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최후의 심판 + 두 개의 세계 + 삼사라 + 제니의 역 + 발세자르는 이 배에 올랐다
한이솔 외 지음 / 허블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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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필요성·만듦새:


허블의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을 통해 매년 새로운 SF 소설가들을 만난다. 사실 어떤 문학상이나 작가상의 수상작품집으로 작품을 접하는 것을 그리 선호하는 편은 아닌데, 수상작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 작품들은 쉽게 그 대회의 결을 파악하는 매개로 쓰이곤 하기 때문이다. 문학과 사회의 트렌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기도 하나, 작품 자체를 오롯이 감상하는 데는 방해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한과상 수상작'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고서 작품을 읽기 시작하게 되니까. 그러나 SF 장르의 특수성을 곱씹어보면 이처럼 신예 작가들의 작품을 정기적으로 모아 읽을 수 있게끔 해 주는 시스템이 어느 정도 필수불가결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아직 SF에 벽을 느끼는 소설 독자들이 존재하고, 한과상 수상작품집에는 트렌드와 시대를 공통적으로 관통하고 있으나 결이 다른 작품들이 쉽게 모인다. 결이 다른 작품들의 모임은 곧 장르의 확장 가능성을 키우고, 장르가 넓어진 만큼 독자들이 제 취향의 SF 작품을 찾기 쉬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집은 한국 SF 장르의 가능성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만듦새는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앞표지의 밀려오는 파도 이미지와 뒤표지의 '미래의 바다를 가로지르며 탄생하는 신예 작가들의 찬란한 물결'이라는 문구가 잘 어울린다. 다만, 본문 편집과 글꼴에 대해서는 아직 약간의 고민이 남아 있다. 다른 허블 도서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편지나 유서, 혹은 시스템 음성 등을 표기하는 서체가 본문에 쓰인 명조체와 다소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튀는 듯한 느낌이 있다. <최후의 심판> 유서 부분에는 꾸밈이 들어간 굵은 서체가 한 페이지 넘게 사용되곤 했는데, 가독성이 살짝 떨어지는 느낌이 없잖았다. (그리고 너무 여러 종류의 글꼴을 사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도 있었다.) 책을 만들 때 본문 글꼴과 글자 크기, 자간과 장평 고민을 정말 오래 하는데, 그래서인지 독자로서 책을 읽을 때도 항상 무엇이 최선일지, 무엇이 우선시되어야 할지 한참 생각하게 된다.


끝과 시작은 모두 인간에게서:

 

이번 중단편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인공지능'이었다. 생성형 인공지능과 관련된 이슈가 사회 안팎을 뒤흔들고 있는 현시점과 가장 맞닿아 있는 소설들이라 할 수 있겠다. ‘인공지능이라는 개념과 존재 자체에 대해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작품은 대상작 <최후의 심판>이었다. 인공지능 판사 솔로 3.0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인간보다 공정하다고 생각되었으며 인간보다 '다루기 편했다'. 솔로 3.0은 크고 작은 재판에 지속적으로 사용되다가 2048년 한 재판에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증거가 명백한 사건에서 증거불충분으로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오류가 자명해서 예외적으로 재판을 중지하고 인간 판사가 다시 판결을 내리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2049년 솔로 3.0은 많은 관심이 쏠렸던 한 연쇄살인 재판에서 더욱 결정적인 오심을 내린다. 오판이 두 번 발생하자 정부는 솔로 3.0을 법정에 세운다. 판결의 법적 결함을 문제삼아 판사를 기소하는 기이한 재판이었으나 사법부와 대중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의 법정에서 인공지능이 스스로를 변호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역시 완벽하지 않은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진 완벽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은 스스로 완벽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결코 완벽해질 수 없다는 부정불가능한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 완벽하지 못한 기계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면 그 자체로 인간이지만 기계는 완벽하지 못하면 불량품이 되고 결국 기계일 수 없으며 엇나간 존재가 된다. 그러니 책임질 주체는 끝까지 인간이어야만 한다. '인공'지능이 인공'지능'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체계를 시작한 것은 인간이므로 시작도 끝도 모두 인간일 것.

 

<최후의 심판>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오랫동안 내가 두려워하던 미래세계와 이제 막 인공지능이 등장한 현재 사이의 어떤 지점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GPT와 같은 인공지능은 아직 인간의 자리를 대리하기엔 한참 부족하다. 국제도서전에서 생성형 인공지능에 대한 현직 소설가들의 입장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작가들도 지금의 인공지능을 생업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작업의 범위가 제한적이며 인간이 던지는 질문이나 주문이 조금만 달라져도 부정확한 답변을 도출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과 관련된 논란거리가 수많지만 그러한 문제들은 '아직' 인간의 본질을 정도로 고차원적인 형태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진짜 두려워했던 건 인공지능이 '인공지능'이란 이름으로 불리우는 게 우스울 정도로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나 인간의 역할을 앗아가는 건 둘째치고, 과연 무엇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진짜 인간이라는 개념이 더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될 나 자신이 두려웠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라 글 쓰는 사람이기에 인공지능이 가질 따스한 마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껏 상상 속에서 그려왔던 적절히 안온하고 다정한, 공감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인공지능과 함께 사는 미래가 어쩌면 전부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너무나 쉽게 닿는다. 별다른 힘이 없어 보이는 초기단계의 생성형 인공지능조차도 인간의 이기심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다. ‘지능이라기보다는 편리한 도구인데 그런데도 인간은 그 지능에게 책임을 묻는다. 책임이란 무엇인지 아직 배우지 못한 인공지능은 그 무엇도 답해줄 수 없는데. 그래서 <두 개의 세계>가 그리는 미래의 모습에 눈물이 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라져가면서도 동시에 영영 남아있게 되는팬데믹 현상이 이기적 인간의 최후를 말하는 것 같았다. 인간은 원치 않는 형태로 이 세계를 책임지게 되면서도,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살던 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간다.


ⅰ. 작품을 읽는 내내 구병모의 『한 스푼의 시간』과 이현의 『로봇의 별』을 떠올렸다. 내가 두려워하면서도 꿈꿨던 세상을 그렸던가. 다시 꺼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ⅱ. 나는 웃으면서, 만약 그런 때가 오면 전원을 꺼버리면 된다고 답했다. 인공지능은 충분히, 아니 인간 이상으로 영리하며 바로 그렇기에 '최후의 전쟁' 따위는 벌이지 않을 거라고. 공존하거나 적절히 위험을 관리하면 될 뿐, 인공지능이 왜 용을 써서 인류와 스스로를 파멸시킬 대전쟁을 벌이겠느냐고 말했다. _23~24쪽, <최후의 심판> 中

ⅲ. 날로 호의적으로만 받아들여지던 인공지능 재판의 잠재적 문제점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어요. '사고' 원인에 관한 여러 추측이 돌았지만, 만약 오작동이었다고 한다면 치명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49년에, 인공지능 판사는 역시 많은 관심이 쏠렸던 한 연쇄살인 사재판에서 더욱 결정적인 오심을 내립니다. 이를 기점으로 더 이상 여론도 인공지능의 편이 아니었어요. _29쪽, <최후의 심판> 中

ⅳ. 솔로몬: (3초간 무응답) 나의 이름은 솔로몬입니다. 그러나 재판에 피고로서 참여하는 법인격으로서 솔로 3.0이라는 호칭을 인정하라는 의미인 경우 이에 수긍합니다. _35쪽, <최후의 심판>

ⅴ. 솔로몬: 인간이 내게 부여한 직능의 제1조건은 법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법에 근거해서 판결하는 게 나의 직무입니다. 법에 따라 내가 내린 판결로 인간이 어떤 해를 입는다면, 그건 그런 법체계를 만들어 낸 인간의 잘못이지 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_47쪽, <최후의 심판> 中

ⅵ. 세민은 돔에서 떠나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도망쳐 온 자에게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것은. 그것은 도망친 자에게 내려진 저주이자 형벌이니까. 지독한 저주처럼, 무거운 형벌처럼 돔은 세민을 붙들고 있었다. _101쪽, <두 개의 세계> 中

ⅶ. "사실 그랬으면 안 됐는데. 얼굴을 알게 되고, 목소리를 알게 되고, 서로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서로의 기억을 갖게 되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대가가 크다는 건 분명 알고 있었는데도 우리는 서로를 외면할 수 없었어요. 외롭고 두려웠으니까." _123쪽, <두 개의 세계> 中

ⅷ. "아니면 그들 모두가 깨달음을 얻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게 된 거지. 깨달음을 얻은 영혼은 이제 더는 새로운 육체에서 태어나 고통스러운 인생을 반복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 그랬는지도 몰라. 오랫동안 우주를 유영하며 인간들은 모두 깨달음을 얻은 거야." _183~184쪽, <삼사라> 中

ⅸ. 내가 찾아간 첫 번째 집에서 제니는 사망신고서를 쓰고 있었다. 이 집의 이주 여성은 한국말은 할 줄 알지만 읽고 쓰는 건 못해 제니가 대신 사망신고서를 작성했다. _203쪽, <제니의 역> 中

ⅹ. 이제 아침이 와. 하늘은 변한 것이 없지만 시계는 계속 변하고 있어. _244쪽, <발세자르는 이 배에 올랐다> 中


- 동아시아 서포터즈 7기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리뷰는 개인의 주관적 시각에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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