, 손톱 모양을 동그랗고 예쁘게 깎던 버릇은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는 것이다. 나는 길을 걸으며 손톱을 깎는다. 신호등 앞에 서서, 셔틀 버스를 기다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손톱을 깎는 것이다.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버릇이다. 처음에는 시간을 아껴보자는 의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 내 생활 자체가 길거리 인생으로 바뀐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더 이상 어딘가에 정주하거나 안주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무슨 행동이나 말을 하든지 조심스럽고 여러 생각을 거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되는대로, 거침이 없다. 특히 나 자신을 대하는 행동에서 무례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그야말로 길거리 인생이 된 것이다. 단순히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어디서부턴가 이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얇은 벽을 사이에 둔 하나의 생활공간이 있다. <귀뚜라미가 온다>의 두 남자, 전어철이 되어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무인도에서, 얇은 벽을 두고 한 명의 여자에 의지해 살아가는 데깔코마니 인생. 그 공간 안에서 그들에게는 어떠한 가능성도 없으며, 매일 애널섹스를 하고, 술을 마시며, 노모를 때리는 것으로 하루를 소여한다. 물론 소설에서는 계속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소설은 리얼이 아니니까. 소설 속에는 항상 외부의 무언가가 침투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소설을 소설이게 한다. 이것을 국어 교과서에서는 '사건'이라 가르친다. 이 소설에도 사건이 있다. 그것은 '귀뚜라미'이다. '귀뚜라미'가 무인도에 들어오는 순간 내부의 단단한 구조는 일순간 허물어진다. 빛에 노출된 먼지들처럼, 혹은 사시미칼에 회쳐진 전어처럼.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는 전어를 구하려다 물고기밥이 되어 바다로 밀려간다. 모든 것이 드러난다. 현실에 '사건'이 개입하는 순간 모든 것은 낯설게 되거나, 본질적인 모습을 되찾게 된다. 모텔로 도망간 남자들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미련 때문에 소금기둥이 된 아내를 바라보는 롯의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본다. 심판이 임한 것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임하는 심판은 어떠한 목적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피심판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부조리할 뿐이다. 남은 것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 받은 자와 심판 받지 않은 자의 구획 뿐이다. 남자는 살아남고 여자는 죽는다. 가해자는 살아남고 피해자는 죽는다. 외부에서 임하는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그 반대여도 상관없겠지만, 이 소설의 문법 상 그 반대는 있을 수 없다. 남자들은 살아야 하고 여자들은 죽어야 한다. 아닌 것 같았던 남자와 여자의 구획,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획이 명확해지면서 두 남자의 데깔코마니는 완성된다. 합리성과 잉여의 삶은 계속되며, 인간과 생에 대한 쓸데없는 집착은 심판받는다. 외부에서 임하는 것들은 질문을 받지 않는다. 그냥 주어진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백가흠의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남자와 여자의 성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따라서 해설자처럼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읽는 것이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의 정답에 가까울 것이며, 그것을 근대문명 일반으로 확장하여 결론을 맺으면 더 없이 좋은 작가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그것을 수긍하면서도 미심쩍은 느낌을 버리기 힘든 것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 때문이다. 이 작품집의 비판적 요소들은 해설자의 말처럼 유아적이면서 폭력적인 남성성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남성의 유아적 폭력성에 노출된 여성인물들이 남성인물들에 의해 심미화된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 부분을 해설자는 작품의 비판적 입각점으로 보고 있는 듯 한데, 나에게는 그냥 포즈로만 보인다. 예컨대, 나에게 백가흠이라는 작가의 포즈는 이런 것이다. '봐봐, 남자들은 대체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 얼마나 심한 지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야. 하지만 나는 그걸 말로 표현하고 있지. 이걸 쓰고 있는 내가 얼마나 괴로운 지 당신들은 모를 걸.' 그러나 독하게 쓴다고 해서 포즈가 가려지지는 않는 듯 하다. 포즈 다음에는 무엇이 와야 할까. 이것이 이 작가가 다음에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서두에서 자기반성 비슷한 걸 했던 것 같다. 익숙해지는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이 익숙함 속에서 어떠한 것이든 합리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선험적인 지표도 없어진 시대에서는 포즈만으로도 충분히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포즈마저 익숙해지면, 그 때는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생각할수록 막막하다. 뜬금없이 바다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물고기들처럼 온몸으로 살아 움직이고 싶은가 보다. 오로지 살아 움직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상태가 그리운가 보다. 우리는 대체로 말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