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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귀와 입 그리고 코
곽흥렬 지음 / 맑은샘(김양수) / 2024년 10월
평점 :
미치지 않고서는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무엇이든 한 가지라도 제대로 미쳐야 일가를 이룬다.
팔방미인이 뭐든지 다 잘한다는 좋은 뜻인 줄 알았는데, 하나라도 깊이 있게 잘 하는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반풍수라고 한다. 나는 반푼수의 오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푼수가 아니라 풍수지리설의 풍수다. 반풍수란 풍수지리를 반만 아는 서툰 풍수가를 말한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할 때 선은 서툴다는 뜻이다. 반풍수나 선무당이나 어설프다는 뜻. 평생 수필 하나만 고집해온 작가님은 수필에서 일가를 이뤄 내셨다. 반풍수가 아닌 풍수지리 전문가인 지관이 되신 것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결코 내용이 가볍지 않은 글들을 읽다 보면 제대로 미친다는 말의 뜻이 느껴진다.
이 책에는 50편의 짧은 수필들이 실려 있다. 저자는 곽흥렬(郭興烈)이다. 곽홍렬이 아니다. 나도 처음에 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손홍민 선수라고 알고 있었는데 손흥민(孫興慜)인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손흥민 선수님께 죄송.
책 속에는 내가 처음 접하는 예쁜 우리나라 말과 한자어가 수두룩하다. 예전에 <토지> 1권을 읽다가 모르는 말들이 너무 많아 단어를 찾아가면서 읽었는데, 1권에서만 677개가 나왔다. 이 책도 만만치 않았다. 단어를 검색해가면서 읽으니 공부한 느낌이 들어서 뿌듯했다. 그래도 끝부분은 모르는 단어가 별로 없어서 술술 읽힌다.
이 책의 제목은 왜 <눈과 귀와 입 그리고 코>일까? 이 책에 실린 수필 제목도 아니었다. 이 네 가지는 피부와 함께 오감에 속한다. 오감은 우리와 외부 세계를 연결해 준다. 이 눈, 귀, 입, 코를 이 책에서 다 느껴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 편 한 편의 수필을 통해 인생을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삶의 향기도 맡을 수 있어서? 인상적이었던 수필 몇 개를 가져와 본다.
어릴 때 친구들과 위조지폐를 그려서 구멍가게로 갔다. 그 지폐를 받은 주인은 한쪽이 그만 불에 그슬렸다며 추운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고 반값만 쳐 준다고 했다. 그러고는 과자랑 사탕이랑 빵이랑 이것저것 골라 누런 종이봉지에 하나 가득 담아 주셨다. 그게 지폐가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았을 텐데... 이때의 따듯한 배려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한다.
탈옥수 S는 라면 한 개를 훔친 죄가 불씨가 되어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고,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은 빵을 훔친 죄로 평생을 쫓기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이때 그 구멍가게 주인 같은 어른을 만났다면 이들의 삶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구멍가게 사장님의 훈훈한 인정이 거름이 되어 이렇게 아름다운 수필을 쓰는 작가님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벙어리장갑은 언어 장애인에 대한 비하의 의미가 담겼다고 순화된 말로 부르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손 모아 장갑, 엄지 장갑, 주머니 장갑 등이 후보로 나왔는데, 생긴 모양부터 손가락 사랑 표시를 닮았으니 사랑표장갑이라고 부르면 어떠냐고. 정말 벙어리장갑을 두 짝을 모으면 하트 모양이 된다. 앞으로 나도 벙어리장갑을 낄 때마다 사랑표 장갑이라고 불러줘야겠다.
술은 백약의 으뜸, 만병의 근원이다. 그러고 보니 술만큼 평가가 극과 극인 건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흥이 많은 민족이어서인지 술에 대해서만은 아주 관대하다. 낮 술을 먹고 당당하게 운전하는 분들도 많이 보았다. 하지만 아직 음주 운전은 죄악이라는 사회적인 인식보다 조금 먹고 운전할 수도 있다는 인식이 더 많다. 낮술 환영, 만취 감사합니라는 문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술을 먹고 운전대를 잡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맥주 한 잔이라도 마셨으면 무조건 택시를 타자.
음주 운전자 가중처벌 법인 윤창호 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변화는 미약하다. 음주 운전을 하는 사람을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는 제도를 마련해서 너도 나도 술 먹고 운전하는 차들 사진 찍어서 음주 운전을 뿌리뽑게 되었으면 좋겠다. 음주운전 치사는 실수가 아닌 살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길 바란다. 그리고 저자의 말처럼 술 못 먹는 사람도 그저 먹는 사람과 다를 뿐인데 좀생이 소리 듣지 않고 대접받는 세상이 되기를.
고맙고, 고맙다에서 저자는 수필이라는 말만 나오면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고 한다. 왜 하필 수필이냐고 물으면 '무조건 무조건'이라고 대답할 거라는. 좋아하는데 긴 말은 필요 없고, 그냥 무조건 좋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서평을 쓰는 것도 시간도 많이 걸리고 너무 어렵다. 이렇다 할 내 의견도 없고 할 말도 별로 없어서 글쓰기는 외국어 배우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수필을 쓰면서 행복한 작가님이 멋있고 부럽다. 나도 이렇게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참 좋겠다.
유능제강 약능승강柔能制剛 弱能勝強이란 부드러운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기고, 약한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이다. 노자의 스승 '상종'은 임종이 가까워지자 노자에게 내 입안에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다. 이는 다 빠져 없고 혀만 보인다고 하니 스승이 말한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의 전부라고. 살인귀 앙굴리말라를 귀의케 한건 부처님의 자비심이었다.
작가님은 처음 학교에 몸담았을 때 말썽을 피우는 학생에게 부드러움이 아닌 강함으로 회초리부터 들었던 것을 후회한다. 사람 만들어 보겠다는 의욕만 앞선 분별없는 처신이었다고. 나는 그 제자분이 잘 살고 있을 것 같다. 아무리 회초리를 들었어도 아이들은 사랑해서 때리는 건지 자기 승질 못 이겨서 때리는 건지 다 알기 때문이다.
<동숙의 노래>는 나도 들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동숙'이 실존 인물인 것은 나도 몰랐다. 동숙은 평생 일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다 서른이 가까워서야 검정고시로 중학교를 졸업한다. 그러다 검정고시학원 선생님과 사랑에 빠져 돈까지 모두 그에게 바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은 약혼자가 있었고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따져 묻자 선생님은 네가 좋아서 날 따라다녔다며 등을 돌린다. 동숙은 부모에게도 남자에게도 철저하게 이용만 당했다. 배신감이 극에 달한 동숙은 수업 시간에 들어가 선생님 가슴에 칼을 꽂는다.
동숙은 죄인이 되었지만 아마 선생님은 상처 치료하고 결혼해서 잘 살았을 것이다. 결국 동숙은 돈도 날리고 자기의 인생까지 다 날린 셈이다. 그런데 이때 동숙이 분노를 승화시켰더라면 어땠을까.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을 줄이야.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게다가 꽃 길까지 깔아줄 테니 밟고 가시란 거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며 용서하는 것만이 진정한 복수가 아니었다 생각해 본다.
장수, 축복일까 재앙일까. 나는 평생 자식들 신세 안 지고 죽을 때까지 먹고살 수 있을 때만 축복인 것 같다. 주위에 보면 요양원비, 실버타운 비, 병원비 등으로 하우스 푸어가 아닌 부모봉양 푸어가 점점 늘고 있다. 요즘은 부모님 실버타운 보내야 효자 소리를 듣는다. 그래도 모시고 사는 것보다는 돈을 쓰는 게 서로 행복한 것은 사실이니 절약만이 살 길인 듯하다.
진짜 재앙은 모아놓은 돈도 없고 자식도 없고 집도 없어서 정부 보조금만으로 살아야 하는 건강한 어르신들이다. 그러다가 건강까지 잃으면 더 큰 재앙이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국가 중 1위다. 예전에는 자살률도 1위였는데 정부와 사회, 그리고 국민 모두의 노력으로 점점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노인문제 역시 노인 일자리 창출 등 다 함께 노력한다면 반드시 줄어들 것이다.
초저출산 문제도 심각하다. 정부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동참해야 할 사회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기 기저귀가 아닌 노인 기저귀가 더 많이 팔린다니... 청년 고용도 확대하고, 정부도 지원하고, 사회단체도 지원해서 아이를 낳으면 안 낳은 것보다 혜택이 아주 많아지면 너도 나도 낳지 않을까.
친구에게 산부인과 병원비, 산후조리원, 기저귀와 분유값, 양육비에 어린이집과 유치원도 다 무료면 너도나도 다 낳지 않겠냐니깐 그 돈 니가 댈꺼냔다.
우리는 한다면 하는 저력이 있는 민족이다. 직장 어린이집은 물론 가정과 직장을 양립할 수 있게 해서 여성의 경력 단절도 방지해야 한다. 시간제나 재택근무도 활성화시켜 육아를 다 같이 도와야 한다. 다 함께 하면 안 될 일도 된다.
우리 인생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작고 소소한 소재들이 이렇게 수필이 되어 추억을 소환했다가 함께 궁금해하기도 했다가 고민도 해보았던 시간. 햇볕 좋은 봄날 소풍 가는 기분이 들게 한 수필집이었다.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