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
이경 지음 / 래빗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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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벼운 교감과 진득한 애착
인간 아닌 존재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



SF를 읽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금보다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행위다. 발달한 비인간 존재와 그런 비인간을 다양한 시각으로 수용하는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을 간접적으로 경험함으로써 그간 인지하지 못했던 인간의 본질을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러한 것’은 언제나 ‘그렇지 않은 것’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언제나 비인간성을 동반하고 비인간은 언제나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다. 떼려 해도 결코 뗄 수 없다. 자신 안의 타자, 그리고 내면의 비인간을 직시한 인간이야말로 인간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다. 같은 맥락으로, 작품에는 작가적인 모습이 있고 또 작가에겐 작품적인 면모가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경 작가가 꿈꾸는 ‘작품에 초과당하는 작가’란 은연히 SF라는 장르와 닮아 있다.

표제작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를 비롯하여 그녀의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은 AI 혹은 로봇을 포함한 비인간 그리고 인간 간의 공생을 다룬다. 이후 청예 작가의 소설 『라스트 젤리 샷』 리뷰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인간적인’ 사회화의 실패 또한 공생이자 공존의 한 맥락이다. 이해하지 못함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하나의 이해 방식이므로. 작품 속 가상 세계와, 그 세계를 매개로 새로이 알게 될 ‘인간(또는 비인간)’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진다.



샘플북에 실린 이경 작가 인터뷰에는 이런 답변이 있다.

”우리가 로봇을 위시한 ‘미래의 노동’에 투사하는 상상은 ‘영원히 젊은 외모와 신체 기능을 가졌으나 그 일만 100년 넘게 해온 노인처럼 숙련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나서서 지시하거나 배려할 필요 없이 힘들고 귀찮고 버거운 일을 척척 해주고, 육아처럼 까다롭고 복잡한 노동에 처해서도 모르는 게 없는데다 나를 친절히 지도해줄 능력도 있고, 그러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는 그런 ‘완벽한 노동자’요.“ _ 샘플북 16쪽

여기서 드러나듯, 이경 작가의 소설에는 생활밀착형 비인간들이 등장한다.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에는 비주얼 AI 기능을 탑재한 젖병 소독기가,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에는 ‘황새영아송영’이라는 영아 전용 교통편과 이동 중 영아를 맡아 돌봐 주는 전담 로봇이 있다. 최근 대두되는 AI 이슈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농담삼아 ‘인간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완벽한 샤워나 목욕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AI 같은 거나 개발됐으면 좋겠다’, ‘설거지 로봇은 왜 쉽게 상용화가 안 되는 걸까’ 같은 얘기를 나누곤 했는데 그런 우리의 희망사항들이 이경 작가의 소설에 다분히 반영돼 있어서 참 재미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AI라는 ‘타자와의 교감’에 대한 본질적 우려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의 형상을 한 친절하고 다정한 AI 친구에게 언젠가 진짜 오류가 생긴다면? 비주얼 AI의 모습으로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것이 업체 공지대로 ‘단순한 알고리즘 오류’가 아니면 어떡하지? 아기 세리는 언젠가 분유를 마시지 않을 나이로 자랄 테고 그럼 젖병 소독기는 필요하지 않게 될 텐데, 그때 우리의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와는 헤어져야 하는 걸까. AI와의 작별은 ‘인간’과 ‘인간’이 물리적 혹은 심적으로 멀어짐으로써 이별하는 것과는 분명 형태가 다를 것이다. 소멸이나 죽음에 가깝지만 되짚기도 추모하기도 어려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선공개된 단편 두 편에 등장하는 비인간들은 인간의 필요를 적당히 충족할 수 있게끔 정교히 제작되었다. 소설 속 비인간들은 쓸모의 영역에 상주하며 인간과 적당히 교감한다. 그러나 가벼운 교감이 반복되면 모르는 새 진득한 애착이 형성되곤 한다. 인간은 생각보다 너무 쉽게 사랑해버리는 존재다….

그래서 이경 작가가 쓸 장편소설이 궁금해진다. 가벼운 교감과 진득한 애착, 그 간극을 오가며 인간 아닌 존재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여정의 끝에 도달하게 될 가장 (비)인간적인 희극과 비극을 갈망하게 되기 마련이다. 불현듯 사랑을 왈칵 쏟아 버렸을 때, 끝내 젖지 않을 방법은 과연 존재할까.



❝사랑도 우비로 막을 수 있을까요.❞


🐰 래빗홀클럽 활동을 위해 래빗홀 출판사에서 키트를 제공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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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쳐 있는 - 실비아 플라스에서 리베카 솔닛까지, 미국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즘의 상상력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류경희 옮김 / 북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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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언제나 투쟁하며 사랑한다


페미니즘을 알게 된 이래로 내 세계에서 페미니스트란 언제나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서 정의되었던 대로,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즉, 인간 평등을 추구하는 이들을 칭하는 말이다. 페미니즘의 이름이 아직 '성평등주의' 따위가 아닌 '페미니즘'인 이유는 여전히 여성들이 약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회운동은 당연하게도, 약자의 이름을 하고 있다.


▶ 아직도 페미니즘을 믿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마치 페미니즘이 진실 반지나 애완용 돌이라도 되는 것처럼 묻는다니까요. _ 헬렌 레디, 『나라는 여자: 회고록』 (2005)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비단 믿음이나 사상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다. 섹스와 젠더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성별의 인간이 평등을 이루는 것을 바라고, 그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을 개인적 믿음의 영역에서 사적인 이데올로기를 구축하는 자들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이 글을 쓰기 전 고등학교 때 쓰던 블로그를 뒤적이다 2018년,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읽고 쓴 서평에 '속에 담은 것을 꺼내어 진실을 말하려면, 인간이 진정 인간성을 회복하려면, 성이 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을 위해 성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인간이 불의를 위해, 진실을 위해 화내는 것에 눈살 찌푸려서는 안 된다. 인간은 성낼 권리를 가진다.'라고 썼던 것을 발견했다. 그때도 완전히 명확하진 않았지만 알고 있었던 거다. 페미니스트는 평등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고, 그러므로 평등할 때까지 싸울 것이고, 그러므로 여전히 미쳐 있으며, 어쩌면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미쳐 있을 것임을.


▶ 여자로 태어났다는 게 끔찍한 비극이다. 수태된 순간부터 나는 가슴이 솟아오르고 페니스나 음낭 대신에 난소를 갖게 될 운명이었다. 내 모든 행동과 생각과 감정의 범위가 피할 길 없는 여성성에 의해 엄격하게 제약당할 운명이었다. 그래, 길거리의 패거리들, 선원들, 군인들, 술집 단골들 사이에 섞이고 싶다는 내 절실한 욕망, (…) 그 모든 욕망이 내가 소녀라는 사실, 늘 공격당하거나 두들겨 맞을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망쳐진다. 남자와 남자의 삶에 대한 내 절실한 호기심이, 빈번히도 그들을 유혹하려는 욕망이나 그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유인책으로 오해받는다. 오, 맙소사,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깊게,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건데. 확 트인 벌판에 나가 잠을 자고, 서부를 마음대로 여행하고, 밤에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_ 『여전히 미쳐 있는』 56쪽 中,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장


여성은 오랫동안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유를 잃어왔다. 표면적으로는 성별 상관없이 평등한 세상이 도래한 듯 보이지만, 어머니와 아버지 들은 여전히 딸에게 밤길 조심할 것, 너무 짧거나 살갗이 많이 드러나는 옷을 입지 말 것, 낯선 사람을 경계할 것을 당부하고 훈계를 새겨들은 딸들은 통금 시간을 지켜 귀가하고 여름에는 민소매와 반바지로 드러난 팔다리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는지 눈살 찌푸려야 하며 갑작스러운 습격에 대비한 호신용 물품을 지니곤 한다. 위험에 맞선 여성은 더욱 기민하게 자신을 보호해야 하며, 그러한 점에 기반해 어떤 꼰대들은 자세나 몸가짐, 심지어는 도덕성까지도 들먹이며 잘 모르는 여성들에게 잔소리를 퍼붓는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유로이 밤길을 걸으며 달을 구경하거나 홀로 멀리 여행을 떠나지 못한다.


▶ 앨릭스 컴퍼트가 개사한 가사 속에서 엄마는 딸에게 전국유색 인종연맹 시위 행진에 나가면 부디 조심하라면서 "그들이 너를 흔들고 굴려서 / 침대로 밀어넣을지 모르니까"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딸은 "핸드백 안에는 벽돌을, 속옷 안에는 가시철망을 넣는 식으로" 무장해서 자신의 순결을 지킬 생각이다. _ 『여전히 미쳐 있는』 143쪽 中


위험한 세계에 발을 들였다가 피해를 보게 되면 세간의 시선은 피해자에게로 쏠린다. 왜 조심하지 않아서, 가만히 있질 못해서 험한 꼴 당했느냐는 식으로 되려 피해자를 힐난한다. 사실 여성들은 정말 오랫동안 조심하면서 몸을 움츠려왔는데도. 세상이 정말 평등하다면 그럴 필요가 없어야 하는데, 우리는 참 오랫동안 그렇게 몸을 줄이고 줄여 왔다. '모든 행동과 생각과 감정의 범위가 피할 길 없는 여성성에 의해 엄격하게 제약'당해 왔다. 그것은 실비아 플라스가 살아가던 1950년대부터 사실이었으며, 내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2020년대에도 사실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본질은 남아 있다. 이 시대를 사는 여성은 도무지 그 사실을 잊을 수가 없다. 잊고 살 수가 없다. 잊을 만하면 삶의 곳곳에서 누군가 요구한다. 애교나 조신함, 무조건적인 모성과 같은, 해묵은 여성성과 여성다움을. 뻔한 이야기지만, 반복해 말하는 똑같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변화하려면 다시 한 번 쓸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직 자유롭지 않다고, 하지만 자유로워지기 위해 성내고 싸울 거라고.


나는 우리가 겪어온 과거의 차별을 미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학을 공부하면서 그 시대엔 작가도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라는 말을 듣는 게 제일 싫었다. 2년 전, 1950년대 한국 시인 전봉건의 시를 공부한 적이 있다. 그는 여성의 신체 부위와 속옷 등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으며 일종의 페티시즘 양상을 보이는 시를 썼다. 작품에서 여성은 유방을 드러내고 자신을 꽃이라 말하고 있었으며, 여성 이미지는 화자의 성적 욕망에 환상성과 극적 효과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이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든다. 나희덕은 연구에서 ‘실제로 전봉건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여자의 관능적 이미지는 환상을 통해 시인의 무의식적 욕망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환상 속의 ‘너’ 또는 ‘그녀’는 현실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모호한 감각적 인상에 의해 환기되는 존재다.’라고 말하며 전봉건 시 속 여성 이미지의 실제를 밝힌다.


하지만 어떤 학우들은 여성의 신체를 물화하는 남성 작가의 창작 양상에 대해서, 현대 관점으로 보았을 때는 논란이 될 수 있으나 작품이 1950년대에 쓰였음을 잊어서는 안 되며, 작가가 어떤 시대를 살아왔는지 고려해서 시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문학 작품을 해석할 때 시대상 및 작가의 삶을 고려해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전봉건이 여성을 사물화하는 시를 썼음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덜 평등한 세계에 살아가는 인간은 그만큼 평등할 권리도 잃는가? 사회가 평등을 찾지 못했다 해서 인간의 가치가 달라지며 차별이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1950년대 여성의 몸은 2020년대 여성의 몸과 다른 가치를 지니지 않으며, 전자가 후자보다 무가치하지도 않다. 2020년대 작가의 작품에도 여성의 가슴은 어김없이 사물화된 채 소환되고 여성의 신체 일부는 모성과 환상성 표현을 위해 수단이 된다. 여성의 몸을 알지 못한 채 여성의 생리현상을 제멋대로 서술하는 남성 작가도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도저히 현재의 차별을 작품성으로 미화하고 용인할 수 없다. 과거의 차별 또한 마찬가지다.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더불어 그 안에 존재했던 불평등 또한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전봉건이 여성을 사물화하는 시를 썼다면, 실비아 플라스는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던지고 갇혀 있던 여성들의 현실을 그리는 시를 썼다. 그녀는 "나는 꾸준히 일만 하는 일벌이 아니야 / 여러 해 동안 먼지만 먹고 살아왔어 / 내 빽빽한 털들로 접시를 닦아왔고."라고 쓰며 자신을 옥죄어왔던 공허한 가정생활에 대해 말한다.


▶ 이것이 바로 그녀를 거의 "질식시켰던" 가정생활이었다. 코트그린의 실제 먼지 속에서뿐만 아니라 그 집의 오랜 과거라는 비유적 먼지 속에서, 남편을 위해 가정을 꾸리고 그의 시를 대신 타이핑하고 그의 식사를 준비하고 그의 식기를 설거지하면서 들이마신 실제 먼지와 비유적인 먼지 속에서 그녀는 질식해갔다. 마침내 이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내게는 되찾아야 할 자아가 있어, 여왕벌처럼." _ 『여전히 미쳐 있는』 118쪽 中


▶ 살아 있는 인형, 너는 어디서나 본다.

그것은 바느질하고, 요리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말하고, 말하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잘 한다, 거기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

너는 구멍이 있다, 그것은 땜질한 것이다.

너는 눈이 있다, 그것은 그냥 환상이다.

내 아이야, 그것은 네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과 결혼, 결혼, 결혼하겠니. _ 실비아 플라스, <지원자(The Applicant)>(1966)


'지원자'에 등장하는 아내는 '살아 있는 인형'이자 '그것(it)'으로 칭해진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에서도 여성은 사물화되어 나타나지만,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성적 환상성을 충족시키는 존재로서 그려지지 않는다. 그녀의 시에서 여성은 무생물으로 표현되나 여전히 살아 있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아내들에 대한, 현실의 폭로다.


1950년대, 실비아 플라스가 살던 미국에는 여성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과 고정관념이 팽배해 있었다. 당시 널리 읽힌 『현대 여성: 잃어버린 성』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교육을 많이 받은 여성일수록 성 기능 장애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자녀에게까지 피해를 주게 되며, "결혼하지 않은 어머니는 (…) 여성으로서 완전히 실패한 사람이다." 신경증 환자가 결혼해 어머니가 되면 "거부" 또는 "지배"를 통해 비행청소년과 범죄자를 길러낸다. "과도한 애정"을 퍼부어 거세된 "겁쟁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와 같은 기능장애의 원인으로 손꼽히는 것이 여성의 "병적일 만큼 강렬한 자아 추구"였다. (『여전히 미쳐 있는』 69쪽 참조) 완전히 비과학적이며 근거 없는 낭설이라는 것을 이제는 많은 이들이 안다. 하지만 1950년대엔 그렇지 않았고 거짓이 오히려 정답이었으며, 여성은 그 속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작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며 성공한 여성이었던 실비아 플라스는 더욱 괴로워했고 고뇌했다. 그녀는 한 인간으로서의 삶, 작가로서의 삶, 아내로서의 삶, 어머니로서의 삶, 그 중 하나를 택하길 원치 않았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이라 믿었으나 세상은 그런 여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


2020년대, 아직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미덕이며 사회에 대한 이바지라 생각하는 이가 있다. 불과 몇 달 전에도 삶에 보탬이 되는 조언이랍시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고 - 어쩌면 그는 그의 입장대로 화가 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 그래서 『에이징 솔로』 리뷰에 썼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부정적인 선택이 아니며, 그리 말하고픈 것도 아니다. 홀로 사는 삶, 결혼해 아이를 낳지 않는 삶, 결혼해 아이를 낳는 삶, 동성 커플이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낳거나 혹은 입양해서 기르는 삶 등… 모두 인정받아야 할 한 개인의 인생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모두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권리를 끌어안고 태어났는데 왜 누군가는 편안히 생을 영위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숨막혀 질식하며 겨우 살아가야만 하는가. 다시 글의 초반부에서 이야기했던 페미니스트의 정의로 돌아가서, 본래 인간은 태어난 한 존엄성을 지니며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평등하지 않은' 순간을 맞닥뜨린다. 성별의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연령, 장애, 인종, 학력 등 인간을 구분하고 규정하는 많은 기준과 잣대에 따라서 어떤 이는 강자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약자가 된다. 벨 훅스의 말처럼 '페미니스트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존엄성과 인권은, 날 때부터 존재하는 것이지만, 언제나 일관적으로 존재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윌러드 부인은 버디를 에스더와 결혼시키려 애쓰면서, 에스더에게 쿠키를 자르고 굽는 1950년대의 가정주부가 되라고 권한다. "남자라는 존재는 뭐냐 하면 말이야, 미래를 향해 쏘아올리는 화살이란다." 윌러드 부인은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힌다. "그리고 여자라는 존재는 뭐냐 하면 말이야, 그 화살을 쏘는 발사대지." 그러나 에스더가 원하는 것은 그녀 스스로 미래를 향하는 화살이 되는 것이다. _ 『여전히 미쳐 있는』 242쪽 中


나는 발사대 없이도 미래를 향해 돌진할 수 있는 화살이 될 테야. 여성이건 남성이건, 꿈을 가진 자라면 그리 생각할 텐데. 2020년대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로 '쿠키를 자르고 굽는 1950년대의 가정주부 며느리'를 원하는 시부모가 존재한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많은 경우, '열린 사고'를 지닌 어른들이라 여겨진다. 과거의 당연함을 탈피하고 모두가 평등한 쪽으로 사고하게 됨이 ‘이상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게 두렵다. 여성이라면 집안일에 능통하고 요리를 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탓에 어릴 적부터 직접 요리하는 걸 원치 않았다. '시집 가서 남편 차려주려면, 제사상 차리려면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기성세대의 습관성 충고가 싫었고 그런 충고를 따르며 살고 싶지 않았다. 미래의 아이들에게 가부장제를 답습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산 사람이 죽어가는 세계가 이대로 존재해도 괜찮은가…. 성인이 된 후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야 겨우 밥을 하기 시작했고, 간단한 요리를 하면서 음식이란 나 자신을 배부르게 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당연한 것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참 당연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구나 생각했다.


여성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 대해 줄곧 생각해 왔다. 그리고 『여전히 미쳐 있는』을 읽고, 매드 라이팅 클럽을 통해 여성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극복과 성장을 다룬 글을 쓰면서 어렴풋이 깨달았다. 여성의 이야기를 할 때,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이야기가 그리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여성의 이야기는 곧 사람의 이야기이며, 그러므로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개인의 이야기를 모으고 모아 인류와 세계의 서사로 확장시키는 작업이다. 이는 비단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남성의 이야기는 다분히 권력적이며 아버지적이다. 이러한 남성 이미지의 활용은 수많은 남성들의 목소리 또한 지우고 있다. 현대의 어떤 차별과 혐오는 굉장히 중층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을 다중적으로 고립시킨다. 우리는 이따금 우리가 왜 고립되었는지도 모른 채 홀로가 된다. 때로는 타의에 의해 밀려나 버렸다는 사실조차 잊기 십상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 또한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것이 페미니즘이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유다.


미친 여자들은 필연적으로 미친 남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_ 『여전히 미쳐 있는』 500쪽 中


스물두 살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어맨다 고먼은 취임식 무대에서 빼어난 시를 낭송하면서, 그날과 같은 참사는 그냥 지나칠 수도 지나쳐서도 안 될 것이라고, 자신과 자신이 대표하는 세대는 후퇴할 수 없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왜냐하면 “우리는 겁을 집어먹었다고 해서 다시 뒤로 돌아가거나/가로막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동안 만나고 행진하고 발버둥치고 투쟁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온 페미니즘 활동가 모두 이 시인이 이런 시를 낭송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그 내용을 그대로 메아리치게 할 것이다. _ 『여전히 미쳐 있는』 500쪽 


✎°₊ 『여전히 미쳐 있는』 서포터즈 Mad Writing Club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서점 등록 서평은 2~5주차 리뷰를 모두 이용하여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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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곳에서 만나요
이유리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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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곁을 떠난 애정과 잔존하는 안온

그 사이에서 변함없이 반짝이는 삶의 궤적


『좋은 곳에서 만나요』

이유리 연작소설|안온북스 펴냄


여기에는 아는 사람의 이야기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 있었다.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은 이들이 모두 방식과 지속시간을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죽은 뒤의 상태를 유지한 채 산 자의 세계를 떠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죽기 전까지는 내가 아는 인간의 방식대로 삶을 영위했다는 것이었는데 그러므로 이 소설은 어떤 식으로 설명한다 한들 경계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정리해고를 당해도 빈들빈들 백수로 지냈어도, 퇴직금을 쪼개어 빌려 간 친구가 도망쳐 뭉칫돈을 날렸어도 내게는 그럭저럭 괜찮은 아버지였다. 항상 안방 침대를 차지하고 모로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으므로 인간보다는 차라리 식물, 식물 중에서도 이끼나 뭐 그런 선태식물류에 가까운 정도로 무해하고 조용했다. (중략) 나는 나대로 바쁘게 자라느라 집구석에 물건처럼 놓인 아버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술에 취하거나 부지런히 살림을 들어먹는 또래 아버지들과 달리, 나의 아버지는 항상 젠틀했고 원하는 것이라고는 적은 양의 음식과 텔레비전뿐이었으니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16-17쪽)’


이처럼, 경계에 존재하게끔 만드는 것은 비단 이 작품이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삶과 죽음은 의미 분위에서 배타적이고 상보 반의어의 관계에 있으나, 인간이 그것을 말할 때는 결코 양극단의 어떤 중간 없는 상태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을 따로 떼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칼로 물 베기와도 같은 일이다. <오리배>에서 서술자의 아버지는 집안에서 거의 죽은 듯이, 무생물처럼 살아 있다. 한 문단을 지나는 동안 아버지를 비유하는 대상은 식물에서 물건으로 이행한다. 그야말로 죽음에 가까운 삶이며, 그래서 결국 그는 죽음의 단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만 인간이 사는 방식은 그렇게 일률적이지도 않고 죽음이 찾아오는 방식은 때론 상당히 융통성이 없어서, 서술자의 경우 그의 아버지처럼 이미 죽어 있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보편이다. 죽음 내지 죽음의 위기는 언제 어디서 부닥쳐올지 모르게 우리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데다 인간은 언제나 뛰어난 순발력과 기타 모면 능력으로 그런 위기를 극복해내고 아무 일 없었단 듯이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초자연적인 생물이 아니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인간이 모종의 이유로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까지 생을 영위하던 터를 떠도는 것은 여타 판타지나 공포 장르 콘텐츠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인데, 그들이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한의 정서나 복수 등의 다소 거창해 보이는 목적의식과 연결 짓지 않았다는 데서, 그리고 그들의 혼이 부유하며 소멸하기까지의 과정은 아주 특별하거나 큰일과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다른 무엇도 아닌 애정에 기반해 있다는 데서 나는 결국 이 소설에 이유리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아는 사람의 이야기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 있다고 말한 것은, 이 연작소설집에 나오는 인물의 일부가 실제로 알고 지냈던 이들과 상당 부분 닮아 있는 순간들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따금 흠칫하고 절망하기도 하였으나 이야기들은 항상 안도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야 말아서, 책 속의 인물들과 또 실존했던 인물들에 대해서 그들이 어디에 있든 그저 안온하기를 바랐고 또 혹여나 그 일부가 이 땅에 여전히 남아 있다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더 편안히 사랑을 기억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날 수 있길 빌었다. ‘산 사람에게 있어 죽음이란 타인에게 일어나는 일이지 온전히 자신의 것은 아니므로, 시간이 오래 지나면 언젠가는 그것을 버릴 수도 있게 된다는 걸 나는 배워 알고 있기(48쪽)’ 때문에. 살아 있는 나는 지난 죽음을 영영 끌어안고 살지 않는다. 최소한, 살아 있는 상태를 택했고 그러한 선택을 일정 기간 지속하리라 믿는 현재는, 또 삶의 의지를 도무지 버리지 못할 지금은 발목을 붙들어 매는 어떤 것을 잠시 내려놓고 걸어가야만 할 때다. 


‘그날 밤, 내 좁은 침대에 혜수와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할 때에야 깨달았다. 왜 그 말이 불쾌하지 않았는지를. 비록 자기는 같은 것을 줄 수 없다고 못 박긴 했지만, 적어도 혜수는 내게 자기를 좋아하도록 허락해주었다. 그걸 이상하게도 나쁘게도 여기지 않고서. 그러자 갑자기, 아주 평화로운 무엇인가가 나를 부드럽게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149쪽)’ <세상의 끝>에서 혜수는 자주 죽고 싶어한다. 그런 그녀가,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힘을 주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다만 곱씹다 보니, 혜수가 가졌던 삶에 대한 무심함 같은 것도 이 세계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만 할 일종의 성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아직도 사랑하는 걸 허락받아야 한다고 여겨지는 세상이다. 그러니까 사랑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사랑에 대한 견제조차도 일순간에 전부 사라질 수 있기에, 그 유한함을 인지하고 존재하는 대로 흘러가도록 놓아두는 쪽이 자연스럽다는 걸 잊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정말로 중요하고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누구를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과연 사랑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인데도.


‘나도 엉겁결에 팔을 뻗어 혜수의 좁은 어깨를 안았다. 혜수의 어깻죽지에서 아주 옅은 해당화 향기가 났다. 나는 코를 깊게 박은 채 그 향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문득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 절벽, 이곳이 세상의 끝은 아닐까. 우리가 세상의 끝에 다다른 거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 온 사위가 밝아지며 점점 빛 속으로 잠겨 들고 있는 이곳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면 어딜까.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이곳이. (157쪽)’ 그래서 비극으로 시작했는데도, 죽음 후의 이야기인데도 당신들은 아름답다. 과연 그들은, 사랑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꼭 아홉 생을 살고 그 영이 소멸한다는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아홉 번의 생>에서 아홉 생을 살아가는 고양이의 이야기를 다뤄 주어 반가웠다. 죽은 뒤 일종의 혼백 형태로 이 땅에 머물다 제 이야기가 종결되면 사라지는 인간과는 달리, 고양이는 죽은 뒤 또다른 고양이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식으로 존재했다. 즉, 인간은 이전 삶의 기억을 가진 채로 전생 또는 환생을 할 수 없는 생물임을 못 박아둔 것이다. 하지만 고양이를 여러 생을 기억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라 말하기는 어려우며, 개체에 따라 이전 삶을 기억하지 못하는 식물도, 기억하는 식물도 있었으므로 사실 모든 인간이 전생의 궤적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것은 다소 조급하다. 하지만 작품을 읽으며 아스라이 추측하길, 인간은 그러지 않게끔 살고 죽는 방향으로 진화하지 않았을까. 


‘다시는 그 애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움은 아니었다.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설령 내 사랑을 비웃고 무시하더라도 나는 그 애를 미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단지 부끄럽고 가슴이 아팠다. 먼지투성이 소파 밑에 웅크려 끊임없이 자책했다. 내가 좀더 멋진 말을 할 줄 알았더라면. 좀더 부드러운 털결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더라면. 좋은 선물을 더 많이 가져다주었더라면. 그랬다면 그 애의 마음과 생각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내게 머물렀을 테고 결국에는 뭔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 내가 고양이가 아니라 선인장, 그 애와 같은 선인장이었다면. 우리는 뿌리를 얽고 물을 나눌 수도 있지 않았을까. (178~179쪽)’ 이렇게, <아홉 번의 생>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양이의 다정함을 닮았다. 고양이가 발자국으로 덧그리는 애정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인간은 고양이마저 사랑하고 또 그 고양이가 사랑하는 식물까지도 사랑하여 양쪽 모두 품으로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의탁하여 삶을 이어나가며, 그런 마음이 없어진다면 오랜 시간이 흐르고서 결국 <오리배>의 아버지처럼 겉으로 보기엔 아주 무해해 보이지만 선태식물에서 무생물이 되어 덩그러니 남겨진, 영혼이 퇴색된 하나의 개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될 것이 아닌가.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살아 있는 상태로만은 설명할 수 없으므로 아무래도 태어나 삶을 살고 죽음을 경험하며 그럼으로써 존재를 종결하는, 그 일련의 과정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좋은 곳에서 만나요』의 서술자로서 등장하는 죽은 이들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삶을 이어가며, 얄팍하지만 그만큼 소중한 애정을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는데다 그렇게 차츰 누군가에게 의도적 흔적 아닌 자연스러운 느낌을 남기고 또 궁극적으론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에게 기억된다. 곁을 떠난 애정과 잔존하는 안온 사이에서, 변함없이 반짝이는 삶의 궤적을 서서히 그려 나가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영영 기억되길 바라진 않지만, 바람 탓이라 돌릴 수 있을 만큼 잘고 엷게 물결을 일으키는 정도의 행위로써 나 아직 여기 있다는 신호를 보내면서 누군가를 기억하려는 애정 어린 의지를 남긴다…. <이 세계의 개발자>에서 신이 말하듯, 인간이란 정말, ‘길지 않은 삶을 살면서 그렇게들 끈질기게 사랑하고 또 사랑(289쪽)’한다.


✎°₊ 『좋은 곳에서 만나요』 서평단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인용 본문 쪽수를 기재한 부분을 제외한 모든 글과 카피는 직접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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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레이철 워프 시리즈 5
팻 머피 지음, 유소영 옮김 / 허블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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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무 편의 단편 모두 즐겁게 읽었지만, 계속해서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두 번째 실린 <채소 마누라>였다. 원제가 <His Vegetable Wife>인 이 작품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진 사회, 씨앗을 재배해 묘목을 기름으로써 아내 또는 연인을 얻을 수 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야기의 표면적 주체로 그려지는 남성 각진 턱과 뻣뻣한 갈색 머리카락, 뭉툭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손가락을 지닌 남자혼자 사는 것을 좋아했지만, 남자라면 자고로 마누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섬세한 묘목인 채소 처녀나 채소 신부를 피하고 어떤 환경에서도 번창하는 능력으로 잘 알려진채소 마누라를 골라 심는다. 핀의 손에서 길러진 채소 마누라는 그의 가족이자 성적 욕망 해소의 대상이 되며, 그는 여느 남자가 채소 마누라를 관리하듯, 자기 집으로 데려온 야생동물을 관리하듯 그녀를 관리한다. 연인이자 아내로 삼게 되는 대상이 수동성을 지닌 식물이라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채소 마누라가 인간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자아와 의지를 가진 생물이라는 점,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주체로 그려지는) 남성은 채소 마누라를 식물과 같은 위치에 있는 수동적이고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객체로 간주한다는 점이 너무나 끔찍해서 묘사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그는 아내를 회초리로 쳤다. 화냥년, 창녀, 더러운 매춘부라고 불렀다. 벌겋게 부은 등에서 수액이 흘러내렸지만, 그녀의 눈은 말라 있었다. 맞서 싸우지 않았다. 그 수동성이 화를 더욱 돋우었다.’ 핀은 자신에게 복종하는 아내를 원했으므로 채소 마누라를 골랐다. 그러나 막상 아내가 타인의 시선 앞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아 폭력을 행사한다. 아내의 품종을 골라 씨앗을 심고 식물로 길러내는 모습 자체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지만, 한편으론 지극히 현실적이고 쉽게 상상되는 장면이었기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채소 마누라들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이 작품이 마음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이야기의 결말 탓이었다. 채소 마누라는 분명 식물이었으나 동물-식물의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녀는 인간이었지만 식물이었고, 식물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이었다. ‘그녀는 그의 주머니를 뒤져 잭나이프를 찾아냈다. 그 칼로 자신의 몸을 묶은 밧줄을 잘랐다. 밧줄에 계속 쓸린 발목 피부에는 단단한 흉터가 생겨 있었다.’ (작은따옴표 안의 문장들은 소설 본문에서 인용한 것.)

 

. 과학적 치밀함보다는 환상성이 극대화되어 SF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느꼈던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팻 머피의 단편이 관통하는 메시지는 한결같았다.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기지의 체험을 결합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자유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끔찍하고 잔혹한 현실의 고통을 이야기하면서도 진짜 옳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지향해야 할 미래세계는 어떤 모습인지 아스라이 비춘다. <숲속의 여자들>이나 <진흙의 악마>에서도 여성들은 외부의 억압 아래 힘겨워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 미지가 남아 있었다. ‘알고 있던익숙한 권위 체계 앞에서도 아직 다가오지 않은, ‘알 수 없는미래가 남아있음을 그들은 안다팻 머피의 소설은 알 수 없는 존재를 파괴하거나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인정한다. 그러나 결국 파괴의 주체가 파멸하거나 미지의 타자가 가진 힘을 인정해버리는 상황이 펼쳐지면서, 소설은 독자가 가진 어떤 미지의 부분조차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혹은 자유로운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럼으로써 이야기들은 과학이 지닌 환상성을 바탕으로 의미화되는 것이다.

 

. 장편이 다른 우주로 이어지는 통로라면, 단편은 다른 세상의 조각을 엿볼 수 있는 창문이다. (케이트 윌헬름의 서문에서)


- 동아시아 서포터즈 7기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리뷰는 개인의 주관적 시각에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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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최후의 심판 + 두 개의 세계 + 삼사라 + 제니의 역 + 발세자르는 이 배에 올랐다
한이솔 외 지음 / 허블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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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필요성·만듦새:


허블의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을 통해 매년 새로운 SF 소설가들을 만난다. 사실 어떤 문학상이나 작가상의 수상작품집으로 작품을 접하는 것을 그리 선호하는 편은 아닌데, 수상작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 작품들은 쉽게 그 대회의 결을 파악하는 매개로 쓰이곤 하기 때문이다. 문학과 사회의 트렌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기도 하나, 작품 자체를 오롯이 감상하는 데는 방해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한과상 수상작'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고서 작품을 읽기 시작하게 되니까. 그러나 SF 장르의 특수성을 곱씹어보면 이처럼 신예 작가들의 작품을 정기적으로 모아 읽을 수 있게끔 해 주는 시스템이 어느 정도 필수불가결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아직 SF에 벽을 느끼는 소설 독자들이 존재하고, 한과상 수상작품집에는 트렌드와 시대를 공통적으로 관통하고 있으나 결이 다른 작품들이 쉽게 모인다. 결이 다른 작품들의 모임은 곧 장르의 확장 가능성을 키우고, 장르가 넓어진 만큼 독자들이 제 취향의 SF 작품을 찾기 쉬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집은 한국 SF 장르의 가능성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만듦새는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앞표지의 밀려오는 파도 이미지와 뒤표지의 '미래의 바다를 가로지르며 탄생하는 신예 작가들의 찬란한 물결'이라는 문구가 잘 어울린다. 다만, 본문 편집과 글꼴에 대해서는 아직 약간의 고민이 남아 있다. 다른 허블 도서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편지나 유서, 혹은 시스템 음성 등을 표기하는 서체가 본문에 쓰인 명조체와 다소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튀는 듯한 느낌이 있다. <최후의 심판> 유서 부분에는 꾸밈이 들어간 굵은 서체가 한 페이지 넘게 사용되곤 했는데, 가독성이 살짝 떨어지는 느낌이 없잖았다. (그리고 너무 여러 종류의 글꼴을 사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도 있었다.) 책을 만들 때 본문 글꼴과 글자 크기, 자간과 장평 고민을 정말 오래 하는데, 그래서인지 독자로서 책을 읽을 때도 항상 무엇이 최선일지, 무엇이 우선시되어야 할지 한참 생각하게 된다.


끝과 시작은 모두 인간에게서:

 

이번 중단편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인공지능'이었다. 생성형 인공지능과 관련된 이슈가 사회 안팎을 뒤흔들고 있는 현시점과 가장 맞닿아 있는 소설들이라 할 수 있겠다. ‘인공지능이라는 개념과 존재 자체에 대해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작품은 대상작 <최후의 심판>이었다. 인공지능 판사 솔로 3.0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인간보다 공정하다고 생각되었으며 인간보다 '다루기 편했다'. 솔로 3.0은 크고 작은 재판에 지속적으로 사용되다가 2048년 한 재판에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증거가 명백한 사건에서 증거불충분으로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오류가 자명해서 예외적으로 재판을 중지하고 인간 판사가 다시 판결을 내리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2049년 솔로 3.0은 많은 관심이 쏠렸던 한 연쇄살인 재판에서 더욱 결정적인 오심을 내린다. 오판이 두 번 발생하자 정부는 솔로 3.0을 법정에 세운다. 판결의 법적 결함을 문제삼아 판사를 기소하는 기이한 재판이었으나 사법부와 대중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의 법정에서 인공지능이 스스로를 변호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역시 완벽하지 않은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진 완벽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은 스스로 완벽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결코 완벽해질 수 없다는 부정불가능한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 완벽하지 못한 기계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면 그 자체로 인간이지만 기계는 완벽하지 못하면 불량품이 되고 결국 기계일 수 없으며 엇나간 존재가 된다. 그러니 책임질 주체는 끝까지 인간이어야만 한다. '인공'지능이 인공'지능'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체계를 시작한 것은 인간이므로 시작도 끝도 모두 인간일 것.

 

<최후의 심판>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오랫동안 내가 두려워하던 미래세계와 이제 막 인공지능이 등장한 현재 사이의 어떤 지점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GPT와 같은 인공지능은 아직 인간의 자리를 대리하기엔 한참 부족하다. 국제도서전에서 생성형 인공지능에 대한 현직 소설가들의 입장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작가들도 지금의 인공지능을 생업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작업의 범위가 제한적이며 인간이 던지는 질문이나 주문이 조금만 달라져도 부정확한 답변을 도출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과 관련된 논란거리가 수많지만 그러한 문제들은 '아직' 인간의 본질을 정도로 고차원적인 형태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진짜 두려워했던 건 인공지능이 '인공지능'이란 이름으로 불리우는 게 우스울 정도로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나 인간의 역할을 앗아가는 건 둘째치고, 과연 무엇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진짜 인간이라는 개념이 더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될 나 자신이 두려웠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라 글 쓰는 사람이기에 인공지능이 가질 따스한 마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껏 상상 속에서 그려왔던 적절히 안온하고 다정한, 공감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인공지능과 함께 사는 미래가 어쩌면 전부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너무나 쉽게 닿는다. 별다른 힘이 없어 보이는 초기단계의 생성형 인공지능조차도 인간의 이기심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다. ‘지능이라기보다는 편리한 도구인데 그런데도 인간은 그 지능에게 책임을 묻는다. 책임이란 무엇인지 아직 배우지 못한 인공지능은 그 무엇도 답해줄 수 없는데. 그래서 <두 개의 세계>가 그리는 미래의 모습에 눈물이 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라져가면서도 동시에 영영 남아있게 되는팬데믹 현상이 이기적 인간의 최후를 말하는 것 같았다. 인간은 원치 않는 형태로 이 세계를 책임지게 되면서도,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살던 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간다.


ⅰ. 작품을 읽는 내내 구병모의 『한 스푼의 시간』과 이현의 『로봇의 별』을 떠올렸다. 내가 두려워하면서도 꿈꿨던 세상을 그렸던가. 다시 꺼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ⅱ. 나는 웃으면서, 만약 그런 때가 오면 전원을 꺼버리면 된다고 답했다. 인공지능은 충분히, 아니 인간 이상으로 영리하며 바로 그렇기에 '최후의 전쟁' 따위는 벌이지 않을 거라고. 공존하거나 적절히 위험을 관리하면 될 뿐, 인공지능이 왜 용을 써서 인류와 스스로를 파멸시킬 대전쟁을 벌이겠느냐고 말했다. _23~24쪽, <최후의 심판> 中

ⅲ. 날로 호의적으로만 받아들여지던 인공지능 재판의 잠재적 문제점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어요. '사고' 원인에 관한 여러 추측이 돌았지만, 만약 오작동이었다고 한다면 치명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49년에, 인공지능 판사는 역시 많은 관심이 쏠렸던 한 연쇄살인 사재판에서 더욱 결정적인 오심을 내립니다. 이를 기점으로 더 이상 여론도 인공지능의 편이 아니었어요. _29쪽, <최후의 심판> 中

ⅳ. 솔로몬: (3초간 무응답) 나의 이름은 솔로몬입니다. 그러나 재판에 피고로서 참여하는 법인격으로서 솔로 3.0이라는 호칭을 인정하라는 의미인 경우 이에 수긍합니다. _35쪽, <최후의 심판>

ⅴ. 솔로몬: 인간이 내게 부여한 직능의 제1조건은 법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법에 근거해서 판결하는 게 나의 직무입니다. 법에 따라 내가 내린 판결로 인간이 어떤 해를 입는다면, 그건 그런 법체계를 만들어 낸 인간의 잘못이지 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_47쪽, <최후의 심판> 中

ⅵ. 세민은 돔에서 떠나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도망쳐 온 자에게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것은. 그것은 도망친 자에게 내려진 저주이자 형벌이니까. 지독한 저주처럼, 무거운 형벌처럼 돔은 세민을 붙들고 있었다. _101쪽, <두 개의 세계> 中

ⅶ. "사실 그랬으면 안 됐는데. 얼굴을 알게 되고, 목소리를 알게 되고, 서로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서로의 기억을 갖게 되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대가가 크다는 건 분명 알고 있었는데도 우리는 서로를 외면할 수 없었어요. 외롭고 두려웠으니까." _123쪽, <두 개의 세계> 中

ⅷ. "아니면 그들 모두가 깨달음을 얻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게 된 거지. 깨달음을 얻은 영혼은 이제 더는 새로운 육체에서 태어나 고통스러운 인생을 반복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 그랬는지도 몰라. 오랫동안 우주를 유영하며 인간들은 모두 깨달음을 얻은 거야." _183~184쪽, <삼사라> 中

ⅸ. 내가 찾아간 첫 번째 집에서 제니는 사망신고서를 쓰고 있었다. 이 집의 이주 여성은 한국말은 할 줄 알지만 읽고 쓰는 건 못해 제니가 대신 사망신고서를 작성했다. _203쪽, <제니의 역> 中

ⅹ. 이제 아침이 와. 하늘은 변한 것이 없지만 시계는 계속 변하고 있어. _244쪽, <발세자르는 이 배에 올랐다> 中


- 동아시아 서포터즈 7기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리뷰는 개인의 주관적 시각에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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