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책세상 세계문학 12
샬럿 브론테 지음, 신해경 옮김 / 책세상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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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로체스터 씨와 함께 있는 일에 지루해지지 않고, 그도 그렇다. 우리는 함께 있는 것이 혼자 있는 것처럼 자유로운 동시에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처럼 흥겹다.

이 책은 760페이지의 한 권으로 된 책이다. 뒤의 787페이지까지는 작품 해설과 작가 연보 그리고 박신영 작가님의 독후감이다. 분량이 많아서 <제인 에어> 1, 2권으로 나뉘어서 출간된 책도 있지만 나는 이렇게 한 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좋다. 장식으로도 훌륭하고, 실로 제본해서 페이지가 쫙쫙 펴지니까 읽기도 너무 편했다. 책이 두꺼우니 그래도 글자는 크겠지 싶었지만 글자도 안 크다. 이렇게 두꺼운 책을 내가 과연 다 읽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웬걸 드라마 보는 것만큼 재밌게 읽었다. 드라마 몰아보기도 몸이 힘들지만 이 책도 정신없이 보느라 삭신이 쑤신다. 이런 명작을 왜 진작 읽지 않았을까? 나의 첫 명작 독서는 단어 찾다가 읽다 포기한 <토지> 1권 이후 책세상에서 나온 <싯다르타>가 처음이었다. <싯다르타>를 읽으며 명작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느껴서 이번에도 서평단을 신청했다. 당첨! 내가 서평은 잘 못쓰지만 정성이라도 보이려고 했더니 인디캣님께서 뽑아주신 것 같다.

제인 에어의 줄거리는 영화, 드라마, 연극, 오페라, 뮤지컬 등등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는 빼고. 나도 어릴 때 읽어본 것 같기도 한데 내가 워낙에 명작이나 책과 안 친하고 <비밀의 숲> 같은 드라마를 좋아해서 제인 에어의 내용은 기억에 없다. 일단 명작은 괜히 어려운 것 같고 재미없다는 편견 때문인지 안 읽게 되었다. 게다가 명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들은 왜 이렇게 지루한지... 정이 안 갔다.

1847년 샬럿 브론테가 쓴<제인 에어>라는 작품이 왜 아직까지도 필독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마지막 장을 덮으며 알게 되었다. 이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라니... 아~ 너무 재밌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게다가 서평을 쓰려고 하면 할 말이 없어서 본문 베끼기에 정성을 쏟던 나도 할 말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드라마도 그 시대의 생활상과 주인공의 캐릭터를 반영한다. 그런데 명작은 활자로 된 드라마라고나 할까? 드라마가 화면과 스토리에 몰입하느라 생각할 시간 없이 재밌다면, 책은 화면이 없기 때문에 글자가 내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이 활자로 된 드라마 역시 영상으로 된 드라마 뺨치게 재밌었다. 그리고 총 3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장면이 바뀌면 잠시 이때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멈추어 생각하는 여유도 있다. 드라마 몰아보기는 빨리 다음 편을 봐야 해서 치킨 먹을 시간도 없는데.

드라마는 너무너무 재밌었다로 끝난다. 내용이 뭐였는지는 다시 보면 아~ 그거였지 하고 생각난다. 그런데 명작은 제인 에어가 구박 당했던 게이츠헤드 저택에서부터 로우드 학교와 손필드 저택에서의 가정교사 생활까지 장면이 저절로 쭉 이어진다. 내가 너무 재밌게 보았던 <비밀의 숲>만 해도 시즌 2까지 다 봤는데 해변에서 살인사건 정도만 기억이 난다. 이것이 글로 읽는 명작과 눈으로 보는 드라마의 차이인가?

나는 제인 에어가 유부남과 결혼하면 안 된다는 사회적인 통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손필드 저택을 나온 것이나 내가 며느리인데 어떻게 시어머니 제사를 안 지내냐는 사회적인 통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15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어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제인 에어도 나도 사회적인 통념의 희생양이 아니었나 하는. 제인 에어는 눈먼 로체스터를 얻고 나는 제사 스트레스 때문에 싸우는 부모 밑에서 불안해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자란 열 손가락 손톱이 거의 없는 아들을 얻었다. 어쩌면 그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제인 에어는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 로체스터를 얻고, 나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얻었으니 행복한 것일까? 제사는 시아버지가 실버타운으로 들어가시자마자 바로 폐지되었다.

제인 에어의 선택 중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무작정 손필드 저택을 나온 것이었다. 로체스터가 처음부터 고백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잘못이지만 그래도 그만한 결격 사유가 있는 부인이었음을 다시 한번 천천히 생각해 봤어야 했다. 로체스터는 속아서 정신병이 있는 버사 메이슨과 결혼했지만 사람을 물어뜯고 방화도 저지르고 정신병 증상이 심한 와이프였어도 버리지 않고 그녀를 비밀리에 보살펴줄 사람을 붙여 자신의 집에서 살게 한 자체를 보았어야 했다.

제인 에어가 조금만 더 성숙했다면 그렇게 떠날 게 아니라 이혼을 하든 정신병원에 격리를 시키든 함께 의논해서 다른 방법을 찾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조금만 더 성숙했더라면 나 스스로는 물론 아들을 그렇게 아파하게 방치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로체스터도 눈이 멀지 않았을 것이고 아들도 손톱을 물어뜯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정신병 아내를 구한다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간 로체스터나, 남편의 어머니라고 그렇게 몸서리치도록 싫었던 제사를 지낸 나나 잃은 것도 많지만 사랑을 얻었으니 제인 에어처럼 이제부터라도 행복하면 되지 않을까?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 아직도 제사를 지내고 있는 집이 있다면 와이프나 며느리도 진심으로 원하는지, 혹시 사회적인 통념 때문에 식구들이나 남들 눈치 보느라고 내 가장 소중한 가족을 힘들고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닌지 꼭 물어봐 줬으면 좋겠다. 아들에게도 물어봤다. 엄마 아빠가 제사 때문에 이렇게 싸우는데 너는 왜 가만히 있었냐고. 그랬더니 자기가 제사를 지내는 당사자가 아니라 의견을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아내와 며느리의 의미 없는 희생을 전제로 한 제사는 미풍양속이 아니라 악습이 아닌지 꼭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제인 에어가 살고 있던 곳은 게이츠헤드 저택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리드 외숙모와 사촌인 존 리드, 일라이자, 조지아나와 함께 자랐다. 제인 에어는 사촌들은 물론, 하녀 베시 외에는 외숙모의 하인들과도 전혀 어울리지 못했다. 만약 고집도 세지 않고 예쁜 장난꾸러기였다면 얹혀사는 처지였어도, 리드 외숙모는 제인 에어를 좀 더 따뜻하게 대해줬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두 사람처럼 정말 성격이 안 맞는 사람도 있다. 죽을 때까지 미워하니 말이다.

리드 외삼촌제인 에어 엄마의 오빠였다. 어려서 고아가 된 제인 에어를 그가 게이츠헤드 저택에 데려왔다. 하지만 외숙모의 입장에서는 남편도 죽고 없는데, 자기 집안사람도 아닌 천덕꾸러기를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자식도 미운 판에 남의 자식을 내 자식처럼 아낄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친자식보다 여동생의 아이를 불쌍하다며 더 예뻐하는 남편에게 자기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 같아 더 미웠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제인 에어의 아버지는 가난한 성직자였는데 엄마가 신분이 맞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자 외할아버지인 리드 씨가 엄마와 절연해 버렸다. 결혼 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아버지는 빈민굴을 심방하다 티푸스에 걸려 돌아가시고, 아버지에게 전염된 엄마도 한 달이 채 안 되어 돌아가셨다.

제인 에어는 그 어린 나이에도 가난뱅이 여자들처럼 자라기는 싫었다고 자기주장이 확실해서 깜짝 놀랐다. 신분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유를 얻을 용기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회의 신분이라는 것도 중요했던 시대였으니, 제인 에어는 어린 나이지만 사회의 차별을 이미 파악하고 있는 영리한 아이였던 것 같다.

리드 부인에게 자신을 학대한 것을 당당히 말하고 난 제인 에어가 자신의 심정을 묘사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사납게 날뛰는 감정을 제멋대로 풀어놓고 나면 비통한 후회와 가슴 서늘한 반작용을 겪기 마련이다. 화가 나서 분노를 쏟아붓고 나니 처음에는 향기로운 포도주 같았지만, 녹슨 쇠 같은 뒷맛은 마치 독을 마신듯한 느낌이었다는 것에 너무 공감되었다. 나도 분노를 폭발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으면 분노를 폭발하지 않고 감정이 가라앉은 다음에 대화를 했을 것 같은데 어릴 때는 자기감정을 조절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싶다.

로우드 학교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29세쯤 되어 보이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의 키 큰 템플 선생님이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제인 에어에게 어머니이자, 가정교사이자, 제인이 2년간 교사를 할 때는 동료가 되어주었다. 그런데 템플 선생님이 결혼해서 로우드 학교를 떠나 먼 고장으로 가게 된다. 로우드에 더 있을 이유가 없어진 제인은 광고를 내고 손필드 저택 아델의 가정교사로 가게 된다.

손필드 저택 주변에는 억세고 옹이투성이인 거대한 늙은 산사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 저택의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단박에 설명이 된다. 손필드(산사나무 들판) 저택의 주인은 로체스터이다. 그는 잠깐 사귀었던 여배우의 딸을 자기가 맡아주었고, 제인 에어는 그 여배우의 딸인 아델의 가정교사로 간 것이었다. 제인 에어는 저택으로 돌아온 로체스터 씨 방에 화재가 나자 그를 구해준다. 그리고 화려한 파티가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그를 사랑하게 된다.

어느 날 게이츠헤드 저택에서 일하던 마부가 찾아와 사촌 존 리드의 죽음을 알린다. 그리고 리드 부인이 쓰러졌다는 말에 제인 에어는 게이츠헤드로 간다. 잠깐 정신이 돌아온 리드 부인은 제인 에어에게는 존에어라는 삼촌이 있고 그녀를 양녀로 삼았다가 죽은 뒤에는 전 재산을 제인 에어에게 물려주겠다는 편지가 왔었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삼촌에게 입양되어 편안하게 사는 걸 참을 수 없어 제인 에어는 죽었다고 답장을 보냈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제인 에어를 미워하다 죽는다.

제인 에어로체스터와 결혼하려 하지만 삼촌 존 에어 로체스터에게 버사 메이슨이라는 미치광이 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의 오빠를 보내 결혼을 막는다. 버사 메이슨의 성정은 난폭하고 강압적이었다. 로체스터는 참고 4년을 살았지만 그녀는 그를 심하게 괴롭혔다. 증상이 심해지자 그녀를 손필드 저택 3층에 가두고 정신병원에서 일하던 그레이스 풀과 외과 의사인 카터를 고용해 돌보게 했다. 버사 메이슨이 가끔 정신이 돌아오면 그레이스가 방심한 틈을 타서 방화도 저지르고 제인 에어의 드레스도 찢었던 것이다.

그리고 버사 메이슨의 오빠라는 사람도 얄밉다. 자기 여동생 때문에 피해를 당한 로체스터를 생각한다면 그의 행복을 빌어줬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의뢰를 받았다지만 행복한 결혼식에 나타나 이의를 제기하다니... 자기 여동생에게 어깨까지 물어뜯겨 부상당한 것을 로체스터가 치료해 주었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결혼을 훼방 놓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자기 동생과 이혼을 시키고, 동생을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키는 것이 제대로 된 오빠 아닌가. 남은 내 동생 때문에 희생을 당해도 괜찮다? 그래서 공동주택 소음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나만, 내 가족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이 메이슨 같은 심뽀때문에.

무작정 손필드 저택을 나온 제인 에어는 마쉬 엔드에서 신존 리버스와 누이동생 다이애나메리를 만나 시골 학교에서 일하게 된다. 알고 보니 리버스의 어머니는 제인에어 아버지의 누나였다. 그들은 제인 에어의 사촌들이었던 것. 그리고 유산으로 받은 2만 파운드를 넷이 똑같이 5천 파운드씩 나누어 갖는다.

신존은 제인 에어에게 함께 선교지로 떠나자고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겐 아무 소명감도 없으며, 애정 없이 하는 결혼을, 가짜 감정을 경멸한다고 당당히 말한다. 신존은 자신의 아내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주님을 거부한 것이며 신앙을 부정한 이교도보다 더 나쁜 자들과 똑같다고 순종을 강요했지만 제인 에어는 끝내 거부했다. 그리고 그를 떠났다.

제인 에어가 손필드 저택을 다시 찾아가 보니 이미 불에 타버리고 검게 그을린 폐허만 남았다. 그리고 숲속 깊숙이 틀어박혀 있는 펀딘 저택에 있는 로체스터에게 간다. 그는 화재로 두 눈과 왼 팔을 잃었다. 한 쪽 눈은 명암 정도만 구별할 수 있었다. 둘은 바로 결혼하고 로체스터는 런던에 있는 저명한 안과의의 진찰을 받고 한쪽 눈의 시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둘은 아들을 낳고 오래오래 행복했다는 이야기다.

제인 에어를 그렇게 괴롭히던 존 리드리드 부인은 결국 다 죽었다. 그리고 손필드 저택에 불을 지른 버사 메이슨도 죽었다. 하지만 제인의 유일한 친구였던 착하고 똑똑하고 인내심 많았던 번스 헬렌은 그 어린 나이에 아무 죄도 없이 폐결핵으로 죽는다. 번스 헬렌은 잠깐 등장했지만 죽음을 담담하게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이 어른보다 더 성숙해 보여서 지금도 이름까지 기억이 난다.

나쁜 사람에게 좋은 일도 많이 일어나고 착하고 법 없이도 살 사람에게 나쁜 일도 많이 일어난다. 다만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나 자신처럼 내 가족부터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 아무리 내 자식이라도 내 뜻대로 하려고 휘두르는 것은 며느리에게 제사를 강요하면 안 되는 것과 같지 않을까. 나도 아들과 옷 사러 가서 많이 싸웠는데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그랬다. 내 취향과 아들의 취향은 분명히 다른 것인데 아들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내 취향을 강요했던 것이다. 독서는 이렇게 나이만 먹는 나를 철들게 해서 꼭 필요하다고 하나보다.

제인 에어를 읽으며 그녀를 괴롭힌 사람들의 죽음은 쌤통이라 느끼고. 좋은 사람의 죽음과 불행은 마음 아파하는 나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본다면 어릴 때 그렇게 제인 에어를 미워했던 리드 부인과 사촌 오빠인 존 리드도 자존감이 너무 낮았단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결론은 독서를 많이 해서 가장 먼저는 나 자신이 행복하고, 그다음은 우리 가족이 행복하고, 그다음에 부모님을 챙기는 것이 순서임을 스스로 느껴보자는 것이다. 제인에어 덕분에 나의 아픈 과거도 돌아보고 제사가 없어진 지금의 행복을 더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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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서 봄 남프랑스 - 남프랑스에서 한 달 살기
수정 지음 / 지식과감성#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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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과감성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완벽하지도 영원하지도 못할 것 같은 사랑에 임해 있을지라도. 어쩌면 여행이란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나는 사랑에 머무는 일이 아닐까?

나는 방구석 여행을 좋아한다. 돈도 안 들고 힘들게 걷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 관련 도서로 사진 여행을 즐긴다. 책 속으로의 여행은 가이드를 끼고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이 책의 작가님은 다른 곳으로 떠날 때마다 멋진 감상을 적어주셔서 문학의 향기까지 느꼈다. 이 책 제목의 <남프랑스에서 한 달 살기>라는 말은 한 곳에서 한 달간 지내는 것이 아닌 남프랑스의 도시 15군데를 거치는 여정이다.

니스의 몽돌 해변과 칸의 별, 에즈의 언덕과 니체의 산책로, 망통과 앙티브, 피카소와 샤갈, 마르세유의 아비뇽, 액상프로방스, 카르카손의 성과 마을, 아를의 고흐와 님의 거리... 저자는 생각만으로 아득했던 그곳에 함께 존재했고 나는 무작정 저자를 따라나섰다.

먼저 니스(Nice). 나이스로 읽을 뻔. 트램을 타고 마세나 광장으로 간다. 컬러풀한 가로등인 줄 알았는데 가로등 모양이 사람이다. 매우 인상적인 가로등이었다. 이 가로등을 보려면 꼭 밤에 가야겠다. 광장 양쪽 공원도 보인다. 강남 대로의 북적함과는 다른 너무나 한가롭고 여유 있는 시골 풍경 같다.

저자는 샤갈 미술관과 마세나 박물관도 구경하고 장을 봐서 음식도 해 먹으며 독수리 둥지라는 별명을 가진 에즈(Eze)로 간다. 천연 요새 마을이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성 안이 전부 식물로 둘러싸여 식물원을 이루고 있다. 거칠고 척박한 에즈의 골짜기와 지중해의 바다. 삶이라는 산을 오르고 운명의 대지를 돌아왔어도 마침내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저자의 표현까지 일품이다.

그 유명한 니체의 산책로를 걸으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니체의 말도 떠올린다. 니체의 산책로는 고되고 가팔랐다고 한다. 땀도 많이 흘리고 물건도 잃어버리고 갈증도 느꼈다는 곳. 니체는 왜 이런 곳을 산책한 것일까? 힘듦도 즐겼을까?

앙티브(Antibe). 새로운 마을에 도착하면 이른 아침의 산책이 흥미롭다. 운동하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카레 성채가 보이는 길을 걸었다. 600년 전부터 제노바 가문의 성채였던 곳이 피가소 미술관이 되었다. 앙티브 고고학 박물관 앞 지중해를 바라보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변 길을 산책하노라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 같다.

대학가 마을로도 알려진 액상 프로방스(Aixen Provence)는 미라보(Mirabeau) 거리의 시작을 알려 주는 로톤데 분수를 지나자 정겨운 시장의 소리가 들린다. 세잔(Paul Cézanne)과 인연이 깊은 생트 빅투아르 산과 산책로가 이곳에 있다. 세잔은 오로지 작품만을 위해 최대한 자연광이 많이 들어올 수 있게 작업실을 설계했다고 한다. 나는 이곳의 아기자기한 시장 풍경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이탈리아와 국경을 마주한 레몬의 도시 망통(Menton). 이탈리아 땅이었다가 프랑스 국경 안으로 들어온 이곳은 이탈리아 같은 프랑스, 프랑스 느낌의 이탈리아라 같았다고 한다. 성당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지그재그로 만들어진 계단이 해변 길로부터 나 있어 그쪽에서 바라보는 성당 모습이 망통의 대표 얼굴이 되기도 한다.

모나코(Monaco)의 국경은 역이다. 경사진 언덕에서 항구로 떨어지는 작은 마을 같은 이곳은 한 나라다. 배우였다가 모나코의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와 그녀의 이야기로 알게 된 이 작은 나라는 스포츠카와 카지노의 천국인 듯했다고.

앙티브에서 기차로 1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에 (Cannes)이 있다. 칸의 시작은 영화다. 어디로 시선을 주어도 영화의 도시라는 사인이 있다. 칸에서 보트로 15분이면 도착하는 생마게리트섬에는 알렉상드르 뒤마 소설의 모티브가 된 아이언 마스크라고 알려진 죄수가 있던 감옥이 있다. 지금은 해양 박물관이 되었다.

역에서 버스를 타고 생폴드방스(St. Paul Devence)로 오르는 동안에도 예술가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의 명성을 짐작하게 하는 조형물과 작품들이 이곳의 이정표가 되고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돌아도 곧 만나게 되는 도시의 언덕에 샤갈이 잠들어 있다. 이곳에서 20년간 살았다는 샤갈니스에 있던 본인의 미술관을 이곳으로 옮기고 싶어 했을 정도로 생폴드방스를 사랑했다.

기차에서 내리자 아를(Arles)의 론강의 위용이 푸르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고흐의 작품을 닮았다. 빈센트 반 고흐가 약 15개월간 아를에서 남긴 작품은 300여 점이라고 한다. 아를의 태양보다 더 뜨거운 고흐의 열정이 아를을 고흐의 도시로 만들었다. 잠시 고갱과 함께 지냈던 곳도 이곳이다.

아비뇽(Avignon)은 성벽으로 싸인 성곽 도시다. 아비뇽 역에서 내려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를 향한다. 도시 둘레의 반은 강이 흐르고 그곳에는 론강을 건너지 못하는 아비뇽의 다리가 일부만 남아있다. 프랑스의 강력한 국왕 필리프 4세는 교황권을 압도한다. 그래서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고 1305년부터 1377년까지 7명의 교황들이 머무는 아비뇽 유수의 시대가 있었다.

도시의 얼굴은 찬찬히 보아야 아름답다. (Nîmes)의 시장이 서는 날이라는 말을 듣고 산책 겸 나선다. 1세기에 세워진 원형경기장 아레나는 저녁 산책길에 처음 만났는데, 너무 가까운 곳에 있어 놀라고 아름다운 자태에 두 번 놀랐다고 한다. 표정 없는 검은 투우사 동상과 야자수에 묶인 표식이 인상적이었던 곳이다.

향신료 수입지로 번영을 누렸던 몽펠리에(Montpellier)는 13세기에 의과대학이 창설되었던 도시다. 이제까지 보아 왔던 고풍스러움과는 전혀 거리가 먼 현대 건물들이 많은 도시였다. 로마시대부터 지어진 곳곳의 수도교들은 현재도 일부 지역에서는 그대로 쓰인다고 한다. 고딕 양식의 성 피에르 대성당을 보러 갔는데 몽펠리에에서 유일하게 위그노 전쟁 피해를 이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성곽도시의 명성을 듣고 실제로 만나 보기 위해 카르카손(Carcassonne)행 열차를 탔다. 2세기부터 요새화가 진행되어 6세기에 첫 번째 성벽이 만들어졌다. 성벽 위의 전망이 좋은 테라스를 걸어 극장까지 견학하는 가이드 투어도 있다.

툴롱(Toulon)은 프랑스 해군기지가 있는 군항이다. 로마 제국의 군사적 요충지로 지금도 프랑스 지중해 해군 선단의 보금자리이다. 군사 박물관과 유럽 최고 규모의 항구가 툴롱의 지리적 장점을 말해 준다. 케이블카를 타고 북쪽 몽파론을 오르면 툴롱만이 한눈에 보인다. 프로방스 상륙 기념박물관도 있다. 그 시절의 영광과 치열함이 잠들어 있는 도시이다.

이른 아침 마르세유(Marseille)에는 어선들이 항구에 정박하고 새벽에 잡아 온 생선을 팔고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역사가 긴 항구의 이름은 그리스 선원들에 의해 '마살리아'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의 마르세유.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배경이 된 섬이자 요새인 이프성칼랑크로 이어지는 해안선을 따라 하얀 바위 절벽이 끝도 없다.

바다나 호수의 좁은 물 어귀라는 뜻의 '칼랑카'에서 유래된 이름이 마르세유와 카시스를 잇는 칼랑크 국립공원이다. 하이킹 코스도 유명하고 워킹투어도 참여할 수 있지만 만만치 않은 루트에 저자는 보트 투어를 선택했다. 2시간의 여행이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나도 저자가 거친 남프랑스 여행 중에서 딱 한곳만 갈 수 있다면 이 보트 투어를 선택하고 싶었다.

무엇을 보려고 무엇을 위해 이렇게 힘들고 먼 길을 왔는가. 고작 돌성과 낡아 가는 마을의 길들을 보러 온 것인가. 무엇을 얻었나. 꼭 와야 했었나. 이걸 봐서 뭐 하려고. 긴 시간과 많은 여비를 들여서 이국의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이런 물음을 던지다 스스로 깨닫는다. 삶을 무엇으로 메꾸어야 하는지 이것이 저자에게는 길을 떠나는 필연이 된 것임을. 여행은 물음의 빈칸을 한 방울씩 채우는 것이었음을. 나도 저자와 함께 했던 행복한 남프랑스 여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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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서 봄 남프랑스 - 남프랑스에서 한 달 살기
수정 지음 / 지식과감성#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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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저자의 감상이 더해져 문학 여행을 한 기분까지 들 정도로 힐링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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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 - 2023 브라게문학상 수상작
프로데 그뤼텐 지음, 손화수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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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책방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고 아무도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을 때.

이 책은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어 가장 먼저 읽을 수 있는 행운을 누렸던 책이다. 가제본 표지에는 제비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뱃사람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 주는 제비는 행운의 상징이다. 그래서 닐스 비크의 오른손에는 제비 문신이 있다.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를 읽기 전에 노르웨이의 피오르 영상을 한번 보고 읽으면 좋겠다. 피오르는 빙하로 만들어진 좁고 깊은 만을 말한다. 주로 노르웨이 남서해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은 피오르 양옆에 자리한 도시와 섬마을을 이어주는 페리 운전수 닐스 비크의 평범한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인 프로데 그뤼텐은 노르웨이 하르당에르 피오르가 끝나는 지점에 있는 작은 도시 오다 출신이라고 한다.

닐스 비크는 15살 때 자신의 첫 배를 가질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머리도 좋으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피오르에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일을 시작한 것을 매우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닐스는 사람들을 돌보고 여기저기로 실어 나르며 행복했다. 때때로 부상당한 사람들과 시신까지 수송해야 했고, 도살장으로 양을 운반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 가족들이 대를 이어 해왔던 가업을 이은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물론 닐스 비크로 끝나게 되는 가업이었지만 말이다.

닐스의 아내 마르타는 뇌졸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닐스에게는 엘리구로 두 딸이 있다. 그리고 루나라는 강아지가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먼저 갔다. 마르타는 어느 날, 아이들이 모두 집을 떠나 독립하면 우리는 무엇이 되는 걸까? 집은 어떤 곳으로 변할까? 하고 닐스에게 물었다. 닐스의 얼굴은 죽은 소를 수거해 갈 트럭을 기다리던 이웃 남자의 얼굴과 똑같다고 마르타가 놀리는 장면이 생각난다.

그렇게 서로 웃고 농담을 주고받고 장난을 치고 하는 행복한 순간들이 모여서 한 사람의 인생을 빛나게 하는 것 같았다. 지나고 보면 슬프고 힘들었던 기억들은 잊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인지 희미해져 버린다. 그 대신 그 중간중간에 아주 잠깐씩 있었던 행복한 짧은 순간들이 빛을 내며 살아난다.

닐스에게는 이바르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택시 기사였는데 음주 운전을 하다 사람을 치어 면허가 취소되고 주유소에서 일한다. 그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왜 착한 동생에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 세월호와 제주 항공기 사건도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이 세상 일을 주관하는 신이 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다. 착한 사람이 빨리 죽고,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도 많이 생기고, 나쁜 사람은 잘 살고, 장수하고, 좋은 일도 많이 생긴다.

나훈아의 테스 형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 형. 먼저 가본 저세상 어떤가요 테스 형.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가요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러냐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이유가 없다고 밖에 대답해 줄 수 없을 것 같다. 닐스 비크도 분노하고 슬펐지만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았다. 부자가 되지도 못하고, 아내와 동생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지만, 그리고 자신도 생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지만, 딸들도 결국 자신처럼 평범함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며 잘 살아갈 것을 믿었을 것이다.

마르타의 꿈은 베르사유에 가보는 것이었다. 닐스 비크도 로마나 런던이나 뉴욕 같은 낯선 도시의 호텔에서 눈을 뜨고 일어나 햇빛이나 비를 맞으며 산책을 하고, 지나가는 검은색이나 노란색 택시를 보며 공기 중에서 사계절을 느껴보는 것이 꿈이었다.

부자가 된다거나 성공을 한다거나 좋은 차를 가지는 것이 꿈이 아니었다. 그저 해외여행 한번 해보는 것이 꿈이었는데 닐스 비크도 마르타도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서 불행했을까? 나는 꿈과 상관없이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해외여행 가보면 좋지만 안 가봐도 그만인 별로 간절하지 않은 꿈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마음속에 해외여행 보다 아름다운 사랑이 충만했다.

닐스 비크는 얼마 전 신문에서 읽었던 아일랜드의 한 철학자가 이 세상에는 동서남북의 네 방향이 아니라 앞뒤 두 방향만 존재한다고 주장한 이론을 생각한다. 지구는 소시지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읽으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앞뒤 두 방향 사이의 거리는 환상이므로 이 세상은 환상이라는 이론이다.

이 세상은 연극과 같아서 우리는 각자 맡은 역할을 하는 배우라고 한다. 그래서 죽을 때 내 역할을 잘 해냈다고 웃을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을 들었다. 인생은 앞뒤 두 방향뿐이고 그 사이의 거리는 환상이라는 이론이 참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든든다. 인생이 환상이면 우리 인생은 바다가 꾸는 꿈이지 않을까? 우리는 바다를 꿈꾸니까 말이다. 이 세상이 환상이고 연극이라면 바다와 나는 물거품일까?

마르타는 닐스에게 말한다. 당신은 배에만 충실했다고. 만약 내가 죽으면, 당신은 하루 종일 배에 있을 수 있으니 좋지 않냐고. 마르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안면도 마비되고 그렇게 된 자신이 속상해서 한 말인 것은 안다. 나도 회사에만 충실한 남편에게 회사랑 결혼하지 왜 나랑 결혼했냐고 투정한 적이 있다. 아마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였던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니 자꾸 남에게서 무언가를 찾는다. 나와 끝까지 함께 할 친구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나와의 관계가 단단해져야 모든 이유를 나에게서 먼저 찾게 되는데 말이다.

닐스 비크는 배 이름도 마르타라고 짓고 아내도 너무 사랑하고 페리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일도 사랑했다. 아내가 먼저 떠나자 혼자 있는 풍경이 너무 낯설어 생의 마지막 하루를 앞당긴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닐스 비크가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면 페리와 함께 조금 더 아름다운 자연과 인생을 즐기다 갈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을 먼저 사랑했다면 딸들에게도 고민을 들어주는 좋은 멘토 아버지가 되었을 것 같다.

옮긴이 손화수님의 말에서 작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프로데 그뤼텐의 작품은 높지 않아 어렵지 않고 화려하지 않아 빠져들게 되며 깊고 인간적이라고 한다. 정말 이 작품은 어려운 은유도 없이 아주 쉬운 언어로 쓰여 있다.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를 통해 드문드문 생각나는 생의 장면들을 툭툭 던진다. 갑자기 아내 얘기를 하다가 죽은 동생 이야기를 하다가 동네 개들을 너무 잔인하게 죽였던 페리에 태우고 싶지 않았다는 경관 이야기도 하다가 홀로 자식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죽기를 선택했던 이웃 이야기도 하다가 아내 마르타를 사랑했던 기자 이야기도 나오고 이야기는 어떠한 형식의 구애됨 없이 전혀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지 않게 순서 없이 전개된다. 이토록 평범한 남자 닐스 비크의 이 세상에서 마지막 항해 속 조각난 이야기들은 조개 속에 있는 진주처럼 평범함 속에 특별함을 간직한 채 저마다 아름답게 빛을 내고 있었다.

우리의 삶은 생명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잠시 머무르고 거쳐 가는 작은 쉼터일지도 모른다는 손화수님의 표현도 참 좋았다. 이렇게 아프고 힘들고 괴롭고 고단한 인생을 쉼터로 비유를 하니 그 힘들었던 인생 중에 중간중간 찍혀 있는 행복했던 쉼표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쉼표는 우리 인생을 쉼터로 만들어 주는 아주아주 작고 평범한 빛나는 사랑의 순간들이었다.

여기 내 얼굴이 있있다. 수면처럼 주름진 얼굴. 나는 닐스 비크, 내게는 배가 있다. 존재해왔던 내 얼굴은 이제 더는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속도를 잃고, 허공을 표류하다 물이 된다. 나의 대부분은 물로 이루어져 있고, 내 얼굴은 다시 물이 될 것이다. 내 사랑,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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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부터 시작된 마음의 여정 - 누구나 갖고 있는 우리들의 가족 이야기
김명준 외 지음 / 지식과감성# / 202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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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과감성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일상 속에서 은은히 생기는 편안함과 믿음. 집은 서로의 부족함을 이해해 주고 안아 주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내 편과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곳이다.

이 책은 평범한 아홉 명의 저자들의 특별한 가족 이야기다. <집에서부터 시작된 마음의 여정>이라는 제목이 좋아서 읽게 되었다. 집은 그저 건물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 집, 내 집, 행복이 꽃 피는 집 등 뭔가 다른 말이 앞에 붙으면 갑자기 집이라는 단어가 온기를 띠게 된다. 이 책 제목에서의 집은 사람마다 다양한 온도를 지니고 있기에 아무런 수식어도 붙지 않은 것 같다.

솔로의 삶을 살지만, 완벽하지 않은 가족이라도 가족이 있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김명준 작가님, 믿을 수 있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편안하고 좋은지 느꼈다는 김지수 작가님, 마음의 모양은 동그라미라는 박성호 작가님, 내가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가족과 다시 만나고 싶다는 박훈민 작가님, 교회를 통해 온 가족이 구원 받은 파란 만장한 삶을 사신 심종하 작가님, 친정과 시댁 모두 제사를 지내지 않아 명절 때마다 여행을 한다는 이경미 작가님, 엄마와의 관계가 쉽지 않았던 임종미 작가님,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특별한 여행을 한 오세환 작가님 그리고 요리 잘하는 남편과 행복한 오아름 작가님의 가족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우리 가족을 한번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나는 싱글로 사시는 분과 명절 때마다 친정식구 시댁 식구 함께 여행을 간다는 분의 이야기가 제일 부러웠다. 결혼하자마자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나는 남편과 허구한 날 싸우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아버님이 실버 하우스를 들어가시고 그렇게 쉽게 없애버린 제사를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지냈는지 지나온 세월이 너무 억울했다. 제사가 없어지자 명절에 처음으로 가족 여행도 가게 되었다.

제사를 좋아하는 며느리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제사 음식을 만들고 가족끼리 모여서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이 너무나 행복한 며느리가 있다면 나는 그분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요리하는 것 자체가 싫다. 지금도 남들이 해주는 음식이 맛있다. 라면 하나도 남이 끓여줘야 맛있다. 그래서 명절 때만 되면 명절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아팠다. 지금 같으면 시아버님을 설득해서 제사를 없앴겠지만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어른들이 말씀하시면 설령 틀린 말이라 해도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은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임종미 작가님의 이야기가 더 와닿은 것 같다. 나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단 것, 내가 행복해지는 게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행복해지기 위한 제사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며느리와 아들이 싸우면 손자까지 피해를 입고 시아버지 혼자서만 행복한 제사는 없애야 하는 거였다. 엄마 아빠가 명절 때마다 싸우니까 아이는 불안해서 손톱을 물어뜯어서 손 끝이 다 뭉툭해져 버렸다.

아들과 며느리가 싸우면서 억지로 마련한 제사상을 받으며 돌아가신 시어머니는 그래도 행복하셨을까? 뭉툭해진 손주의 손을 보며 그래도 제사상을 받고 싶으셨을까? 나는 세상의 모든 며느리들에게 제사를 강요하는 문화는 사라져야 하는 악습이라고 생각한다. 제사를 없애고 가족끼리 외식을 하거나 가족여행을 가야 마땅하다. 물론 진심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좋고 즐겁다면 그 분은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맞다.

나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친정에 오빠도 있지만 우리 집에 제사는 없다. 기독교도 안 믿는데 제사를 안 지낸다. 그저 각자 알아서 그리워하면 된다. 어제가 엄마 기일이어서 남편과 엄마 이야기를 하며 술 한잔 나누었다. 이게 진짜 제사가 아닐까. 그 누구의 희생도 필요하지 않은. 그래서 돌아가신 분도 살아 있는 사람도 함께 행복한 마음으로 그리워 하는 제사.

이 세상 모든 며느리들이 책도 많이 읽고 똑똑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신의 행복을 양보하면서 자신의 건강까지 희생하면서 그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의미 없는 열녀문 같은 삶을 살지 말았으면 좋겠다. 임종미 작가님도 말한다. 이제는 내가 선택하고 싶다고. 그리고 나와 같은 딸과 아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자신의 자녀는 공부는 못해도 되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을 느끼는 사람, 부모는 항상 자신의 편임을 알 수 있는 사람,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부모인 사람, 본인이 어떤 모습이어도 부모는 나를 사랑한다고 믿을 수 있는 관계를 가지고 싶다고 한다. 엄마와 아빠가 주는 사랑만큼은 충분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주고 싶단다. 나도 이미 다 커버린 아들이지만 뭉툭하게 다 닳아 손톱이 거의 없는 아들 손을 이제라도 따뜻하게 잡아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아홉 명의 작가님들의 다양한 색깔의 가족 이야기를 통해 나보다 더 힘들게 산 인생 이야기를 통해 이제는 나도 나의 가족과 함께 인생을 캠핑처럼 즐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족끼리 아픔을 나누고 상처를 직시하기만 해도 힐링이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지금의 행복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고 과거의 아픈 상처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려는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해 준 나에게 찾아온 소중한 선물이었다.

밤이 되면 캠핑의 하이라이트인 장작불을 피워놓고 가족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사소한 대화에도 마냥 행복한 웃음이 나온다. 자연 속에서 새소리와 함께 맞이하는 아침도 상쾌하다.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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