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기억에 남는 것은 쓰레기 더미와 시궁창 냄새, 피범벅 등의 이미지다. 활극을 연상시키는 사건들이 긴박하게 이어지면서 흥미를 잃지 않게 하되, 다양한 공간 모티프를 활용하여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 '예외상태', '생명정치' 등의 개념을 끊임없이 건드렸다. 그러나 이러한 포장들을 다 제거하면 무엇이 남는 걸까? 국경을 넘어, 법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나 예외상태에 놓이고, 생명정치의 시대에 벌거벗은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재의 인간군상을 극단화한 그것을 제거한다면, 이 소설에서 남는 것은 결국 '소통의 부재' 혹은 '소통의 불가능성'이다. 아내와 나는 소통할 수 없었으며, 다른 사람을 찾아 이혼했지만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여있다. 이천년대 이후 한국현대소설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이 주제는 아무리 거창한 포장을 하고 있어도 그 자체의 본질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은 소통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 사건을 현대의 사회정치적인 맥락의 문제틀로 전환시킨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현대의 사회정치적 한계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정말 모든 문제들이 이 사회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물론 작가는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포장을 해댔지만 결국 모든 것이 쥐 한 마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복잡한 사회정치적 문제들도 쥐한마리로 표상되는 '우연'이라는 것 보다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꺼운 서사들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진실로 진실로 작가의 말을 듣고 싶다. 쥐가 먼저인가, 아감벤이 먼저인가?
 


작가의 답변을 예상해보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그녀는 아마 대답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문제라고. 그것이 현실이라고. 한국 대통령의 별명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설치류 동물과 같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이 별명은 아주 악랄하다. 내가 이 별명을 갖고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아주 천박하게, 이 소설을 알레고리화하면, 현재 대통령이 문제가 많지만, 사실 그것은 어떤 우연적인 요소에 불과할 뿐이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대의 사회구조 자체가 그 설치류 동물과 유사하게 생긴 대통령을 만들어냈고, 항간에 그 설치류를 닮았다고 소문이 나 있는 대통령은 그 구조를 더 공고하게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다 나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부터가 어려운 것인데, 사실 쥐는 항상 있어 왔던 것이고, 이 구조는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근대라고 불리는 사회구조는 끽해봐야 2~300년 정도 밖에 안 되었다. 그에 비해 쥐는 인간보다 오래 살아왔으니 비교가 안 된다. 그럼에도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에 나오는 쥐가 보통 쥐가 아니라는 점이다. 평소의 쥐는 인간에게 위협적이지 않다. 그러나 전염병이 돌고, 쥐가 전염병을 옮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쥐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된다. 이때의 쥐는 평소 보이지 않는 벽을 오가며 여러가지 음식물을 갉아먹는 설치류 동물과는 구별된다. 전염병을 옮기고, 그것이 여러가지 매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소문이 되는 사회구조에서만 존재하는 동물인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쥐는 근대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종류의 쥐새끼다. 이러한 쥐새끼들의 수요는 셀 수 없는 것이어서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쥐는 단지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이 쥐는 마치 항상 존재하는 설치류 동물을 지칭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쥐이며, 현재의 사회구조와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존재이면서 그것의 모순이 도달하는 극점을 보여주는 동물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쥐새끼에 불과하며, 따라서 쥐새끼들 사이에 무언가 소통이 있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쥐새끼 불알 만지는 소리인 것인가, 라는 질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소설가는 아마 이 질문에 긍정할 것이며, 실제로 작품을 그렇게 끝맺고 있다. 쥐새끼를 잡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이유를 정당화하는 존재, 타인의 비윤리성-비도덕성-비인륜성 뭐, 하여튼 비-머시기들을 들추어냄으로써만 자신의 윤리적-도덕적-인륜적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존재가 우리들 아닌가. 설치류 별명을 가진 대통령을 욕하는 것으로 자신의 윤리적-도덕적-인륜적 성숙도의 우위를 맛보는 우리들도 결국 쥐새끼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이야기를 이렇게 끌고 가게 되면, 우리 모두는 똑같은 쥐새끼들이다, 라는 비관적 결말에 이를 수밖에 없다.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가 되고 마니까. 그것이 아니라 쥐가 진짜 우연을 표상한다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두꺼운 서사는 결국 구운몽이나 솔로몬의 잠언이 우리에게 준 교훈과 달라질 것이 없게 된다. '헛되고, 헛되고, 또 헛되도다.' 
 


두 개의 이야기를 하나로 붙이는 것은 별로다. 소설가는 조각가여야 하지 않을까. 하나의 돌덩이에서 하나의 형상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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