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활인 상.하 - 전2권
박영규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삶을 위한 삶을 살아가리라.

 

『활인』 박영규 역사소설, 교유서가
- 무선 제본, 상/하 2권 구성

 

♥ 역사서 전문가가 집필한 역사 소설을 읽고 싶다면?
♥ 조선의 의술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했다면?
♥ '사람을 살리는 것'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다면?

 

  초등학교 때 도서관에 꽂혀 있던 『박영규의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무작정 뽑아들고 읽기 시작한 적이 있다. 이해하지 못하고 활자의 나열로만 인식한 채 책장을 넘겨야 하는 일도 부지기수였으나 나는 그 500쪽이 넘는 실록을 닷새 만에 완독했다. 하나는 분명했던 것 같다. 역사 속 삶의 궤적을 되짚어가는 것이 정말로 즐거운 일이라는 것. ‘나’라는 존재가 생겨나기 전의 세계를 두 눈으로 목도하는 일은 나의 현존을 증명함과 동시에 상상의 세계를 무한대로 넓혀나갔다. 

 

  역사서와 역사 소설을 통해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삶을 훑어나가다 보면 현재와 맞닿는 공명과 울림에 도달한다. 『활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먼저 가장 좋았던 부분은 승자의 기록이었던 역사 속에서 조명되지 못했던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어 쓰인 소설이라는 점. 무녀의 수양딸 소비와 아버지의 누명으로 노비가 된 노중례는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의술에 두각을 드러내어 많은 사람들을 도왔으며 임금의 눈에도 들게 된다. 소비와 노중례가 실존 인물이었고 의원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록에 두어 줄밖에 남지 않은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그들의 삶을 재구성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테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역사 속 인물에 대해서 쓰는 것보다 무게감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사가들이 이 작업을 해내야만 하는 것은… 앞으로 쓰일 역사를 위해서가 아닐까. 이는 ‘승자 중심의 역사’에서 ‘가치있는 것을 지킬 수 있는 역사’로의 이행 과정이다. 지금까지 만들어온 역사에서 앞으로 만들어나갈 역사를 찾아내는 일이다. 

 

  특히 좋았던 점은 『활인』 의 이야기가 조선의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며 쓰였다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조선은 여성이 활약할 수 없는 시대였다. 하지만 사회적 배경이 그러하다고 해서 그 시절의 모든 여성들이 마냥 수동적이고 소극적이기만 했을까? 그랬을 리가 없다. 제 꿈을 널리 펼치고 싶으나 그러지 못해 거듭 좌절했을 여성들이 조선에 얼마나 많았을까. 『활인』 에 등장하는 소헌왕후 심씨와 소비는 ‘여성도 인간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심씨는 세종이 왕이 되기 전부터 그에게 깨달음과 깨우침이 되어주었던 현명한 여성이었으며, 소비는 자신의 능력을 믿고 의술의 길을 걸어간 올곧은 여성이었다.

 

 "아까운 인재지요. 하지만 인재면 뭐하겠습니까? 이 나라 조선에서 여인이 재능이 뛰어나봐야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더구나 의술을 익혔으니, 기껏 천한 의녀로밖에 더 살겠습니까?"
"어허, 부인. 그것은 아니지요. 의녀가 비록 신분은 천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여인들 아니오. 또한 신분이 천하다고 해서 의술마저 천하게 여길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거야 대군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만, 세상인심이 어디 그렇습니까? 여자는 여자로 태어난 죄로 평생 남자 그늘에서 지내야 하는 것이 현실이고, 더구나 여인이 의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결코 태의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니, 그저 여자로 태어난 것이 죄인 것이지요." (상권 75쪽, 충녕 대군과 심씨의 대화)

 

 "그렇습니다. 유학이든 불교든 모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단지 어떻게 살릴 것인지 방법론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모두 같습니다. 세상에 나온 모든 학문과 경전은 사람 살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교에서는 사람보다 부처가 우선이지 않습니까? 부처라는 허울을 사람의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대군께서는 공자라는 허울을 백성의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십니까?"
그 물음에 충녕은 말문이 탁 막혔다.
"공자는 성인인데, 어찌 허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가까스로 그런 대답을 하긴 했지만 충녕은 딱히 그 대답에 자신이 없었다.
"물론 살아 있는 공자는 허울이 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죽은 공자는 허울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죽은 부처가 많은 사람들의 허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상권 146쪽, 충녕 대군과 심씨의 대화)

 

  2권에서 소비와 노중례는 자신의 원수를 살리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가문을 몰락시킨 원수가 눈앞에 있으나 의원은 환자를 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하는 법. 그렇게 원수를 치료하고 원수의 죽음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소비는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누군가가 죽기를 바란다는 것은 죽음의 늪에 함께 빠지는 일임'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 자신이 그 감정에 잠식당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 서포터즈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춘, 여름, 꿈의 무대 고시엔 - 100년 역사의 고교야구로 본 일본의 빛과 그림자
한성윤 지음 / 싱긋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고시엔'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 '일본 야구'와 문화, 전통, 사회의 관련성에 대해 알고 싶다면?
♡ '스포츠'에 관심이 많고 스포츠 관련 교양 지식을 쌓고 싶다면?

『청춘, 여름, 꿈의 무대 고시엔 - 100년 역사의 고교야구로 본 일본의 빛과 그림자』 한성윤 지음, 싱긋

♡ #싱긋 이 펴내는 책은 무언가를 열렬하게 애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지난 서포터즈 도서였던 『가구, 집을 갖추다』는 가구와 인테리어를 파고들어 숨겨져 있던 이야기를 풀어냈으며 삼월의 도서 『청춘, 여름, 꿈의 무대 고시엔』은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인 '고시엔'을 소재로 일본의 문화, 전통, 사회의 면면을 보여준다. 두 도서의 공통점은 모두 적당한 무게로 열렬한 애정과 사유를 충분히 표현해낸다는 점. 저자는 각 분야를 오래도록 파헤쳐 온 탐색자이다. 개인적으로 야구에 큰 관심이 없었음에도 이 책은 나름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야구 이야기뿐만 아니라 야구에 얽힌 세계의 수많은 지표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넓게 보는 법을 싱긋의 책들이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분야의 책을 만들더라도 넓은 세계를 알려 주는 책을 만들고프다는 소망이 자꾸만 커졌다. 야구 경기 시작 전 울리는 사이렌 소리처럼, '계속 만나고 싶은 꿈이었습니다.'라는 고시엔 캐치프레이즈처럼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무언가를 더욱 힘껏 사랑하고 싶어졌다.

# 그런데 청춘은 과연 무엇인가? 청춘이라는 단어는 중국의 음양오행에서 비롯되었다. 음양오행 사상의 다섯 개 요소에는 저마다 상징하는 색깔이 정해져 있는데, '목'은 '청'이다. 그리고 계절도 다섯 개로 구분되는데, '목'에 해당하는 계절은 '봄'이다. 그렇게 탄생한 단어가 바로 청춘이다. (18쪽)

♡ 일본 고교야구는 청춘의 드라마로 불렸다. 젊은이들이 힘을 짜내어 경기장을 달리고 '꿈의 무대'에 서는 모습은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해 젊음을 불사르는 열정처럼 보였다. 하지만 과연 그 모습이 전부일까? 우리는 그것을 마냥 '아름답다'고 이야기해도 괜찮은 것일까? 고교야구를 빌려 책이 이야기하는 청춘의 모습이 거듭되는 입시와 취업에 시달리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을 연상케 했다. 젊으니까 그만큼 열심히 해야 하고 젊으니까 조금 아파도 괜찮다는 것은 그런 모습이 오히려 박수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은 결코 청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것이 아니다.

# 실제 게이오기숙고등학교 야구부의 모리바야시 감독은 일본판 <허프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어른들이 마음대로 청춘 스토리를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어른들의 시선을 통해 고교야구는 이래야 한다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데 빡빡머리를 한 채 무조건 전력 질주를 하는 모습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겨도 눈물, 져도 눈물이라는 청춘의 이야기를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21쪽)

♡ 지금의 젊은이들이 바라는 것은 이겨도 눈물 흘리고 져도 눈물 흘리는 청춘이 아니라 하고픈 일하기 위해 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무언가를 열렬히 애정하고 좋아하는 것을 탐구하는 시간은 생에서 참으로 귀중하다. 그러나 젊음을 대가로 바쳐야만 노력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꿈의 무대'는 결코 불타는 청춘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 야구가 여전히 남성 중심의 스포츠이며 여자야구 환경이 열악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청춘은 결코 소년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 또한 덧붙이고 싶다.

# 그런데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그라운드에 오른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현실에선 퇴장이었다. 명목상으로는 등번호를 달지 않은 사람의 그라운드 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남자가 아닌 여자 매니저이기 때문에 제지당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187쪽)

# 일본 여자야구는 남자 프로야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다. 연봉부터 숙소나 연습 환경 모두 프로라기보다는 동호인에 가까운 수준이다. (192쪽)

※ 서포터즈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구, 집을 갖추다 - 리빙 인문학, 나만의 작은 문명
김지수 지음 / 싱긋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앤티크'와 '빈티지', '레트로', '클래식'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 '리빙', '인테리어', '가구', '홈카페', '공간' 등의 키워드에 관심이 있다면?

♥ 동서양의 역사적 상황이 '가구', '리빙'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 '삶의 공간'에 대한 적당한 무게의 사유를 찾고 싶다면? 


2. 적당한 무게의 사유 


이 책의 최대 장점은 통상 인간의 삶과 역사, 우리 곁의 실제 인물들과 '가구' 그리고 '공간'을 연결함으로써 평소 가구와 인테리어에 큰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과하게 학술적이지 않으나 그렇다고 가벼운 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적당한 무게, 적당한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삶에 맞닿은 가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책의 내용이 '가구'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가구를 표방하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저자는 '삶의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 사는 공간에 관심을 가지고 그 공간을 문화로 향유하며 살아가는 법을 인문학적으로 풀어나간다. 그를 통해 잘 알지 못했던 역사 속 진실을 만나고 최근 이슈가 되는 문화를 성찰할 수 있으며 미래의 라이프스타일을 상상해보게 된다. 저자가 '리빙 인문학'에 애정을 가지고 오랜 시간 고찰했음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책이었다. 


3. 노르웨이의 가구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과 동일 제목의 비틀스 노래 'Norwegian Wood(This Bird Has Flown)'의 'wood'가 숲인지 가구인지에 관해 논하는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wood'가 '숲'과 '가구'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는 데에서 시작된 번역 논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소설의 원제가 『ノルウェイの森』라는 점에서, (비록 오역 논란이 있었다 해도) 하루키의 소설 제목은 별개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직역을 하면 사실상 숲보다는 가구가 문맥상 맞는다. 집에 들어온 상태에서 '이거 멋지지 않니? 노르웨이의 숲이야.'라고 하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집의 창밖을 바라보며 이야기한 경우라면 모를까. 그런데 노래 가사도 일종의 시다. 그래서 은유가 있는 문학적 수사가 동원된다. 만약 이 여인이 숲의 정령이고, 주술을 부려서 남자가 몽환적 상태에 빠졌다면? 그 상태에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어떤 환영으로 집이기도 하고 숲이기도 한 공간에 인도되었다면? (91쪽) 


저자처럼 초현실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노르웨이산 목재 가구'가 있는 집을 '노르웨이의 숲'으로 은유하여 말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노르웨이산 목재 가구를 쓴다는 것은 어찌 보면 노르웨이의 숲을 집 안으로 들여온 것이 되지 않을까. 애초에 'wood'를 관통하는 숲과 목재는 일종의 유사성으로 묶인 존재들이므로, '노르웨이산 목재 가구'가 '노르웨이산 숲'이 되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까진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저자도 결국 'Norwegian Wood'를 '노르웨이의 숲'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른다. 나는 알고도 속는 셈 치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받았다 한들 서로 다른 작품이므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에 가깝지만….


- 상실의 시대 그러니까 노위전 우드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때로는 알고도 속는, 꿈보다 해몽이 좋은 상황을 즐기는 것이 실제보다 더 좋을 수 있다. (95쪽) 


4. 표현에 관하여 


책의 후반부에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 등장하는 집,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제인 버킨의 방 등 예술가들의 방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의 방을 다루면서 '맘스 데스크'와 같은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사람을 위한 일과 독서의 공간이 새로이 등장하게 됨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진정한 주거의 근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표면적으로는 과거 남성 중심의 서재 문화를 탈피하여 '자기만의 방'의 형태가 변화하고 있고 가족 구성원이 차별 없이 자신의 공간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 '주거의 근대화'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맘스 데스크'의 의미에서도 드러나듯 이러한 용어의 등장은 오히려 여성의 가사노동을 고착화하는 유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변화'로 명명하였다는 것 그리고 타인의 말을 인용해야만 그를 반박할 수 있다는 점이 다소 의아한 부분이었다. (287쪽 참조) 


-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즘의 고전이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다분히 페미니즘적 시각에서만 쓰인 것은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작가를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것을 경고하며, 성별을 떠나서 올곧은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작가라는 사람들의 현실적 환경에 성찰을 담아냈는데, 남녀 상관없이 작가도 일반 생활인이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며 집필에 몰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284쪽) 


다소 어색한 기분이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작가를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것을 경고하며 성별을 떠나서 올곧은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자기만의 방』을 페미니즘의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페미니즘은 불평등한(혹은 불평등했던) 성별적 결핍을 바로잡고자 하는 시각이지, 여성 편향적인 사유가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작가들이 돈과 자기만의 방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것은 '남자들은 와인을 마시고 여자들은 물을 마셨기 때문에, 한쪽 성은 그토록 번창하는데 다른 쪽 성은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이 픽션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것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한쪽 성의 안전과 번영과 또 다른 성의 가난과 불안정함' 속에서 결핍과 불합리를 느끼며 살았고, 그녀가 언급한 양쪽의 성이 차례대로 남성과 여성을 뜻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따라서 그녀는 불평등 속에서 가난했던 여성의 방을 말했다. 여성 작가들에게 방이 필요함을 말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성별이든' 모든 작가에게 창작을 위한 공간이 필요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그것이 페미니즘적 시각을 벗어난다고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 후에 에밀리 데이비스 양이 아주 인상적으로 입증했듯이, 19세기 초 중산층 가족은 오직 하나의 거실을 공유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까요? 만일 여성이 글을 썼다면 그녀는 공동의 방에서 써야만 했을 겁니다. 그리고 나이팅게일 양이 격렬하게 불만을 토로했듯이- "여성에게는 자기만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채 삼십 분도 되지 않는다" 여성은 언제나 방해를 받았지요. 그곳에서 시나 희곡을 쓰는 것보다는 산문과 픽션을 쓰는 것이 더 쉬웠을 겁니다. 집중력이 덜 요구되니까요. 제인 오스틴은 생애 마지막 날까지 그런 환경에서 글을 썼습니다. (버지니아 울프 作 『자기만의 방』에서 발췌) 


남성 저자의 글에서 여전히 안타까운 표현들이 발견되곤 한다. 위에.언급한 내용 이외에도 눈에 밟히는 부분이 두 군데 정도 있었다. 아쉬운 점이지만 여기 써야만 하는 이유는, 그런 점만 제외하면 이 책이 참 좋은 책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저자가 가구를, 인테리어를, 삶의 공간을, 인간이 만들어낸 이 작은 문명을 정말 사랑하고 있음을, 그래서 책을 써서 이 이야기를 세상에 내야만 했음을 느꼈다. 방대한 지식의 늪을 헤매며 사유를 정리하고자 했던 저자의 노력을 목격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다른 책에서는 이러한 아쉬움을 느끼지 않게 되길 바라며… 마음을 털어놓아 본다. 


※ 서포터즈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팍스 2 : 집으로 가는 길 팍스 2
사라 페니패커 지음, 존 클라센 그림, 김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다시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린 왕자》를 다시 읽으면 왕자가 이해하지 못했던 혹은 어릴 적의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어른들의 모습을 이제는 이해하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팍스》의 피터는 완고했고 어찌 보면 무모했으며 쉽게 공감하기 어려울 만큼 용감했다. 얼마 전 반려동물과 아버지를 모두 잃고 거의 혼자가 된 열세 살 어린아이라면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해 줄 곳을 찾기 마련일 텐데 그는 과거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깥으로 바깥으로 나아간다.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도전하길 좋아하지만 어른이 되었으므로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하지만 어쩌면 내가 선택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안전한 길을 택하곤 한다. 어쩐지 존재하는 내 주변의 울타리들이 오랫동안 견고하길 바라며 가끔은 어릴 적보다 더 보호받고 싶은 열망이 생기곤 한다. 문득 어린이였을 적의 나를 깨달으며 그 모습을 피터에 겹쳐 본다. 무모하고 자신의 힘을 믿었던 아이, 현재의 안온보다 오래된 추억과 가슴에 품은 사랑을 더 귀히 여겼던 아이. 자라나는 아이들은 그런가 보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피터의 용감한 다정을 안쓰러이 지켜볼 수밖에 없는가 보다. 이 책을 읽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감상을 듣고 싶다. 내가 잊어버린 어쩌면 잃어버린 어릴 적의 우정과 용기와 믿음을 현재의 아이들은 여전히 가지고 있기를, 그리고 그 소중한 성장의 감정들이 그다음 세대로 무사히 물림되기를 바란다. 


…어린 왕자가 영영 어린이로 남아야만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돌봄을 잃은 동물들에 대해 생각했다. 돌봄을 잃었다는 말은 곧 '이전에는 누군가에 의해서 돌보아졌음'을 함의하고 있다. 《팍스》에서 여우 팍스(Pax)는 구해졌고 돌보아졌고 결국 다시 버려졌음에도 인간의 사랑을 잊지 않았고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인간을 믿었다. 그런 믿음을 피터는 (일시적으로) 배반한다. 이것은 배반 외의 다른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우면서도 배반이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피터가 총을 챙기는 순간부터 나는 그를 조금씩 원망하게 되었는데 동시에 그 지점에 도달해서야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하기 시작하는 내가 왠지 우습기도 했다. (1권을 읽고 나서 2권을 읽었더라면 피터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을까) 


다행스럽게도 이 책의 제목은 《피터》가 아니라 《팍스》다. 팍스는 라틴어로 '평화'를 뜻하며 로마 신화에서 평화의 여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따라서 팍스는 피터에게 평온을 가져다주며 피터를 평화롭고 안온한 길으로 인도해주는 존재다. 그러나 주인을 끝까지 사랑하고 믿는 것은 인간에게 마음을 내어준 동물들의 특징적인 면모인 것을. 파괴하고 미워하고 버리고 버려지는 인간의 잔혹함과 피폐함 앞에서도 인간을 사랑한 동물들은 최후의 애정을 보여 준다. 《팍스》는 잔혹한 세계에도 끝내 사랑과 따스함을, 희망과 다정을 버리지 않는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동물의 눈으로 표현해낸다. 


3.


존 클라센의 여우 그림들이 좋았다. 여우보다도 더 여우같다고 이야기하면 여우들에게 실례가 될까? 하지만 그가 그린 여우들은 숲과 들판과 책과 사람에게 동화되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동물이었다. 그림은 흑백이었지만 그림 속 여우는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삽화가 섭외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동화.


※ 아르테 책수집가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치 네가 여우를 가지기라도 할 것처럼 얘기하네.
-저도 예전에 한 마리 키웠어요.
피터가 차분하게 말했다. 목구멍이 옥죄어 왔다. 두 손을 꽉 움켜잡았다. 진정되자 이어 말했다.
-그래도 제가 가졌던 건 아니에요. 그건 제대로 된 표현이 아니에요.
피터는 제대로 된 표현을 알았다. 사랑. 피터는 팍스를 사랑했고 팍스는 피터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말을 차마 내뱉지는 않았다.
-제가 길들였어요. - P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소호 지음 / 달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

나는 그를 꼭 시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감정에 사로잡힌다. 동시에 그를 시인이라고 불러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 속에서 헤맨다. 이소호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를 쓰는 사람이니 분명 시인인데 - 그렇지만 시인이라는 두 음절의 단어 속에 가두기엔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놀라운 사람. 그런 사람•••. 내가 '시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가 에세이이기 때문. 하지만 과연 이소호의 글에 장르를 매길 수 있을까? 장르로 그의 글을 가둘 수 있을까?

0.

시인 또한 이 작품을 '어떤 불행한 예술가가 한 땀 한 땀 손수 지은, 여러 사람에 대한 단 하나의 이야기이다. 거짓과 진실이 뒤섞여 독자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아주 불평등한 이야기'라고 묘사한다. 이 에세이가 픽션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저 '나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에세이에서 타자는 '허구처럼' 보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에세이에서 타자는 내가 바라본 '타인'으로 등장하고, 당신조차 모르는 당신의 모습이 내 이야기에서 샅샅이 토로된다. 그것은 에세이의 매력이자, 에세이의 위험한 면이다. •••위험한 것은 매력적이다.

0.

이소호는 진솔하고, 시적이다. 그리고 진솔해서 시적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녀의 현실적인 삶 깊은 곳에 가 닿았다가 순간 아주 예술적이고 아주 먹먹한 지점까지도 포용한다. 그녀의 에세이는 아름답지 않음을 아름답게 만든다. 투박하고 솔직하고 때론 엉망진창인 사랑 이야기는 실패담이어서 더 인간적이고 더 사랑스러우며 더 재미있다. 시인이 나와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던지라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이소호는 미지였고 놀라움이었고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수많은 것들이 새로웠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세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 적어도 이해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고 - 그녀의 글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전율하곤 했다.

『불온하고 불완전한 편지』가 그녀의 전시회였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녀의 스케치북이었다. 어쩌면 망작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실패한 그림들이 담긴 스케치북. 어찌 보면 초라하고 남루하다. 그런데 그 초라함과 남루함이 우습게도 아름답다. 그래서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나 보다. 그런 아름다움 탓에 우리가 사랑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일 테야.

99.

달 출판사의 에세이가 좋다. 나는 천부적으로 에세이 읽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인데 지금껏 접한 달 출판사의 에세이들은 모두 웃고 감동하며 편하게 읽었다. •••아무래도 나는 시인들의 산문을 좋아하나 보다. 유희경 시인의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도 인상적이었는데, 박준 시인의 『계절 산문』과 이병률 시인의 『혼자가 혼자에게』도 꼭 읽어 보아야겠다.

디자인 면에서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타이포나 삽입된 디자인 아트가 모던하고 독창적인 느낌인데다 배경에 쓰인 깔끔한 분홍색이 참 귀엽다. 내지에도 디자인 요소가 과하지 않게 배치되어 있어 좋았다. 소제목이 적힌 부분에 기하학적인 디자인 요소들이 다양하게 삽입되었는데, 《모두를 찢어 붙인 모자이크》에 모자이크 기법의 무언가를 본뜬 듯한 도형들이 들어가 있어서 각 챕터 내용을 반영해 디자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작품 후반부 《흑》과 《백》의 소제목 디자인이 특히 마음에 남았다.

※ 《망한 연애 조작단》 서평단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