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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와 호리병
고수아 지음 / 미문사 / 2026년 4월
평점 :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은 중년, 인생 해방 에세이집이다. 나는 저자가 앵무새 25마리를 키우는 것도 놀라웠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혼자 병간호를 도맡아 했다는 이야기가 정말 감동이었다.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 조금 알기때문이다. 저자의 깊은 철학과 여유로움은 힘겨운 삶을 견뎌낸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저자는 호리병을 깨뜨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의 방향을 바꾼다. 정말 호리병을 깨야 하는지, 애초에 호리병이라는 구속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오리가 나라면 호리병은 나를 가두는 사회적 틀이다. 불교 선종의 유명한 화두인 "병을 깨지 않고, 오리도 다치지 않게 꺼내는 방법"의 답인 "이미 나왔다(出也)"는 말은, 호리병이라는 구속이 내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임을 깨닫는 순간 바로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오리와 호리병』의 기원에 대해서는 책 속 부록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1. 착한 아이라는 호리병
<분노와 자책의 시계 추>를 읽으며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엄마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옛날 생각이 나서, '과녁은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화살을 쏜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고통을 끌어안고 그 자리를 지킨다'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엄마에게 쏜 화살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엄마도 자식의 화살을 받아내는 게 사랑이라는 호리병에 갇혀, 아프다는 말도 못 한 게 아니었을까? 그게 엄마의 사랑이었음을 이 글을 읽으며 깨달았다.
2. 호리병에 생긴 작은 틈
저자는 오랫동안 착한 사람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삼키고, 양보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호리병에 금이 간 자리를 발견한다. 그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저자는 '만인에게 괜찮은 사람이 되려다 나를 잃는 것보다, 서툴더라도 인기 없는 나로 남겠다'고 선언한다. 타인의 찬사가 사라진 자리에도 남아 있는 그것이 나만의 고유한 빛이라며. 스스로 타오르는 것만이 끝내 자신의 궤도를 지킨다.
3. 뻰치 철학의 탄생
저자는 니체의 망치 대신 뺀치를 들었다. 저자가 말하는 뺀치 철학은 타인의 시선, 지나친 배려처럼 오랫동안 내 안에 박혀 있던 못 들을 조금씩 흔들고 제거해 나가는 과정이다. 자신을 가두는 고정관념과 편견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철학이다. 나는 뺀치 철학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지만,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생각을 하나씩 내려놓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에게 무엇을 더 가져야 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게 했다.
4. 나를 향해 걷는 중년
중년은 삶의 불행과 한계를 받아들이며 자기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나이다. 저자는 희귀병을 앓던 소년 매티 스테파넥을 통해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매티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살면서도, 운명을 탓하기보다 "왜 내가 아니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불행을 나만 피해야 할 예외로 여기지 않고 고통 속에서 행복을 찾아낸 것이다. 나를 향해 걷는다는 건, 불행마저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 매티가 불행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호리병 속에 가두지 않았던 것처럼.
5. 해방 그 이후
해방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정확히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저자 역시 무작정 버티는 대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슬픔과 분노를 이해하려 했다. 슬픔이든 분노든, 이름을 붙이는 순간 감정은 두려움이 아닌 삶의 일부가 된다. 해방이란 무엇이 중요한지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비운다는 것은 욕심을 버리는 게 아니라, 내가 진짜 원하는 삶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다.
저자는 나에게 불행을 없애는 법이 아니라, 불행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었다. "왜 하필 나인가"라는 질문에 갇혀 있다면, 이 책이 호리병 밖으로 꺼내줄 것이다. 삶이란 질문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고 질문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 삶이 달라진다. 호리병을 깨뜨릴 필요는 없다, 이미 밖에 나와 있다는 사실만 깨달으면 된다. 이젠 나를 바꾸려 애쓰기보다 나를 먼저 이해해 보기로 했다. 남보다 나은 삶이 아닌 나다운 삶을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