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소설은 투쟁 이야기거나 사랑 이야기이다. 혹은 투쟁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혁명 뒤의 이야기, 이른바 후일담. 더 이상 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쓰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종결되었다. 혁명은 '사건'으로서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진리'가 되지 못했다. 그러한가? 황석영은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가? 혁명은 현실에 조그마한 흔적만 남긴 채 끝나버렸고 그때의 치열했던 외침들과 그것을 억눌렀던 총소리들은 지금 돌이켜보건데, 실제보다 너무 요란했다는 멋쩍음을 남겼다. 사소한 일 때문에 다퉜던 연인들이 지나간 일들을 돌이켜보며 서로의 잘잘못을 하나하나 주워섬길 때 느끼는 낯뜨거움을 혁명 뒤의 멋쩍음에 비유한다면 아마도 나는 생각없는 젊은놈으로 낙인 찍힐 게다. 혁명과 사랑이 어떻게 비교대상이 될 수 있겠나? 투쟁과 연대는 그러나 동일한 목적을 위한 다른 방법이 아니었던가. 허니 어쩌겠는가? 나는 혁명을 모르고, 그들은 내 사랑을 모른다.
많은 블로거들은 이 소설을 말할 때 이렇게 시작하곤 한다. '나는 운동권이 싫다... 나는 혁명을 모른다...' 80년대에 태어난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다. 단어만 몇 개 바뀌었을 뿐, 똑같은 의미의 문장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에 태어난 독자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라는 것을 황석영이 몰랐을까? 황석영은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은결이의 존재 때문이다. 그는(작가) 자신들의 혁명을 80년대생 아이들에게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만나지 못한다. 오현우는 마지막까지, 여전히 과거의 한윤희에게서, 그리고 감옥의 감각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그는 은결을 만나지 못한다. 그는 환상 속에서 은결을 만날 뿐이다. 그들은 화해할 수 없다.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뭐랄까, 서로...... 타이밍이 안 맞았어요.
(...중략...)
왜 그랬을까......?
서로 섭섭하게 생각하구 있는 거예요. 그러다가 미안해져서 지나치게 잘 해주려고 하고, 둘 다 알아채고, 그 반복이에요.(하권, 314면)
그들과 우리 80년대생은 타이밍이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서로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의 혁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그래서 더 잘 해주려하지만 결국 서로의 차이만을 확인하게 된다. 차이에 대한 확인이 반복되다보면 우리는 포기하거나 체념하게 된다. 작가의 후기는 이것을 재확인시켜주며, 쓸쓸한 마음으로 책을 덮게 만든다.
새로운 세기에 지난 세기의 암울한 고통과 상실과 좌절을 되새기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질문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언제나 다시 출발할 것이다.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나의 벗들에게도, 오늘 우리 같이 가자고 오랜만의 인사를 전하면서.(후기, 318~319면)
작가는 자기들의 벗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오현우가 수많은 인파 속에서 윤희의 환영을 보듯, 수많은 독자들 속에서 작가는 자신이 사랑했던 그때 그 사람들을 찾아내 말을 건낸다. 뭔가 쓸쓸하다. 오래된 정원을 찾아낸 작가가 그 곳에 자신의 친구들을 초대한 뒤 입구를 패쇄한 것 같은 느낌. 초대장이 없는 나는 사라진 정원에 대해, 그것의 아름다움에 대해 부러움을 느끼지만 그것은 나의 정원은 아니며, 혁명은 결코 나의 혁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마 작가도 그것을 어렴풋이 느꼈나 보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 나는 지금 이곳에서 시작할 뿐이다.
이 소설에 나쁜 놈은 없다. 원래 좋은 소설에 나쁜 놈은 없는 법이다. 다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나쁜 놈들은 추상화되어 있다. 그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분노는 마땅히 투사될 대상을 찾지 못하고 부서진다. 나쁜 놈들은 역사이고 구조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있지 않은 우리들은 항상 선하며 억울하고 쓸쓸하다. 거대담론에 의해 삭제되었던 작은 주체들을 복원시키는 이러한 작업들은 이천년대 초반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들을 옹호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그러므로 착하고 올바르다. 소설이 존재하는 좌표는 항상 이러하다. 지나고 난 것들에 대해, 패배한 것들에 대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에 대해, 소설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경험 많고 지혜로울 것 같은 노소설가에게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