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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
세스지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5년 12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죄악과 저주를 품은 윤회의 수레바퀴>
"이런 밤이었지, 네가 날 죽인 건."
아이의 얼굴은 그날 밤 죽인 로쿠부의 얼굴과 똑같았다.
p.269

책장을 열자마자 마주한 페이지. 시작부터 이렇게 본격 호러라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책장을 바로 다시 덮었다. 이전에 읽은 호러 소설들이 생각보다 무섭지 않게 느껴져 조금 용감해진 줄 알았으나 그럴 리가 없지. 아주 화창한 날, 햇살이 가득한 대낮에 책을 다시 펼쳤다.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관하여»는 심령 명소 탐방 유튜버인 이케다, 프리랜서 편집자 고바야시, 프리랜서 작가 호조 세 명이 모여 '공포'를 소재로 수익성 콘텐츠인 이케다의 팬 북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유령을 믿지 않는 유튜버, 유령이든 저주든 돈이 되면 그만인 편집자, 유령을 보는 작가. 셋의 조합이 신박하면서도 각자에게 어떤 숨은 이야기가 있을지 기대되었다.
이케다의 팬 북은 그동안 유튜브에서 인기가 많았던 콘텐츠 중 몇 가지를 소재로 만든다. 본문에 앞서 나온 위의 잡지 같은 페이지들에 나온 것처럼 변태 오두막, 천국 병원, 윤회 러브호텔을 소재로 한다. 각 장소에 대한 다양한 소문이나 실체를 확인하고, 그럴듯한 공포스러운 허구의 내용을 추가한 뒤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셋은 각자의 과거와 죄업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저주처럼 그들을 따라다니고, 각자의 추한 욕망을 드러내 보인다.

이케다 팬 북을 제안한 고바야시는 연예부 기자로 일했던 당시 직장과 돈의 압박에 신념을 버리고 2차 가해나 마찬가지인 기사를 썼던 적이 있다. 한 번 시작하니 그 뒤론 아주 쉬웠다.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왔다. 어느 날, 자신이 처음으로 썼던 가십성 날조 기사 때문에 고인의 유족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그를 봤던 곳에서 유령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뒤론 그 장소에 가지 않는다.
호조는 신사 집안의 딸로 어릴 때부터 유령을 봐왔다. 중학교 때 그것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게 되고, 의도치 않게 자신을 도와주려던 교사를 유령에게 잡아먹히게 한다. 교사는 학교에서 자살을 하게 되고, 교사의 유령은 늘 호조의 근처에 머문다.
이케다는 유령은 없다고 믿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미대 재학 시절 만난 여성에게 자신이 텅 비었다는 말을 듣고 학생들이 강령술이라며 장난삼아 하는 의식 중에 저주를 퍼붓는다. 그 뒤로 학교에서는 그 여성을 볼 수 없었고, 그녀가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사고가 자신이 그녀를 저주한 그 시각에 일어났다는 것도.

저주란 악의로 똘똘 뭉친 끈적한 기운 같은 느낌이다. 벗어나기도 빠져나오기도 쉽지 않다. 누군가를 저주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악의를 상대방에게 전염시키는 것. 결국 자기 자신을 더 깊이 파괴하는 행위로도 보인다. 수많은 사진이 쌓인 변태 오두막은 사실 누군가를 저주하기 위해 온 사람들, 혹은 누군가의 저주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던져놓은 사진들이 쌓인 걸까? 쌓여있는 사진들 중 아는 얼굴을 발견한 고바야시가 들려준 이야기는 여러 사건이 얽혀 결과마저 상당히 참혹하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 다른 이의 자리를 탐낸 여자. 자신이 낳은 아이의 행동을 보며 자신 때문에 죽은 이가 자신을 저주해 아이로 태어나 자신을 괴롭힌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결국 여자는 자신의 아이를 방치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공포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자신의 죄악이나 내면의 어떤 균열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현실로 발현되는 것. 혹은 현실에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대면하며 비롯되는 것. 우리가 공포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서늘함은 단순히 보이지 않는 대상에의 두려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추악한 모습이나 과거의 죄업, 하다못해 아주 작은 죄책감이라도 품고 있을 것이기에.

이 책의 배경에는 로쿠부 살해 민담이 있다. 로쿠부란 로쿠주로쿠부(六十六部)라고도 불리는 수행승을 말한다. 예순여섯 군데 영험한 성지를 순례하며 예순여섯 번 필사한 법화경을 한 부씩 바치며 죽은 자가 극락에 갈 수 있도록 기도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대부분 도보로 이동했기 때문에 지쳐 쓰러지거나, 노상강도를 만나기도 하고, 목숨을 빼앗기는 일마저 있었다고 한다.
보름달이 뜬 어느 날 밤, 나그네 로쿠부가 작은 마을의 어느 집에 찾아가 하룻밤 묵게 해달라고 청했다. 가난하지만 친절한 부부는 소박한 식사를 대접하고 로쿠부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밤이 깊어졌을 무렵, 남편은 뒷간에 다녀오다 매듭이 풀린 로쿠부의 봇짐에 달빛이 비쳐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부부는 로쿠부를 죽이고 그 돈으로 장사를 시작해 재산을 모으고 아이도 두었다. 아이가 여섯 살을 맞이한 보름달이 뜬 밤, 남편은 소변이 마렵다는 아이를 데리고 뒷간으로 간다. 아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이유를 묻는 남편에게 아이는 말한다. "이런 밤이었지, 네가 날 죽인 건." 아이의 얼굴은 그날 밤 죽인 로쿠부의 얼굴과 똑같았다.
저자는 이 옛이야기 속 윤회 구조를 심령 명소에 얽힌 소문과 그것을 추적하는 세 명의 인물로 연결한다. 가해자가 자신의 과거와 새삼 마주하며 죄업을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소설 끝에 고바야시가 호조를 부추겨 이케다의 불안과 공포를 자극한 경위가 나온다. 한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몰고 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없이 죽음마저 그저 수단으로 삼는 추악함에 치가 떨린다. 이에 동조한 호조가 이케다에게 부적을 내미는 장면도 그저 위선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내면의 공포에 삼켜져 결국 유령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케다. 다행히 그가 저주했던 여성은 잘 살아있었고 동명이인의 사고 소식을 보고 오해했다는 해프닝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죽게 만든 여자의 유령과 마주한 고바야시와, 영문을 알 수 없는 전화를 받은 이케다. 그가 마지막에 받았던 전화의 내용은 이들 또한 저주의 굴레에 들어와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죄악과 저주를 품은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있는 걸까. 풍선처럼 부푼 머리를 이끌고 다음 차례를 찾아 떠도는 저주 받은 순례자의 다음 희생양은 누굴까. 모든 것은 돌고 돌아 결국 인간의 문제. 탐욕과 악의로 더럽혀진 순례길의 여정을 함께하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