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소멸
한동일 지음 / 그린스트로우 / 202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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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청춘의 소멸』에 실린 세 편의 단편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저항 대신, 조용히 자신을 소모하며 각자의 자리를 견딘다. 이 책은 그 소모의 시간을 기록한 소설집이다. 그래도 청춘이 있기에 소모가 가능하지 싶다. 노년에는 소모할 젊음이 없으니까.


나태주 시인은 이 책을 두고 "거짓 없는 내용과 삶에 대한 철저한 증언"이라고 평했다. 문학적인 표현이 많은데도 이상하게 술술 읽히고 이해가 되면서 공감이 가는 작품이었다. 게다가 포켓 사이즈라 손에 쏙 들어와서, 들고 다니며 읽기에도 참 좋다.


책에 있는 표현이 너무 좋아서 페이지를 따로 밝히지 않고 옮겨 적은 부분이 많다. 줄거리보다 표현을 따라가며 읽었다. 


1. 청춘의 소멸 

-도시의 청춘에게

도시에 사는 청춘은 도시를 떠날 수 없고, 끝까지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도시는 성공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역시 도시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야 했다. 생존을 위해 나는 매일 나를 조금씩 떼어 도시에게 줘야 했다. 내가 나를 떼어내 바치지 않으면 금방 다른 누군가가 나를 대체해 버린다.


도시로 오기로 결정한 것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능동적이지 못했다. 마음을 계속 눌러두면 행동이 엉킨다. 괜찮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불안이 쌓인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내가 나를 조금씩 망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어머니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혼자 버려둔 시간만큼, 나도 도시에서 청춘을 소비하며 어머니의 외로움을 외면했다. 어머니는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아버지를 위해, 내가 태어난 후에는 자신의 전부를 내게 헌신했다.


대부분 우리들의 삶이 이런 것 같다. 타인의 기대를 위해 나를 소모하는 삶. 나도 나 자신보다 늘 아이와 가족이 먼저였으니까. 그렇게 청춘이 소멸되어 가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증권사에 다니던 친구 O는 자살했다. O와 억지로라도 웃으며 이야기했으면 어땠을까? 어머니가 두통을 호소했을 때 심각하게 생각했으면 어땠을까? 그녀가 회사를 옮긴다고 했을 때 그러라고 말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차라리 도시에 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능동적으로 변한 줄 알았던 나는 여전히 수동적이었다는 주인공의 고백을 통해 나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능동적으로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사회의 관습과 예절, 주위의 기대,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는 말을 따라 살았던 수동적인 삶이었다. 


주인공은 어디로 가야 하며 어떤 것이 올바른지 모르겠다고,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돌아간다.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p.113죽음을 내 옆에 둔 순간부터 도시를 버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뒤에서 바라보기로 결정했다. 도시는 누군가로 대체되어 또 흘러갈 것이다. 돌아가야겠다. 이곳에서의 실패를 오롯이 청춘에게 돌리고 이제는 돌아가야겠다.



2. 구류 3일

유명한 화가 E 씨와 그의 아내, 그리고 이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러 온 소녀가 있다. 세 사람은 하루에 몇 시간씩 거실에 앉아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 고립된 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 


저자는 자화상을 즐겨 그렸던 실존 인물 에곤 실레(Egon Schiele)에게 강렬한 나르시시즘을 투영하여, 자신 외에 타인을 화폭에 담지 못하는 소설 속 화가 E를 만들어 냈다.


소녀는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화가에게 화가 나서 누명을 씌워 성범죄로 고발한다. 신문에는 유명 화가 E 씨가 미성년자 성범죄 혐의로 피소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사람들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화가가 처벌받기를 원한다. 담당 형사는 운 나쁘게 걸려든 것뿐이라고, 소녀는 이 고발만으로 화가에게 충분한 치욕을 줄 수 있음을 알고 있다고 알려준다. 


재판에서 판사는 화가가 법정의 존엄을 훼손했다며 구류 3일에 처했다. 동네 사람들은 화가의 집에 몰려가 그동안 자신들에게 그려줬던 그림을 태워버린다. 화가도 모든 그림을 벽난로에 던져버리고 마을을 떠난다. 그 후 화가는 정말 죽었을까? 나는 어딘가 이런 사이코 소녀가 없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곳에서, 마음 편하게 그림을 그리며 아내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것 같다.


이 작품은 옐로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 즉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자극적이고 비도덕적인 보도를 일삼는 언론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기에 쉽게 선동되는 대중, 대중에 의해 파괴되는 예술가의 비극. 


선을 악으로 갚아도 유분수지, 내 마음을 안 받아준다고 당신 인생 통째로 밟아버리겠다는 건 무슨 심보인지? 자기감정을 타인의 파멸로 해소한 소녀가 얄밉다. 화가의 무죄가 밝혀져, 소녀는 한 가정을 파괴한 괴물로 사회에서 매장을 당해야 한다. 옐로 저널리즘이 방향을 틀어 소녀에게 향하길 바랐다는. 



3. 책

주인공이 출판사에 원고를 맡겼다. 그 출판사는 작가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고 맘대로 출판을 해 버린다. 하지만 그가 깨달은 것은 타인이나 출판사가 아닌 자신의 책을 통제하지 못한 점이었다. 그에게 책은 자신의 완벽함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p.195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에는 남자의 리듬만 남았다.


수백 수천만 명이 사는 대도시에서 나를 찾는 사람은 없다. 오직 고독만이 그의 곁에 머문다. 청춘들은 도시의 부속품이 되어 조용히 소모된다. 


우리의 비극은 청춘의 꿈에서 시작됐다. 부모님이 희망하는 삶이 정답이라 믿고 살았다. 자식이 자신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랐던 부모님의 마음은, 부모님의 기대를 이루기 위해 달려야 하는 청춘들의 굴레가 되어버렸다.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살려 애쓰며 청춘은 서서히 소멸해 갔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패배한다. 「청춘의 소멸」에서는 실패를 인정하고 발길을 돌리는 결심으로, 「구류 3일」은 자신의 그림을 소각하는 것으로, 「」에서는 강박 속에서 스스로를 더 몰아붙인다. 이 모든 패배는 타인과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 묻는 순간이기도 하다.


책 말미의 작가 인터뷰를 보면 고독이 무서워 타인에게 의탁하는 것 역시 자신을 갉아먹을 수 있다고 한다. 나를 마주보기 위해 필요한 건 나다. 우리는 누구나 청춘을 지나 소멸의 길로 나아가지만, 작가는 그 과정을 두려움이 아닌 깊어짐으로 해석한다. 


내 삶은 어땠을까? 어디에서 실패했고, 상처받았으며 왜 이렇게 되었을까? 괜찮다고 하면서 왜 좌절할까? 이 책을 읽으며 각자의 삶을 돌아보고, 조금 더 단단한 자신이 자신이 되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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