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 집을 갖추다 - 리빙 인문학, 나만의 작은 문명
김지수 지음 / 싱긋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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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앤티크'와 '빈티지', '레트로', '클래식'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 '리빙', '인테리어', '가구', '홈카페', '공간' 등의 키워드에 관심이 있다면?

♥ 동서양의 역사적 상황이 '가구', '리빙'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 '삶의 공간'에 대한 적당한 무게의 사유를 찾고 싶다면? 


2. 적당한 무게의 사유 


이 책의 최대 장점은 통상 인간의 삶과 역사, 우리 곁의 실제 인물들과 '가구' 그리고 '공간'을 연결함으로써 평소 가구와 인테리어에 큰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과하게 학술적이지 않으나 그렇다고 가벼운 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적당한 무게, 적당한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삶에 맞닿은 가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책의 내용이 '가구'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가구를 표방하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저자는 '삶의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 사는 공간에 관심을 가지고 그 공간을 문화로 향유하며 살아가는 법을 인문학적으로 풀어나간다. 그를 통해 잘 알지 못했던 역사 속 진실을 만나고 최근 이슈가 되는 문화를 성찰할 수 있으며 미래의 라이프스타일을 상상해보게 된다. 저자가 '리빙 인문학'에 애정을 가지고 오랜 시간 고찰했음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책이었다. 


3. 노르웨이의 가구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과 동일 제목의 비틀스 노래 'Norwegian Wood(This Bird Has Flown)'의 'wood'가 숲인지 가구인지에 관해 논하는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wood'가 '숲'과 '가구'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는 데에서 시작된 번역 논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소설의 원제가 『ノルウェイの森』라는 점에서, (비록 오역 논란이 있었다 해도) 하루키의 소설 제목은 별개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직역을 하면 사실상 숲보다는 가구가 문맥상 맞는다. 집에 들어온 상태에서 '이거 멋지지 않니? 노르웨이의 숲이야.'라고 하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집의 창밖을 바라보며 이야기한 경우라면 모를까. 그런데 노래 가사도 일종의 시다. 그래서 은유가 있는 문학적 수사가 동원된다. 만약 이 여인이 숲의 정령이고, 주술을 부려서 남자가 몽환적 상태에 빠졌다면? 그 상태에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어떤 환영으로 집이기도 하고 숲이기도 한 공간에 인도되었다면? (91쪽) 


저자처럼 초현실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노르웨이산 목재 가구'가 있는 집을 '노르웨이의 숲'으로 은유하여 말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노르웨이산 목재 가구를 쓴다는 것은 어찌 보면 노르웨이의 숲을 집 안으로 들여온 것이 되지 않을까. 애초에 'wood'를 관통하는 숲과 목재는 일종의 유사성으로 묶인 존재들이므로, '노르웨이산 목재 가구'가 '노르웨이산 숲'이 되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까진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저자도 결국 'Norwegian Wood'를 '노르웨이의 숲'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른다. 나는 알고도 속는 셈 치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받았다 한들 서로 다른 작품이므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에 가깝지만….


- 상실의 시대 그러니까 노위전 우드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때로는 알고도 속는, 꿈보다 해몽이 좋은 상황을 즐기는 것이 실제보다 더 좋을 수 있다. (95쪽) 


4. 표현에 관하여 


책의 후반부에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 등장하는 집,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제인 버킨의 방 등 예술가들의 방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의 방을 다루면서 '맘스 데스크'와 같은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사람을 위한 일과 독서의 공간이 새로이 등장하게 됨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진정한 주거의 근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표면적으로는 과거 남성 중심의 서재 문화를 탈피하여 '자기만의 방'의 형태가 변화하고 있고 가족 구성원이 차별 없이 자신의 공간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 '주거의 근대화'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맘스 데스크'의 의미에서도 드러나듯 이러한 용어의 등장은 오히려 여성의 가사노동을 고착화하는 유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변화'로 명명하였다는 것 그리고 타인의 말을 인용해야만 그를 반박할 수 있다는 점이 다소 의아한 부분이었다. (287쪽 참조) 


-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즘의 고전이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다분히 페미니즘적 시각에서만 쓰인 것은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작가를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것을 경고하며, 성별을 떠나서 올곧은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작가라는 사람들의 현실적 환경에 성찰을 담아냈는데, 남녀 상관없이 작가도 일반 생활인이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며 집필에 몰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284쪽) 


다소 어색한 기분이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작가를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것을 경고하며 성별을 떠나서 올곧은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자기만의 방』을 페미니즘의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페미니즘은 불평등한(혹은 불평등했던) 성별적 결핍을 바로잡고자 하는 시각이지, 여성 편향적인 사유가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작가들이 돈과 자기만의 방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것은 '남자들은 와인을 마시고 여자들은 물을 마셨기 때문에, 한쪽 성은 그토록 번창하는데 다른 쪽 성은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이 픽션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것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한쪽 성의 안전과 번영과 또 다른 성의 가난과 불안정함' 속에서 결핍과 불합리를 느끼며 살았고, 그녀가 언급한 양쪽의 성이 차례대로 남성과 여성을 뜻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따라서 그녀는 불평등 속에서 가난했던 여성의 방을 말했다. 여성 작가들에게 방이 필요함을 말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성별이든' 모든 작가에게 창작을 위한 공간이 필요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그것이 페미니즘적 시각을 벗어난다고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 후에 에밀리 데이비스 양이 아주 인상적으로 입증했듯이, 19세기 초 중산층 가족은 오직 하나의 거실을 공유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까요? 만일 여성이 글을 썼다면 그녀는 공동의 방에서 써야만 했을 겁니다. 그리고 나이팅게일 양이 격렬하게 불만을 토로했듯이- "여성에게는 자기만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채 삼십 분도 되지 않는다" 여성은 언제나 방해를 받았지요. 그곳에서 시나 희곡을 쓰는 것보다는 산문과 픽션을 쓰는 것이 더 쉬웠을 겁니다. 집중력이 덜 요구되니까요. 제인 오스틴은 생애 마지막 날까지 그런 환경에서 글을 썼습니다. (버지니아 울프 作 『자기만의 방』에서 발췌) 


남성 저자의 글에서 여전히 안타까운 표현들이 발견되곤 한다. 위에.언급한 내용 이외에도 눈에 밟히는 부분이 두 군데 정도 있었다. 아쉬운 점이지만 여기 써야만 하는 이유는, 그런 점만 제외하면 이 책이 참 좋은 책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저자가 가구를, 인테리어를, 삶의 공간을, 인간이 만들어낸 이 작은 문명을 정말 사랑하고 있음을, 그래서 책을 써서 이 이야기를 세상에 내야만 했음을 느꼈다. 방대한 지식의 늪을 헤매며 사유를 정리하고자 했던 저자의 노력을 목격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다른 책에서는 이러한 아쉬움을 느끼지 않게 되길 바라며… 마음을 털어놓아 본다. 


※ 서포터즈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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