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레이철 워프 시리즈 5
팻 머피 지음, 유소영 옮김 / 허블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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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스무 편의 단편 모두 즐겁게 읽었지만, 계속해서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두 번째 실린 <채소 마누라>였다. 원제가 <His Vegetable Wife>인 이 작품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진 사회, 씨앗을 재배해 묘목을 기름으로써 아내 또는 연인을 얻을 수 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야기의 표면적 주체로 그려지는 남성 각진 턱과 뻣뻣한 갈색 머리카락, 뭉툭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손가락을 지닌 남자혼자 사는 것을 좋아했지만, 남자라면 자고로 마누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섬세한 묘목인 채소 처녀나 채소 신부를 피하고 어떤 환경에서도 번창하는 능력으로 잘 알려진채소 마누라를 골라 심는다. 핀의 손에서 길러진 채소 마누라는 그의 가족이자 성적 욕망 해소의 대상이 되며, 그는 여느 남자가 채소 마누라를 관리하듯, 자기 집으로 데려온 야생동물을 관리하듯 그녀를 관리한다. 연인이자 아내로 삼게 되는 대상이 수동성을 지닌 식물이라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채소 마누라가 인간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자아와 의지를 가진 생물이라는 점,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주체로 그려지는) 남성은 채소 마누라를 식물과 같은 위치에 있는 수동적이고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객체로 간주한다는 점이 너무나 끔찍해서 묘사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그는 아내를 회초리로 쳤다. 화냥년, 창녀, 더러운 매춘부라고 불렀다. 벌겋게 부은 등에서 수액이 흘러내렸지만, 그녀의 눈은 말라 있었다. 맞서 싸우지 않았다. 그 수동성이 화를 더욱 돋우었다.’ 핀은 자신에게 복종하는 아내를 원했으므로 채소 마누라를 골랐다. 그러나 막상 아내가 타인의 시선 앞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아 폭력을 행사한다. 아내의 품종을 골라 씨앗을 심고 식물로 길러내는 모습 자체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지만, 한편으론 지극히 현실적이고 쉽게 상상되는 장면이었기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채소 마누라들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이 작품이 마음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이야기의 결말 탓이었다. 채소 마누라는 분명 식물이었으나 동물-식물의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녀는 인간이었지만 식물이었고, 식물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이었다. ‘그녀는 그의 주머니를 뒤져 잭나이프를 찾아냈다. 그 칼로 자신의 몸을 묶은 밧줄을 잘랐다. 밧줄에 계속 쓸린 발목 피부에는 단단한 흉터가 생겨 있었다.’ (작은따옴표 안의 문장들은 소설 본문에서 인용한 것.)

 

. 과학적 치밀함보다는 환상성이 극대화되어 SF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느꼈던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팻 머피의 단편이 관통하는 메시지는 한결같았다.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기지의 체험을 결합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자유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끔찍하고 잔혹한 현실의 고통을 이야기하면서도 진짜 옳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지향해야 할 미래세계는 어떤 모습인지 아스라이 비춘다. <숲속의 여자들>이나 <진흙의 악마>에서도 여성들은 외부의 억압 아래 힘겨워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 미지가 남아 있었다. ‘알고 있던익숙한 권위 체계 앞에서도 아직 다가오지 않은, ‘알 수 없는미래가 남아있음을 그들은 안다팻 머피의 소설은 알 수 없는 존재를 파괴하거나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인정한다. 그러나 결국 파괴의 주체가 파멸하거나 미지의 타자가 가진 힘을 인정해버리는 상황이 펼쳐지면서, 소설은 독자가 가진 어떤 미지의 부분조차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혹은 자유로운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럼으로써 이야기들은 과학이 지닌 환상성을 바탕으로 의미화되는 것이다.

 

. 장편이 다른 우주로 이어지는 통로라면, 단편은 다른 세상의 조각을 엿볼 수 있는 창문이다. (케이트 윌헬름의 서문에서)


- 동아시아 서포터즈 7기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리뷰는 개인의 주관적 시각에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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