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을 읽으며 초반부에서 예전에 읽었던 일본 소설이 떠올랐다.

우타노 쇼고의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라는 추리소설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너무나 순수하고 귀엽기까지 한 여자이다. 하지만 소설의 말미에 가면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 여탐정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서 '반전이란 것이 이렇구나'하고 느끼게 된다.

여탐정 사쿠라는 60대 할머니였다. 순수하고 첫사랑의 이미지였던 그녀가 호호할머니였던 것이다.

 

<파과>의 조각을 보면서 다른 이미지의 할머니지만 '사쿠라' 할머니가 떠올랐다.

특히 지하철에서 한 남자를 죽이고 돌아와 청부살인 에이전시 업무를 보는 해우와 대화 중 노인의 직업으로 킬러도 괜찮다는 대목이 나온다. 월급제로 보수를 받아도 좋고 에이전시에 모아둔 돈을 일시불로 받을 수도 있고, 자식에게 손벌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벌고 있으니 은퇴 후 작은 치킨장사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노인들의 삶이란 것이 젊어서 가족들, 자식들에게 모두 쏟아부어 나이들어선 남은 것이 없다. 자식들의 도움없이 혼자 살아야 한다.

 

 

 

다시 <벚꽃지는...>의 사쿠라할머니와 <파과>의 조각할머니를 보면 노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어 현역에서도 얼마든지 활동을 할 수 있는 진정한 베테랑이다.

특히 <파과>의 조각은 감정에 있어서도 베테랑이다. 절대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행동에 나타내지 않는다. 원래 나이가 들수록 놀라는 일이 적다고 하지 않는가. 조각은 나이와 함께 그 동안 그녀의 삶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삶이 그랬던 것이다.

 

조각은 가난한 집의 둘째딸로 태어나 입이라도 하나 덜 욕심에 부모는 조각을 숙부의 집에 양녀로 보낸다고 했지만 실제는 가정부의 조수였다. 그런 눈치밥 먹는 삶이 순탄했을리는 없다.

오해와 당황함에서 일어난 실수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친척집을 나와 류를 만난다.

그렇게 "방역"이라고 불리는 살인청부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거기까지 가게 된 것이다. 게다가 모정을 끊고 자식을 버리기까지 하는 매정한 엄마의 모습으로도 살았다.

하지만 자신의 살을 뚫고 나온 자식과의 인연을 쉽게 끊지 못했고 젖먹이를 버리고 젖몸살을 앓듯 조각은 갓난아기의 사진을 닳을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조각이 강한듯 보이고, 방역업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뒷처리까지 깔끔했지만 그녀에게서 뭍어나는 외로움과 쓸쓸함은 너무나 쉽게 보인다.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친척도 없다며 수월하다고 하지만 늙은개 무용이를 키우며 자신이 죽을 날을 대비해 무용이에게 집나가는 법을 가르쳐준다.

개 무용이가 알아들을리 없지만 다른 이들에게 잡혀 죽거나 팔려갈 것을 걱정하며 당부하는 모습에서 애처로움도 느껴진다.

 

<파과>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현실적이다. 방역이라는 말로 청소하는 킬러가 나오는 상황은 다소 현실적이지 않지만 인물들이 가진 사연은 현실적이다.

의료사고로 아내가 출산후 죽음을 맞게 되어 부모님과 딸 아이를 키우며 사는 강박사.

믿었던 자신의 동료들에게 배신당하자 변두리의 병원을 전전하며 요일별로 출퇴근하는 월급쟁이 의사가 된다.

 

어릴적 아버지의 죽음을 눈으로 목격한 소년이었던 투우.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던 가정부를 가장한 살인청부업자의 뒷모습을 기억하며 아버지에 대한 사건일지를 찾는다. 하지만 20년이란 시간이 지나 남아 있는 자료가 없다. 그렇다고 그가 방역업을 하게 된 것이 그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사건건 대모 조각의 일을 방해하며 라이벌 아닌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려 한다.

 


 

 

조각, 그녀의 생활 신조는 간단했다.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 (p.236)

 

이 말이 너무나 슬펐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해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각은 평생 그런 마음으로 자식도 멀리 떠나보내고 혼자 죽어가려고 마음 먹는다. 그러나 인생은 원하는 바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그러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강철같은 조각의 마음에 연민이 생기고, 사람을 죽이는 일에만 사용했던 칼을 사람을 구하는데 칼로 사용을 하게 된다. 조각 인생 최초의 일이 아닐까 싶다.

그 변화 속에서도 조각은 자신의 신분을 더 이상 노출시키지 않고 사라진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멀리 아른해지는 조각의 뒷모습이 이젠 더 이상 쓸쓸해 보이진 않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