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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ㅣ 책세상 세계문학 12
샬럿 브론테 지음, 신해경 옮김 / 책세상 / 2024년 12월
평점 :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로체스터 씨와 함께 있는 일에 지루해지지 않고, 그도 그렇다. 우리는 함께 있는 것이 혼자 있는 것처럼 자유로운 동시에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처럼 흥겹다.
이 책은 760페이지의 한 권으로 된 책이다. 뒤의 787페이지까지는 작품 해설과 작가 연보 그리고 박신영 작가님의 독후감이다. 분량이 많아서 <제인 에어> 1, 2권으로 나뉘어서 출간된 책도 있지만 나는 이렇게 한 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좋다. 장식으로도 훌륭하고, 실로 제본해서 페이지가 쫙쫙 펴지니까 읽기도 너무 편했다. 책이 두꺼우니 그래도 글자는 크겠지 싶었지만 글자도 안 크다. 이렇게 두꺼운 책을 내가 과연 다 읽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웬걸 드라마 보는 것만큼 재밌게 읽었다. 드라마 몰아보기도 몸이 힘들지만 이 책도 정신없이 보느라 삭신이 쑤신다. 이런 명작을 왜 진작 읽지 않았을까? 나의 첫 명작 독서는 단어 찾다가 읽다 포기한 <토지> 1권 이후 책세상에서 나온 <싯다르타>가 처음이었다. <싯다르타>를 읽으며 명작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느껴서 이번에도 서평단을 신청했다. 당첨! 내가 서평은 잘 못쓰지만 정성이라도 보이려고 했더니 인디캣님께서 뽑아주신 것 같다.
제인 에어의 줄거리는 영화, 드라마, 연극, 오페라, 뮤지컬 등등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는 빼고. 나도 어릴 때 읽어본 것 같기도 한데 내가 워낙에 명작이나 책과 안 친하고 <비밀의 숲> 같은 드라마를 좋아해서 제인 에어의 내용은 기억에 없다. 일단 명작은 괜히 어려운 것 같고 재미없다는 편견 때문인지 안 읽게 되었다. 게다가 명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들은 왜 이렇게 지루한지... 정이 안 갔다.
1847년 샬럿 브론테가 쓴<제인 에어>라는 작품이 왜 아직까지도 필독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마지막 장을 덮으며 알게 되었다. 이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라니... 아~ 너무 재밌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게다가 서평을 쓰려고 하면 할 말이 없어서 본문 베끼기에 정성을 쏟던 나도 할 말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드라마도 그 시대의 생활상과 주인공의 캐릭터를 반영한다. 그런데 명작은 활자로 된 드라마라고나 할까? 드라마가 화면과 스토리에 몰입하느라 생각할 시간 없이 재밌다면, 책은 화면이 없기 때문에 글자가 내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이 활자로 된 드라마 역시 영상으로 된 드라마 뺨치게 재밌었다. 그리고 총 3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장면이 바뀌면 잠시 이때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멈추어 생각하는 여유도 있다. 드라마 몰아보기는 빨리 다음 편을 봐야 해서 치킨 먹을 시간도 없는데.
드라마는 너무너무 재밌었다로 끝난다. 내용이 뭐였는지는 다시 보면 아~ 그거였지 하고 생각난다. 그런데 명작은 제인 에어가 구박 당했던 게이츠헤드 저택에서부터 로우드 학교와 손필드 저택에서의 가정교사 생활까지 장면이 저절로 쭉 이어진다. 내가 너무 재밌게 보았던 <비밀의 숲>만 해도 시즌 2까지 다 봤는데 해변에서 살인사건 정도만 기억이 난다. 이것이 글로 읽는 명작과 눈으로 보는 드라마의 차이인가?
나는 제인 에어가 유부남과 결혼하면 안 된다는 사회적인 통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손필드 저택을 나온 것이나 내가 며느리인데 어떻게 시어머니 제사를 안 지내냐는 사회적인 통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15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어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제인 에어도 나도 사회적인 통념의 희생양이 아니었나 하는. 제인 에어는 눈먼 로체스터를 얻고 나는 제사 스트레스 때문에 싸우는 부모 밑에서 불안해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자란 열 손가락 손톱이 거의 없는 아들을 얻었다. 어쩌면 그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제인 에어는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 로체스터를 얻고, 나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얻었으니 행복한 것일까? 제사는 시아버지가 실버타운으로 들어가시자마자 바로 폐지되었다.
제인 에어의 선택 중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무작정 손필드 저택을 나온 것이었다. 로체스터가 처음부터 고백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잘못이지만 그래도 그만한 결격 사유가 있는 부인이었음을 다시 한번 천천히 생각해 봤어야 했다. 로체스터는 속아서 정신병이 있는 버사 메이슨과 결혼했지만 사람을 물어뜯고 방화도 저지르고 정신병 증상이 심한 와이프였어도 버리지 않고 그녀를 비밀리에 보살펴줄 사람을 붙여 자신의 집에서 살게 한 자체를 보았어야 했다.
제인 에어가 조금만 더 성숙했다면 그렇게 떠날 게 아니라 이혼을 하든 정신병원에 격리를 시키든 함께 의논해서 다른 방법을 찾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조금만 더 성숙했더라면 나 스스로는 물론 아들을 그렇게 아파하게 방치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로체스터도 눈이 멀지 않았을 것이고 아들도 손톱을 물어뜯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정신병 아내를 구한다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간 로체스터나, 남편의 어머니라고 그렇게 몸서리치도록 싫었던 제사를 지낸 나나 잃은 것도 많지만 사랑을 얻었으니 제인 에어처럼 이제부터라도 행복하면 되지 않을까?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 아직도 제사를 지내고 있는 집이 있다면 와이프나 며느리도 진심으로 원하는지, 혹시 사회적인 통념 때문에 식구들이나 남들 눈치 보느라고 내 가장 소중한 가족을 힘들고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닌지 꼭 물어봐 줬으면 좋겠다. 아들에게도 물어봤다. 엄마 아빠가 제사 때문에 이렇게 싸우는데 너는 왜 가만히 있었냐고. 그랬더니 자기가 제사를 지내는 당사자가 아니라 의견을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아내와 며느리의 의미 없는 희생을 전제로 한 제사는 미풍양속이 아니라 악습이 아닌지 꼭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제인 에어가 살고 있던 곳은 게이츠헤드 저택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리드 외숙모와 사촌인 존 리드, 일라이자, 조지아나와 함께 자랐다. 제인 에어는 사촌들은 물론, 하녀 베시 외에는 외숙모의 하인들과도 전혀 어울리지 못했다. 만약 고집도 세지 않고 예쁜 장난꾸러기였다면 얹혀사는 처지였어도, 리드 외숙모는 제인 에어를 좀 더 따뜻하게 대해줬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두 사람처럼 정말 성격이 안 맞는 사람도 있다. 죽을 때까지 미워하니 말이다.
리드 외삼촌은 제인 에어 엄마의 오빠였다. 어려서 고아가 된 제인 에어를 그가 게이츠헤드 저택에 데려왔다. 하지만 외숙모의 입장에서는 남편도 죽고 없는데, 자기 집안사람도 아닌 천덕꾸러기를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자식도 미운 판에 남의 자식을 내 자식처럼 아낄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친자식보다 여동생의 아이를 불쌍하다며 더 예뻐하는 남편에게 자기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 같아 더 미웠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제인 에어의 아버지는 가난한 성직자였는데 엄마가 신분이 맞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자 외할아버지인 리드 씨가 엄마와 절연해 버렸다. 결혼 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아버지는 빈민굴을 심방하다 티푸스에 걸려 돌아가시고, 아버지에게 전염된 엄마도 한 달이 채 안 되어 돌아가셨다.
제인 에어는 그 어린 나이에도 가난뱅이 여자들처럼 자라기는 싫었다고 자기주장이 확실해서 깜짝 놀랐다. 신분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유를 얻을 용기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회의 신분이라는 것도 중요했던 시대였으니, 제인 에어는 어린 나이지만 사회의 차별을 이미 파악하고 있는 영리한 아이였던 것 같다.
리드 부인에게 자신을 학대한 것을 당당히 말하고 난 제인 에어가 자신의 심정을 묘사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사납게 날뛰는 감정을 제멋대로 풀어놓고 나면 비통한 후회와 가슴 서늘한 반작용을 겪기 마련이다. 화가 나서 분노를 쏟아붓고 나니 처음에는 향기로운 포도주 같았지만, 녹슨 쇠 같은 뒷맛은 마치 독을 마신듯한 느낌이었다는 것에 너무 공감되었다. 나도 분노를 폭발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으면 분노를 폭발하지 않고 감정이 가라앉은 다음에 대화를 했을 것 같은데 어릴 때는 자기감정을 조절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싶다.
로우드 학교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29세쯤 되어 보이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의 키 큰 템플 선생님이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제인 에어에게 어머니이자, 가정교사이자, 제인이 2년간 교사를 할 때는 동료가 되어주었다. 그런데 템플 선생님이 결혼해서 로우드 학교를 떠나 먼 고장으로 가게 된다. 로우드에 더 있을 이유가 없어진 제인은 광고를 내고 손필드 저택 아델의 가정교사로 가게 된다.
손필드 저택 주변에는 억세고 옹이투성이인 거대한 늙은 산사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 저택의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단박에 설명이 된다. 손필드(산사나무 들판) 저택의 주인은 로체스터이다. 그는 잠깐 사귀었던 여배우의 딸을 자기가 맡아주었고, 제인 에어는 그 여배우의 딸인 아델의 가정교사로 간 것이었다. 제인 에어는 저택으로 돌아온 로체스터 씨 방에 화재가 나자 그를 구해준다. 그리고 화려한 파티가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그를 사랑하게 된다.
어느 날 게이츠헤드 저택에서 일하던 마부가 찾아와 사촌 존 리드의 죽음을 알린다. 그리고 리드 부인이 쓰러졌다는 말에 제인 에어는 게이츠헤드로 간다. 잠깐 정신이 돌아온 리드 부인은 제인 에어에게는 존에어라는 삼촌이 있고 그녀를 양녀로 삼았다가 죽은 뒤에는 전 재산을 제인 에어에게 물려주겠다는 편지가 왔었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삼촌에게 입양되어 편안하게 사는 걸 참을 수 없어 제인 에어는 죽었다고 답장을 보냈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제인 에어를 미워하다 죽는다.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와 결혼하려 하지만 삼촌 존 에어가 로체스터에게 버사 메이슨이라는 미치광이 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의 오빠를 보내 결혼을 막는다. 버사 메이슨의 성정은 난폭하고 강압적이었다. 로체스터는 참고 4년을 살았지만 그녀는 그를 심하게 괴롭혔다. 증상이 심해지자 그녀를 손필드 저택 3층에 가두고 정신병원에서 일하던 그레이스 풀과 외과 의사인 카터를 고용해 돌보게 했다. 버사 메이슨이 가끔 정신이 돌아오면 그레이스가 방심한 틈을 타서 방화도 저지르고 제인 에어의 드레스도 찢었던 것이다.
그리고 버사 메이슨의 오빠라는 사람도 얄밉다. 자기 여동생 때문에 피해를 당한 로체스터를 생각한다면 그의 행복을 빌어줬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의뢰를 받았다지만 행복한 결혼식에 나타나 이의를 제기하다니... 자기 여동생에게 어깨까지 물어뜯겨 부상당한 것을 로체스터가 치료해 주었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결혼을 훼방 놓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자기 동생과 이혼을 시키고, 동생을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키는 것이 제대로 된 오빠 아닌가. 남은 내 동생 때문에 희생을 당해도 괜찮다? 그래서 공동주택 소음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나만, 내 가족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이 메이슨 같은 심뽀때문에.
무작정 손필드 저택을 나온 제인 에어는 마쉬 엔드에서 신존 리버스와 누이동생 다이애나와 메리를 만나 시골 학교에서 일하게 된다. 알고 보니 리버스의 어머니는 제인에어 아버지의 누나였다. 그들은 제인 에어의 사촌들이었던 것. 그리고 유산으로 받은 2만 파운드를 넷이 똑같이 5천 파운드씩 나누어 갖는다.
신존은 제인 에어에게 함께 선교지로 떠나자고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겐 아무 소명감도 없으며, 애정 없이 하는 결혼을, 가짜 감정을 경멸한다고 당당히 말한다. 신존은 자신의 아내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주님을 거부한 것이며 신앙을 부정한 이교도보다 더 나쁜 자들과 똑같다고 순종을 강요했지만 제인 에어는 끝내 거부했다. 그리고 그를 떠났다.
제인 에어가 손필드 저택을 다시 찾아가 보니 이미 불에 타버리고 검게 그을린 폐허만 남았다. 그리고 숲속 깊숙이 틀어박혀 있는 펀딘 저택에 있는 로체스터에게 간다. 그는 화재로 두 눈과 왼 팔을 잃었다. 한 쪽 눈은 명암 정도만 구별할 수 있었다. 둘은 바로 결혼하고 로체스터는 런던에 있는 저명한 안과의의 진찰을 받고 한쪽 눈의 시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둘은 아들을 낳고 오래오래 행복했다는 이야기다.
제인 에어를 그렇게 괴롭히던 존 리드와 리드 부인은 결국 다 죽었다. 그리고 손필드 저택에 불을 지른 버사 메이슨도 죽었다. 하지만 제인의 유일한 친구였던 착하고 똑똑하고 인내심 많았던 번스 헬렌은 그 어린 나이에 아무 죄도 없이 폐결핵으로 죽는다. 번스 헬렌은 잠깐 등장했지만 죽음을 담담하게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이 어른보다 더 성숙해 보여서 지금도 이름까지 기억이 난다.
나쁜 사람에게 좋은 일도 많이 일어나고 착하고 법 없이도 살 사람에게 나쁜 일도 많이 일어난다. 다만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나 자신처럼 내 가족부터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 아무리 내 자식이라도 내 뜻대로 하려고 휘두르는 것은 며느리에게 제사를 강요하면 안 되는 것과 같지 않을까. 나도 아들과 옷 사러 가서 많이 싸웠는데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그랬다. 내 취향과 아들의 취향은 분명히 다른 것인데 아들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내 취향을 강요했던 것이다. 독서는 이렇게 나이만 먹는 나를 철들게 해서 꼭 필요하다고 하나보다.
제인 에어를 읽으며 그녀를 괴롭힌 사람들의 죽음은 쌤통이라 느끼고. 좋은 사람의 죽음과 불행은 마음 아파하는 나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본다면 어릴 때 그렇게 제인 에어를 미워했던 리드 부인과 사촌 오빠인 존 리드도 자존감이 너무 낮았단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결론은 독서를 많이 해서 가장 먼저는 나 자신이 행복하고, 그다음은 우리 가족이 행복하고, 그다음에 부모님을 챙기는 것이 순서임을 스스로 느껴보자는 것이다. 제인에어 덕분에 나의 아픈 과거도 돌아보고 제사가 없어진 지금의 행복을 더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