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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0월
평점 :
절판
정말 오랜만에 읽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다. 에쿠니 가오리하면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은 작가로 알고 있는데 개인적인 취향에 맞지 않아 자주 읽는 작가의 책은 아니다. 하지만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이 나온다면 언제든지 읽어보고 싶다. 이번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는 단편소설집으로 이미 오래전에 나온 소설집의 개정판이다. 단편소설로 손가락, 초록 고양이, 천국의 맛, 사탕일기, 비, 오이, 녹차, 머리빗과 사인펜 등 여섯 편의 소설이 실려있다. 다시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를 읽어도 작가 에쿠니 가오리만의 분위기가 너무 잘 느껴졌다.
첫 번째 단편소설 '손가락'은 특이한 만남을 통해 알고 지내게 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고등학생인 기쿠코는 전철에서 빨간 코트를 입은 중년의 여성을 만나기 전까지는 보통의 여고생이었다. 친구들과 쪽지를 주고 받거나 함께 점심을 먹으며 수다떠는 보통의 여고생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철을 타고 등교를 하던 중이었고 비가 오는 날이라 전철 안은 답답하고 공기가 나빴다. 문고본 책을 꺼내 서서 읽고 있는데 어디선가 손이 기쿠코의 자켓 안으로 들어와 허리 등을 쓰다듬었다. 치한이었다. 그런데 남자의 손이 아니라 여자였다. 뒤돌아보니 빨간 코트를 입은 마흔 살이 넘어 보이는 여성으로 기쿠코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짓기까지 했다. 그리고 여자는 전철에서 내렸다. 그뒤로 전철에서 그 빨간 코트를 입은 여자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전철을 타면 여자를 찾는 버릇이 생길 정도였고 어느 순간 여자가 다시 전철을 타고 내렸다. 매번 같은 역에서 타고 내렸다. 기쿠코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여자도 인사를 했다. 겨울방학이 시작될 무렵 또 여자를 만난다. 이번엔 여자의 집에 따라가 차를 마셨다. 그녀의 이름은 아키바 치하루로 결혼한 지 12년이나 되는 남편 야마베 씨가 있었다. 이미 야마베는 기쿠코를 알고 있었고 종종 치하루를 만나러 간다.


'비, 오이, 녹차'는 세 여성이 등장한다. 고등학생 유코와 엄마 치즈루, 이모 시토이다. 시토는 서른다섯 살이라고는 하지만 아르바이트로 먹고 살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언니인 치즈루보다 일곱 살이나 어려서인지 조카인 유코와 자주 대화를 한다. 시토 이모는 외할머니 집 근처에 살고 있어 '가출'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유코가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는 언니 치즈루와 시토가 졸업한 학교이기도 하고 역사가 깊은 여고다. 시토는 보름 전에 애인과 헤어졌다. 비가 내리자 마음이 울적해진다. 유리컵에 녹차를 따르고 담배를 피운다. 시토는 우울하면서 심란하기도 하다. 냉장고에서 오이를 꺼냈는데 유코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이모가 가출을 하면 자신이 실종신고를 해 주겠다고 한다. '비, 오이, 녹차'는 5장정도의 아주 짧은 단편소설이다. 유코와 시토의 짧은 이야기로 여름날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녹차를 쪼르르 따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만든 테루테루보즈 인형이 창가에 달려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