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마지막 우체국
무라세 다케시 지음, 김지연 옮김 / 모모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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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으로 보내는 편지>


맨 마지막에 당신이 물었잖아.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이 뭐냐고.


살아 있는 거야. 이상.

p.356



《세상의 마지막 우체국》은 천국으로 떠난 사랑하는 이에게 막대한 비용을 내고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작가의 전작인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은 아이가 제목만 보고 도서관에서 빌려와서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펑펑 울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기차역에서는 떠난 이들과의 마지막 만남을 그려냈다면, 우체국에서는 편지를 통한 마지막 진심을 주고받는 장면을 그려냈다. 두 작품 모두 상실과 치유라는 큰 주제는 같지만, 이 책에서는 만남 대신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정제된 말로 써 내려간 진심을 진정성 있게 전한다.


천국으로 떠난 이들의 사연만큼 남은 이들의 사연도 다양하다. 천국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다는 광고를 본 이들은 떠난 이들에게 꼭 전해야만 하는 절박한 진심이 있다. 연인, 가족, 반려동물 등 사랑하는 이가 떠난 지 49일 이내에만 편지를 부칠 수 있기에 더욱 조급하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다. 편지를 부칠 때 드는 막대한 비용이다.


책의 원제는 《切手がとっても高い郵便局で》인데 '우표가 매우 비싼 우체국에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매우 비싼 우표를 파는 우체국이라는 것. 천국으로 보내는 편지에 붙이는 우푯값은 사람마다 다르게 책정된다. 자산과 수입에 따라 최저금액인 15만 엔부터 시작된다. 답장을 받고 싶으면 우표를 한 장 더 사야 하므로 2배를 내야 하고, 추가로 물품 등을 넣어 보낼 경우 무게에 따라 추가금을 낸다. 이 책에서 나온 가장 비싼 우표는 무려 편도 50억 엔이다.


하지만 떠난 이에게 꼭 전해야만 하는 것이 있고 그럴 방법이 있다는데 돈 때문에 망설이는 사람이 있을까. 그들은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빚을 내서라도 편지와 물건을 천국에 부친다. 답장을 받기도 받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편지를 부친 사람들은 떠난 이와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진실한 마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자신만의 삶을 이어간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상실의 아픔을 안고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목도해왔다. 그래서인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의 죽음과 상실, 그리고 그 이후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 했다. 상실이 누군가의 삶의 의지를 꺾는 모습도, 새롭게 의지를 다지고 살아가게 하는 모습도 봤다. 하지만 제대로 슬퍼하지 못한 채 그저 죽음이나 상실을 입에 올리길 꺼려 하는 분위기는 모순적이라고 느껴졌다. 흘려보내지 못한 슬픔은 겉으로 보이지 않아도 안에서 곪고, 언젠가는 터져 나온다. 충분히 애도하고, 위로를 주고받는 과정을 거쳐야 다시 온전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우리에게 상실의 슬픔을 공유하고 함께 살아갈 용기와 위로를 주는 치유의 이야기가 필요한 까닭이다.


이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행복이니 살아서 행복해지고, 용기 내어 스스로의 길을 찾아라. 자의로든 타의로든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마지막 말에 우리는 상실의 슬픔에도 또다시 살아나갈 용기를 얻는다. 굿럭 인형이 돌고 돌아 다시 첫 주인에게 온 것처럼 슬픔을 공유하며 애도하고, 함께 세상을 살아가며 행복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본다.


본문 시작 전에 나온 누군가의 편지의 전문이 맨 끝에서 이어지는데, 책을 다 읽고 나면 이유를 알게 된다. 굿럭 인형의 이동 경로를 쫓거나 인물들 간의 연결고리를 찾아가며 책을 읽어가다 보니, 내용적인 측면이나 구조적인 측면에서 모두 이 책이 하나의 루프(Loop, 순환구조)처럼 느껴졌다.


책을 읽는 내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지만 끝까지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엉망인 채로 여럿에게 진심을 담은 메시지를 보냈다. 현실에서는 돈이 얼마나 많든 천국으로 연결되는 우체국이 없으니 역시 마음은 전할 수 있을 때 전해야 한다.


떠난 이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이 있는 사람, 상실의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 그저 삶에 지쳐 위로가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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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
정명섭 외 지음 / 한끼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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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는 서울을 배경으로 네 명의 작가가 각자의 색을 입혀 완성한 미스터리 단편소설집이다. 각 단편 끝마다 작가의 인터뷰가 있어 책의 기획 의도와 작품 설명 등을 작가에게 직접 들을 수 있는 구성이 좋았다. 서울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네 개의 시선은 서울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들여다보게 했고, 서울이라는 도시의 보편적 이미지와 서울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게 했다.


서울에서 산 지 40년이 넘었다는 서울 토박이 정명섭 작가는 자신이 살던 동네에서 벌어졌던 비극적인 사건을 <사라진 소년>속에 녹여냈다. 그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채로 그곳에서 살아왔는데 영화를 계기로 조사하다 알게 되어 더 충격이었다고 한다. '서울엔 모든 것이 다 있지만 막상 정말 필요한 것은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저자의 말에 그의 소설의 키워드인 '실종'이라는 말이 겹쳐 보였다. 실제로 이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가 서울을 바라보는 복잡한 시선에는 반짝이는 서울의 이면에 있는 어두운 면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왜곡되어 전해진 비극의 진실을 알리고 기억하기 위해 쓴 그의 글은 실제 사건의 진실뿐만 아니라 소설 그 자체로도 생각거리와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콜린 마샬의 <(신촌에서) 사라진 여인>도 재미있게 읽었다. 외국인의 시선으로 본 한국 사람들의 특징이나 서울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있고,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지혜를 찾아 여러 사람에게 수소문하며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이 유럽 여행 중에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면 다 다른 방향을 알려줬던 기억을 떠오르게 해서 조금 심각한 분위기인데도 괜히 웃겼다.


외국에서 얼마나 오래 거주하고 그 나라 언어를 얼마나 유창하게 구사하는지와 무관하게 구성원이 아닌 이방인으로 여겨지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론 뭔가 외로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나도 오랫동안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여기며, 혹은 그렇게 여겨지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외국 생활이 길어질 때도 어김없이 그랬지만, 태어난 고향에서 초,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던 때에도 그랬다. 표준어를 사용하거나 문화적으로 당연한 부분들을 모른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는 경험보다는 조금 다르다는 시선을 받으며 성장했던 탓에 그 도시에 속한다는 느낌을 받지도, 애정을 느끼지도 못했다. 대학교에 진학하며 서울에 돌아왔을 때 나는 비로소 편안함을 느꼈다. 고향과 서울 그 어느 쪽도 잘 알지 못했고 서울 사람 입장에서는 표준어가 유창한 지방 사람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서울에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완벽한 외지인들이 서울에서 말투까지 바꿔가며 살아가는 모습에 그간의 내 모습이 비쳐 보여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늘 변화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인 듯하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변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를 수 있다. 나도 가끔은 이런 빠른 변화가 반갑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서 추억이 있는 공간들이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있다는 것에 안심하기도 한다. <선량은 왜?>에서 주변 사람들이 다 떠나고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음에도 동네와 집을 떠나지 못하고 집착하는 모습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천사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죽는다>의 배경이 된 대학로와 마로니에공원은 요즘도 가끔 들르는 익숙한 장소 중 하나다. 김아직 작가의 말대로 공원 근처의 편의점에 들르거나 휠체어 그네 앞 벤치에 앉을 때마다 이 책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나에게 서울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이 시작된 곳이자 현재 살고 있는 곳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가장 빨리 미래를 향해 움직이는 곳.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서울의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에 대해서, 여러 입장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모습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아갈 수 있었다. 서울의 다층적인 얼굴에 대해, 살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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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정원의 살인 한국추리문학선 22
황정은 지음 / 책과나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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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악한 욕망과 침묵의 유대>


"강우혁과 양혜숙은 단지 내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주민들은 공공의 적이었던 두 사람을 말살하는데 '침묵의 유대'로써 동의를 한 것입니다."

p.354


 «개구리 정원의 살인»은 교와 포레스트라는 고급 아파트 단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다. 교와 포레스트에서 일어난 한 건의 자살과 두 건의 살인사건. 세 개의 사건은 교차된 이해관계 속에서 결국 하나의 점으로 연결된다. 여러 인물들의 시점을 오가며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 추악한 욕망이 어떻게 삶을 지배하고 파멸로 이끄는지 보여준다.




 교와 포레스트의 다소니 연못은 갈등의 씨앗이자 욕망을 실현할 무대가 된다. 다소니 연못의 물을 다시 채우는 일로 시작된 주민들 간의 분열은 배우 강우혁의 등장과 함께 또 다른 분란과 더 큰 사건을 만든다. 다시 물이 채워진 다소니 연못은 교와 포레스트가 상징하는 명성에의 집착,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살의, 지우고 싶은 과거 등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면의 추악함을 비추는 무대가 된다. 나에게는 다소니 연못이 이 소설의 맥거핀처럼 느껴졌다. 결국 다소니 연못이 아니라도 무언가를 통해서든 언젠가는 서로 부딪치며 드러날 추악한 욕망들이 아니었을까. 물을 넣든 빼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니까.




 살해된 두 인물은 교와 포레스트에 불만과 논란을 일으키는 공공의 적으로 여겨진다. 형사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주민들을 탐문하지만 주민들은 모두 침묵한다. 진실을 알고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기 위해 침묵한 자, 추악한 욕망에 편승하며 진실을 외면한 자들은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며, 끝까지 각자의 안위와 욕망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침묵의 유대로 이어진 그들에게선 일말의 죄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소설이 끝을 향할수록 모든 이해관계는 하나의 점으로 연결된다. 어쩌면 그곳에서부터 모든 것이 계획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이렇게 끝나도 되는 건가 하며 뒷맛이 쓰다. 제발 현실이 소설보다는 낫길 바랄 뿐.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그린 사회 심리 미스터리 «개구리 정원의 살인»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그려본다. 우리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어느 순간엔 가해자이며 동시에 피해자였고, 그렇기에 앞으로 할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생각하며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 깊게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은 현실이기에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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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정신과 - 별난 정신과 의사의 유쾌한 진료일지
윤우상 지음 / 포르체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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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are all patients!

너도 환자, 나도 환자, 우리 모두 환자다.

때로 내가 더 힘들고 때로 네가 더 힘들고 할 뿐이다.

그러니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힘든 세상 함께 헤쳐 나가는 거지.

<그곳, 이상한 나라> 中


 «명랑한 정신과»는 자신만의 세상에 사는 특별한 사람들이 모인 이상한 곳으로 출근해서, 멀쩡하다는 사람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정신없이 살아가는 이상한 곳으로 퇴근하는 정신과 의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저자 자신과 정신과 의사로서 만나왔던 사람들, 그리고 그 삶에 관한 이야기.


 밝고 유쾌하게 써 내려간 일화들이 많지만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환자를 진심으로, 그리고 신중하게 대하는 저자의 마음이 보여서다. 마음이 묵직하게 내려앉기도 하고, 때론 웃고, 때론 같이 눈물을 흘리며 함께 치유받고 삶을 헤쳐나갈 용기를 얻는다. 병에 대한 전문적인 설명이나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측면들 - 위험에 노출되거나 흥분한 환자 처치 방법 등 - 이 진솔하게 묘사되는 부분도 있는데, 오히려 현장을 생생히 알 수 있고 정신병원에서 하는 일 등을 자세히 알게 되어 좋았다.





누구나 나만의 세상을 갖고 있다. 내가 만든 세상이다. 내 세상과 바깥세상은 자주 어긋나고 부딪힌다. 나만의 세상을 고집할 수도, 그렇다고 나의 세상을 버리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사는 게 복잡하다. 그래서 인생은 재미있다.

p.31


 책장을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시작부터 바둑알과 똥 이야기가 나와 낄낄대다 몇 장 뒤에 나온 내용에 혼자 빵 터져버렸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 정신과 의사하는 건데...."

내가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과 상담 중에 실제로 들었던 말인데, 저자가 전공의 수련을 받을 때 교수님도 농담처럼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오래된 추억이 떠올라 한참 웃었다.


 저자는 자신이 휴머니즘이 강한 사람이라 정신과를 선택한 줄 알았는데, 정신과 의사가 되고 보니 무의식중에 자신의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듯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느 면에서 모두 환자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듯 우린 모두 자신만의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보고, 불안증이나 우울증 등의 증상들도 가지고 있다. 다만 정신적인 문제는 질이 아니라 양적인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증상이 나를 힘들게 하고 남을 괴롭힐 때 문제가 된다.


 수잰 스캔런의 «의미들»이라는 책에도 정신병원에 입원해있는 사람들보다 그들을 면회 온 가족 등 정신병 환자가 아닌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훨씬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내용이 나온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매 순간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오가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정신질환 병력이 있든 없든 그저 모두 같은 사람일 뿐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흔들리고 불안할 때가 있으니까. 나 혼자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이유는 또 뭘까.




'나의 혀는 메스다. 나의 혀 놀림이 집도의의 칼과 같다. 내 혀 놀림으로 상처를 봉합하고, 내 혀 놀림으로 암을 제거하고, 내 혀 놀림으로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 잘못하면 내 혀 놀림으로 상처를 주고, 멀쩡한 혈관을 자르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내 혀는 칼이다.'

p.179


 책을 읽으며 저자의 정신과 의사로서의 신념과 사명감에 존경심이 생겼다. 정신과에서 하는 치료는 다양하지만 이야기를 들어주고, 말을 거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에 자신의 혀는 메스고, 모든 면담은 수술과 같다고 늘 되새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의사도 사람이기에 어떤 상황에서는 흔들리고, 불안하고,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용기를 낸다. 그 결과가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도움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멋졌다.





그녀가 고통의 마음을 용기 내어 보여 주었기에 또 다른 생명을 살리고, 우리에게 생명의 힘을 다시 느끼게 해 주었다.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p.250


 저자는 사이코드라마(심리극) 전문가이기도 하다. 사이코드라마는 강력한 치유 기법 중 하나인데, 연극적으로 문제 상황을 실제처럼 재연하면서 직접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대역을 세워 그동안 못 했던 말을 직접 하는 것으로 과거의 트라우마, 현재의 갈등, 미래의 불안 등 문제가 풀리고, 해결 방법도 알게 된다.


 이 책에서 나온 사이코드라마 일화 중 가장 마음에 남았던 것은 자살한 아들을 둔 엄마의 이야기였다. 힘든 내색 한 번 없던 아들이 자신의 생일 다음날 유서도 없이 자살을 한 뒤로, 엄마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분은 주인공으로 나와 힘들게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으시고, 관객 중 한 명에게 아들 대역을 부탁했다. 주인공은 아들에 대한 미움, 원망, 그리움, 미안함 등을 절절히 표출했고, 아들 대역을 맡은 분은 엄마가 그렇게까지 괴로워할 줄 몰랐다며 미안하다며 울었다. 주인공은 고통에서 조금 벗어난 듯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아들을 하늘로 보내주는 장면에서 문제가 생겼다. 기독교의 교리에 따라 아들이 지옥에 갈까 봐 아이를 절대 하늘로 보내지 못한다며 울부짖었다. 그때 관객석에서 사람들이 나와 아들은 늘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으니 하나님께서 품어주실 거라며 엄마를 위로했다. 마침내 엄마는 진심으로 아들을 보내줄 수 있었다.


 극은 주인공의 마음을 치유하며 끝났지만 이야기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었다. 아들 대역을 맡아준 분은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고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살 후 남겨진 엄마가 고통받는 모습에 자신의 어머니가 겹쳐 보이며 큰 충격을 받아 어떻게든 계속해서 살아갈 거라 다짐한다. 주인공은 자살 유가족 모임을 계속하며 다른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모두가 함께 참여하며 상처에 공감하고 이해하며, 결국 모두가 치유받는 이 시간이 참 감동적이었다. 나도 현장에서 함께 하는 듯 그들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져 정말 많이 울었고, 누군가의 삶이 이어지는 계기가 되어서, 사랑을 느끼는 시간이 되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랑한 정신과»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정신병을 진단받았든 그렇지 않았든 모두의 삶에는 자신만의 크고 작은 애환이 있고, 낭만이 있고, 치열함이 있다. 견고한 자신만의 성에 갇힌 사람들도 그 안에서 나름의 고민을 하고, 희망을 찾고, 사랑을 한다. 우리 모두는 그저 약간의 다정함이나 위로가 필요한, 서로가 필요한 보통의 사람들이 아닐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은 누구의 삶에나 찾아오기에 서로 위로하고 기대며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또 좋은 날이 올 것이란 믿음으로.


 누군가의 아픔에 함께 슬퍼하기도 하고, 어떤 마음들에 공감하기도 하며 울고 웃다 보니 어느새 내 마음도 조금 밝아진 느낌이다. 이 책을 통해 세상살이에 지쳐있는 누군가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고, 외로운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마음이 전달되길 바란다.


이 이야기가 우리 삶에 따스한 위안과 작은 사랑이 되었으면 한다.

힘든 삶을 살아 내는 우리 모두를 응원하고, 응원하고, 또 응원한다.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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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
세스지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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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과 저주를 품은 윤회의 수레바퀴>


"이런 밤이었지, 네가 날 죽인 건."

아이의 얼굴은 그날 밤 죽인 로쿠부의 얼굴과 똑같았다.
p.269





 책장을 열자마자 마주한 페이지. 시작부터 이렇게 본격 호러라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책장을 바로 다시 덮었다. 이전에 읽은 호러 소설들이 생각보다 무섭지 않게 느껴져 조금 용감해진 줄 알았으나 그럴 리가 없지. 아주 화창한 날, 햇살이 가득한 대낮에 책을 다시 펼쳤다.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관하여»는 심령 명소 탐방 유튜버인 이케다, 프리랜서 편집자 고바야시, 프리랜서 작가 호조 세 명이 모여 '공포'를 소재로 수익성 콘텐츠인 이케다의 팬 북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유령을 믿지 않는 유튜버, 유령이든 저주든 돈이 되면 그만인 편집자, 유령을 보는 작가. 셋의 조합이 신박하면서도 각자에게 어떤 숨은 이야기가 있을지 기대되었다.


 이케다의 팬 북은 그동안 유튜브에서 인기가 많았던 콘텐츠 중 몇 가지를 소재로 만든다. 본문에 앞서 나온 위의 잡지 같은 페이지들에 나온 것처럼 변태 오두막, 천국 병원, 윤회 러브호텔을 소재로 한다. 각 장소에 대한 다양한 소문이나 실체를 확인하고, 그럴듯한 공포스러운 허구의 내용을 추가한 뒤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셋은 각자의 과거와 죄업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저주처럼 그들을 따라다니고, 각자의 추한 욕망을 드러내 보인다.





 이케다 팬 북을 제안한 고바야시는 연예부 기자로 일했던 당시 직장과 돈의 압박에 신념을 버리고 2차 가해나 마찬가지인 기사를 썼던 적이 있다. 한 번 시작하니 그 뒤론 아주 쉬웠다.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왔다. 어느 날, 자신이 처음으로 썼던 가십성 날조 기사 때문에 고인의 유족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그를 봤던 곳에서 유령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뒤론 그 장소에 가지 않는다.


 호조는 신사 집안의 딸로 어릴 때부터 유령을 봐왔다. 중학교 때 그것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게 되고, 의도치 않게 자신을 도와주려던 교사를 유령에게 잡아먹히게 한다. 교사는 학교에서 자살을 하게 되고, 교사의 유령은 늘 호조의 근처에 머문다.


 이케다는 유령은 없다고 믿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미대 재학 시절 만난 여성에게 자신이 텅 비었다는 말을 듣고 학생들이 강령술이라며 장난삼아 하는 의식 중에 저주를 퍼붓는다. 그 뒤로 학교에서는 그 여성을 볼 수 없었고, 그녀가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사고가 자신이 그녀를 저주한 그 시각에 일어났다는 것도.





 저주란 악의로 똘똘 뭉친 끈적한 기운 같은 느낌이다. 벗어나기도 빠져나오기도 쉽지 않다. 누군가를 저주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악의를 상대방에게 전염시키는 것. 결국 자기 자신을 더 깊이 파괴하는 행위로도 보인다. 수많은 사진이 쌓인 변태 오두막은 사실 누군가를 저주하기 위해 온 사람들, 혹은 누군가의 저주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던져놓은 사진들이 쌓인 걸까? 쌓여있는 사진들 중 아는 얼굴을 발견한 고바야시가 들려준 이야기는 여러 사건이 얽혀 결과마저 상당히 참혹하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 다른 이의 자리를 탐낸 여자. 자신이 낳은 아이의 행동을 보며 자신 때문에 죽은 이가 자신을 저주해 아이로 태어나 자신을 괴롭힌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결국 여자는 자신의 아이를 방치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공포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자신의 죄악이나 내면의 어떤 균열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현실로 발현되는 것. 혹은 현실에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대면하며 비롯되는 것. 우리가 공포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서늘함은 단순히 보이지 않는 대상에의 두려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추악한 모습이나 과거의 죄업, 하다못해 아주 작은 죄책감이라도 품고 있을 것이기에.





 이 책의 배경에는 로쿠부 살해 민담이 있다. 로쿠부란 로쿠주로쿠부(六十六部)라고도 불리는 수행승을 말한다. 예순여섯 군데 영험한 성지를 순례하며 예순여섯 번 필사한 법화경을 한 부씩 바치며 죽은 자가 극락에 갈 수 있도록 기도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대부분 도보로 이동했기 때문에 지쳐 쓰러지거나, 노상강도를 만나기도 하고, 목숨을 빼앗기는 일마저 있었다고 한다.


 보름달이 뜬 어느 날 밤, 나그네 로쿠부가 작은 마을의 어느 집에 찾아가 하룻밤 묵게 해달라고 청했다. 가난하지만 친절한 부부는 소박한 식사를 대접하고 로쿠부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밤이 깊어졌을 무렵, 남편은 뒷간에 다녀오다 매듭이 풀린 로쿠부의 봇짐에 달빛이 비쳐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부부는 로쿠부를 죽이고 그 돈으로 장사를 시작해 재산을 모으고 아이도 두었다. 아이가 여섯 살을 맞이한 보름달이 뜬 밤, 남편은 소변이 마렵다는 아이를 데리고 뒷간으로 간다. 아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이유를 묻는 남편에게 아이는 말한다. "이런 밤이었지, 네가 날 죽인 건." 아이의 얼굴은 그날 밤 죽인 로쿠부의 얼굴과 똑같았다.


 저자는 이 옛이야기 속 윤회 구조를 심령 명소에 얽힌 소문과 그것을 추적하는 세 명의 인물로 연결한다. 가해자가 자신의 과거와 새삼 마주하며 죄업을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소설 끝에 고바야시가 호조를 부추겨 이케다의 불안과 공포를 자극한 경위가 나온다. 한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몰고 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없이 죽음마저 그저 수단으로 삼는 추악함에 치가 떨린다. 이에 동조한 호조가 이케다에게 부적을 내미는 장면도 그저 위선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내면의 공포에 삼켜져 결국 유령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케다. 다행히 그가 저주했던 여성은 잘 살아있었고 동명이인의 사고 소식을 보고 오해했다는 해프닝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죽게 만든 여자의 유령과 마주한 고바야시와, 영문을 알 수 없는 전화를 받은 이케다. 그가 마지막에 받았던 전화의 내용은 이들 또한 저주의 굴레에 들어와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죄악과 저주를 품은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있는 걸까. 풍선처럼 부푼 머리를 이끌고 다음 차례를 찾아 떠도는 저주 받은 순례자의 다음 희생양은 누굴까. 모든 것은 돌고 돌아 결국 인간의 문제. 탐욕과 악의로 더럽혀진 순례길의 여정을 함께하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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