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미쳐 있는 - 실비아 플라스에서 리베카 솔닛까지, 미국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즘의 상상력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류경희 옮김 / 북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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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언제나 투쟁하며 사랑한다


페미니즘을 알게 된 이래로 내 세계에서 페미니스트란 언제나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서 정의되었던 대로,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즉, 인간 평등을 추구하는 이들을 칭하는 말이다. 페미니즘의 이름이 아직 '성평등주의' 따위가 아닌 '페미니즘'인 이유는 여전히 여성들이 약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회운동은 당연하게도, 약자의 이름을 하고 있다.


▶ 아직도 페미니즘을 믿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마치 페미니즘이 진실 반지나 애완용 돌이라도 되는 것처럼 묻는다니까요. _ 헬렌 레디, 『나라는 여자: 회고록』 (2005)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비단 믿음이나 사상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다. 섹스와 젠더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성별의 인간이 평등을 이루는 것을 바라고, 그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을 개인적 믿음의 영역에서 사적인 이데올로기를 구축하는 자들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이 글을 쓰기 전 고등학교 때 쓰던 블로그를 뒤적이다 2018년,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읽고 쓴 서평에 '속에 담은 것을 꺼내어 진실을 말하려면, 인간이 진정 인간성을 회복하려면, 성이 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을 위해 성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인간이 불의를 위해, 진실을 위해 화내는 것에 눈살 찌푸려서는 안 된다. 인간은 성낼 권리를 가진다.'라고 썼던 것을 발견했다. 그때도 완전히 명확하진 않았지만 알고 있었던 거다. 페미니스트는 평등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고, 그러므로 평등할 때까지 싸울 것이고, 그러므로 여전히 미쳐 있으며, 어쩌면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미쳐 있을 것임을.


▶ 여자로 태어났다는 게 끔찍한 비극이다. 수태된 순간부터 나는 가슴이 솟아오르고 페니스나 음낭 대신에 난소를 갖게 될 운명이었다. 내 모든 행동과 생각과 감정의 범위가 피할 길 없는 여성성에 의해 엄격하게 제약당할 운명이었다. 그래, 길거리의 패거리들, 선원들, 군인들, 술집 단골들 사이에 섞이고 싶다는 내 절실한 욕망, (…) 그 모든 욕망이 내가 소녀라는 사실, 늘 공격당하거나 두들겨 맞을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망쳐진다. 남자와 남자의 삶에 대한 내 절실한 호기심이, 빈번히도 그들을 유혹하려는 욕망이나 그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유인책으로 오해받는다. 오, 맙소사,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깊게,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건데. 확 트인 벌판에 나가 잠을 자고, 서부를 마음대로 여행하고, 밤에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_ 『여전히 미쳐 있는』 56쪽 中,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장


여성은 오랫동안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유를 잃어왔다. 표면적으로는 성별 상관없이 평등한 세상이 도래한 듯 보이지만, 어머니와 아버지 들은 여전히 딸에게 밤길 조심할 것, 너무 짧거나 살갗이 많이 드러나는 옷을 입지 말 것, 낯선 사람을 경계할 것을 당부하고 훈계를 새겨들은 딸들은 통금 시간을 지켜 귀가하고 여름에는 민소매와 반바지로 드러난 팔다리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는지 눈살 찌푸려야 하며 갑작스러운 습격에 대비한 호신용 물품을 지니곤 한다. 위험에 맞선 여성은 더욱 기민하게 자신을 보호해야 하며, 그러한 점에 기반해 어떤 꼰대들은 자세나 몸가짐, 심지어는 도덕성까지도 들먹이며 잘 모르는 여성들에게 잔소리를 퍼붓는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유로이 밤길을 걸으며 달을 구경하거나 홀로 멀리 여행을 떠나지 못한다.


▶ 앨릭스 컴퍼트가 개사한 가사 속에서 엄마는 딸에게 전국유색 인종연맹 시위 행진에 나가면 부디 조심하라면서 "그들이 너를 흔들고 굴려서 / 침대로 밀어넣을지 모르니까"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딸은 "핸드백 안에는 벽돌을, 속옷 안에는 가시철망을 넣는 식으로" 무장해서 자신의 순결을 지킬 생각이다. _ 『여전히 미쳐 있는』 143쪽 中


위험한 세계에 발을 들였다가 피해를 보게 되면 세간의 시선은 피해자에게로 쏠린다. 왜 조심하지 않아서, 가만히 있질 못해서 험한 꼴 당했느냐는 식으로 되려 피해자를 힐난한다. 사실 여성들은 정말 오랫동안 조심하면서 몸을 움츠려왔는데도. 세상이 정말 평등하다면 그럴 필요가 없어야 하는데, 우리는 참 오랫동안 그렇게 몸을 줄이고 줄여 왔다. '모든 행동과 생각과 감정의 범위가 피할 길 없는 여성성에 의해 엄격하게 제약'당해 왔다. 그것은 실비아 플라스가 살아가던 1950년대부터 사실이었으며, 내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2020년대에도 사실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본질은 남아 있다. 이 시대를 사는 여성은 도무지 그 사실을 잊을 수가 없다. 잊고 살 수가 없다. 잊을 만하면 삶의 곳곳에서 누군가 요구한다. 애교나 조신함, 무조건적인 모성과 같은, 해묵은 여성성과 여성다움을. 뻔한 이야기지만, 반복해 말하는 똑같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변화하려면 다시 한 번 쓸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직 자유롭지 않다고, 하지만 자유로워지기 위해 성내고 싸울 거라고.


나는 우리가 겪어온 과거의 차별을 미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학을 공부하면서 그 시대엔 작가도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라는 말을 듣는 게 제일 싫었다. 2년 전, 1950년대 한국 시인 전봉건의 시를 공부한 적이 있다. 그는 여성의 신체 부위와 속옷 등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으며 일종의 페티시즘 양상을 보이는 시를 썼다. 작품에서 여성은 유방을 드러내고 자신을 꽃이라 말하고 있었으며, 여성 이미지는 화자의 성적 욕망에 환상성과 극적 효과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이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든다. 나희덕은 연구에서 ‘실제로 전봉건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여자의 관능적 이미지는 환상을 통해 시인의 무의식적 욕망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환상 속의 ‘너’ 또는 ‘그녀’는 현실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모호한 감각적 인상에 의해 환기되는 존재다.’라고 말하며 전봉건 시 속 여성 이미지의 실제를 밝힌다.


하지만 어떤 학우들은 여성의 신체를 물화하는 남성 작가의 창작 양상에 대해서, 현대 관점으로 보았을 때는 논란이 될 수 있으나 작품이 1950년대에 쓰였음을 잊어서는 안 되며, 작가가 어떤 시대를 살아왔는지 고려해서 시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문학 작품을 해석할 때 시대상 및 작가의 삶을 고려해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전봉건이 여성을 사물화하는 시를 썼음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덜 평등한 세계에 살아가는 인간은 그만큼 평등할 권리도 잃는가? 사회가 평등을 찾지 못했다 해서 인간의 가치가 달라지며 차별이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1950년대 여성의 몸은 2020년대 여성의 몸과 다른 가치를 지니지 않으며, 전자가 후자보다 무가치하지도 않다. 2020년대 작가의 작품에도 여성의 가슴은 어김없이 사물화된 채 소환되고 여성의 신체 일부는 모성과 환상성 표현을 위해 수단이 된다. 여성의 몸을 알지 못한 채 여성의 생리현상을 제멋대로 서술하는 남성 작가도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도저히 현재의 차별을 작품성으로 미화하고 용인할 수 없다. 과거의 차별 또한 마찬가지다.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더불어 그 안에 존재했던 불평등 또한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전봉건이 여성을 사물화하는 시를 썼다면, 실비아 플라스는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던지고 갇혀 있던 여성들의 현실을 그리는 시를 썼다. 그녀는 "나는 꾸준히 일만 하는 일벌이 아니야 / 여러 해 동안 먼지만 먹고 살아왔어 / 내 빽빽한 털들로 접시를 닦아왔고."라고 쓰며 자신을 옥죄어왔던 공허한 가정생활에 대해 말한다.


▶ 이것이 바로 그녀를 거의 "질식시켰던" 가정생활이었다. 코트그린의 실제 먼지 속에서뿐만 아니라 그 집의 오랜 과거라는 비유적 먼지 속에서, 남편을 위해 가정을 꾸리고 그의 시를 대신 타이핑하고 그의 식사를 준비하고 그의 식기를 설거지하면서 들이마신 실제 먼지와 비유적인 먼지 속에서 그녀는 질식해갔다. 마침내 이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내게는 되찾아야 할 자아가 있어, 여왕벌처럼." _ 『여전히 미쳐 있는』 118쪽 中


▶ 살아 있는 인형, 너는 어디서나 본다.

그것은 바느질하고, 요리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말하고, 말하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잘 한다, 거기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

너는 구멍이 있다, 그것은 땜질한 것이다.

너는 눈이 있다, 그것은 그냥 환상이다.

내 아이야, 그것은 네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과 결혼, 결혼, 결혼하겠니. _ 실비아 플라스, <지원자(The Applicant)>(1966)


'지원자'에 등장하는 아내는 '살아 있는 인형'이자 '그것(it)'으로 칭해진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에서도 여성은 사물화되어 나타나지만,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성적 환상성을 충족시키는 존재로서 그려지지 않는다. 그녀의 시에서 여성은 무생물으로 표현되나 여전히 살아 있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아내들에 대한, 현실의 폭로다.


1950년대, 실비아 플라스가 살던 미국에는 여성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과 고정관념이 팽배해 있었다. 당시 널리 읽힌 『현대 여성: 잃어버린 성』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교육을 많이 받은 여성일수록 성 기능 장애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자녀에게까지 피해를 주게 되며, "결혼하지 않은 어머니는 (…) 여성으로서 완전히 실패한 사람이다." 신경증 환자가 결혼해 어머니가 되면 "거부" 또는 "지배"를 통해 비행청소년과 범죄자를 길러낸다. "과도한 애정"을 퍼부어 거세된 "겁쟁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와 같은 기능장애의 원인으로 손꼽히는 것이 여성의 "병적일 만큼 강렬한 자아 추구"였다. (『여전히 미쳐 있는』 69쪽 참조) 완전히 비과학적이며 근거 없는 낭설이라는 것을 이제는 많은 이들이 안다. 하지만 1950년대엔 그렇지 않았고 거짓이 오히려 정답이었으며, 여성은 그 속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작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며 성공한 여성이었던 실비아 플라스는 더욱 괴로워했고 고뇌했다. 그녀는 한 인간으로서의 삶, 작가로서의 삶, 아내로서의 삶, 어머니로서의 삶, 그 중 하나를 택하길 원치 않았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이라 믿었으나 세상은 그런 여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


2020년대, 아직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미덕이며 사회에 대한 이바지라 생각하는 이가 있다. 불과 몇 달 전에도 삶에 보탬이 되는 조언이랍시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고 - 어쩌면 그는 그의 입장대로 화가 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 그래서 『에이징 솔로』 리뷰에 썼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부정적인 선택이 아니며, 그리 말하고픈 것도 아니다. 홀로 사는 삶, 결혼해 아이를 낳지 않는 삶, 결혼해 아이를 낳는 삶, 동성 커플이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낳거나 혹은 입양해서 기르는 삶 등… 모두 인정받아야 할 한 개인의 인생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모두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권리를 끌어안고 태어났는데 왜 누군가는 편안히 생을 영위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숨막혀 질식하며 겨우 살아가야만 하는가. 다시 글의 초반부에서 이야기했던 페미니스트의 정의로 돌아가서, 본래 인간은 태어난 한 존엄성을 지니며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평등하지 않은' 순간을 맞닥뜨린다. 성별의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연령, 장애, 인종, 학력 등 인간을 구분하고 규정하는 많은 기준과 잣대에 따라서 어떤 이는 강자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약자가 된다. 벨 훅스의 말처럼 '페미니스트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존엄성과 인권은, 날 때부터 존재하는 것이지만, 언제나 일관적으로 존재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윌러드 부인은 버디를 에스더와 결혼시키려 애쓰면서, 에스더에게 쿠키를 자르고 굽는 1950년대의 가정주부가 되라고 권한다. "남자라는 존재는 뭐냐 하면 말이야, 미래를 향해 쏘아올리는 화살이란다." 윌러드 부인은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힌다. "그리고 여자라는 존재는 뭐냐 하면 말이야, 그 화살을 쏘는 발사대지." 그러나 에스더가 원하는 것은 그녀 스스로 미래를 향하는 화살이 되는 것이다. _ 『여전히 미쳐 있는』 242쪽 中


나는 발사대 없이도 미래를 향해 돌진할 수 있는 화살이 될 테야. 여성이건 남성이건, 꿈을 가진 자라면 그리 생각할 텐데. 2020년대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로 '쿠키를 자르고 굽는 1950년대의 가정주부 며느리'를 원하는 시부모가 존재한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많은 경우, '열린 사고'를 지닌 어른들이라 여겨진다. 과거의 당연함을 탈피하고 모두가 평등한 쪽으로 사고하게 됨이 ‘이상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게 두렵다. 여성이라면 집안일에 능통하고 요리를 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탓에 어릴 적부터 직접 요리하는 걸 원치 않았다. '시집 가서 남편 차려주려면, 제사상 차리려면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기성세대의 습관성 충고가 싫었고 그런 충고를 따르며 살고 싶지 않았다. 미래의 아이들에게 가부장제를 답습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산 사람이 죽어가는 세계가 이대로 존재해도 괜찮은가…. 성인이 된 후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야 겨우 밥을 하기 시작했고, 간단한 요리를 하면서 음식이란 나 자신을 배부르게 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당연한 것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참 당연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구나 생각했다.


여성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 대해 줄곧 생각해 왔다. 그리고 『여전히 미쳐 있는』을 읽고, 매드 라이팅 클럽을 통해 여성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극복과 성장을 다룬 글을 쓰면서 어렴풋이 깨달았다. 여성의 이야기를 할 때,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이야기가 그리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여성의 이야기는 곧 사람의 이야기이며, 그러므로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개인의 이야기를 모으고 모아 인류와 세계의 서사로 확장시키는 작업이다. 이는 비단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남성의 이야기는 다분히 권력적이며 아버지적이다. 이러한 남성 이미지의 활용은 수많은 남성들의 목소리 또한 지우고 있다. 현대의 어떤 차별과 혐오는 굉장히 중층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을 다중적으로 고립시킨다. 우리는 이따금 우리가 왜 고립되었는지도 모른 채 홀로가 된다. 때로는 타의에 의해 밀려나 버렸다는 사실조차 잊기 십상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 또한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것이 페미니즘이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유다.


미친 여자들은 필연적으로 미친 남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_ 『여전히 미쳐 있는』 500쪽 中


스물두 살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어맨다 고먼은 취임식 무대에서 빼어난 시를 낭송하면서, 그날과 같은 참사는 그냥 지나칠 수도 지나쳐서도 안 될 것이라고, 자신과 자신이 대표하는 세대는 후퇴할 수 없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왜냐하면 “우리는 겁을 집어먹었다고 해서 다시 뒤로 돌아가거나/가로막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동안 만나고 행진하고 발버둥치고 투쟁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온 페미니즘 활동가 모두 이 시인이 이런 시를 낭송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그 내용을 그대로 메아리치게 할 것이다. _ 『여전히 미쳐 있는』 500쪽 


✎°₊ 『여전히 미쳐 있는』 서포터즈 Mad Writing Club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서점 등록 서평은 2~5주차 리뷰를 모두 이용하여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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