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건축왕 정세권 - 집을 지어 나라를 지킨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
김경민 지음 / 와이즈맵 / 2025년 10월
평점 :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북촌과 익선동 한옥마을이 떠오르면서 정세권(鄭世權)이라는 이름도 저절로 기억이 난다. 꼭 이곳이 아니라 한옥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바로 생각날 것 같다. 나는 평소 사람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데, 우리나라를 위해 애써 준 것이 고마워서인지 이름이 그냥 뇌리에 새겨져 버렸나 보다.
우리는 왜 정세권을 기억해야 할까? 고마움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그를 기억한다는 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와 평안함이 일제 강점기 때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이런 숨겨진 위인들 덕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겠다는 것이다.
정세권의 호는 기본 농사(基本農舍)의 줄임말인 기농(基農)이다. 농사는 농업이라는 뜻이 아니고, 살아가는데 기초가 되는 집이라는 뜻이다. 한옥을 통해 민족의 기본을 세우는데 근본이 되는 집을 지어 민족의 삶과 문화를 보전하겠다는 건축 철학이 담겼있다.
기농 정세권은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이자 민족운동가다. 디벨로퍼는 부동산 개발 전문가다. 보통 개발업자라고 한다. 땅을 사서 어떤 건물을 지을지 기획하고, 돈을 마련하며, 설계, 시공사 선정, 공사 관리, 마케팅, 분양 및 임대까지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의 모든 절차를 기획, 총괄하고 책임지는 전문가다.
그는 일제가 주도하는 도시 개발과 토지 정책에 맞서 북촌 일대에 한옥을 대량으로 건설하고 보급한 독립운동가이자 기업가이다. 청계천을 기준으로 위쪽은 북촌, 아래쪽은 남촌이라고 했는데, 일본 사람은 남촌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촌에 모여 살았다.
정세권은 일제가 우리 주거지를 차지하려는 것을 막고, 우리가 살 수 있는 기본적인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북촌에 개량 한옥을 대량으로 보급했다. 서민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으로 분양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었고, 우리의 주거 공간을 지킬 수 있었다. 사람 수가 국력이다!
p.49 아버지는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 정세권의 둘째 딸 고 정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개량 한옥을 다양한 계층의 조선 사람들에게 보급되었다. 그래서 북촌 여러 지역에 건설된 한옥 대단지에는 이전보다 많은 수의 조선인이 거주할 수 있었고, 일본 거주 지역이 남촌을 넘어 북촌으로 확장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디벨로퍼로서의 그는 개발 업자이자 부동산의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 낸 창조자였다. 집값이 올라 많은 서민들이 갈 곳이 없어지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한옥의 규모를 축소하고, 아파트와 비슷한 편리한 구조로 바꾸어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 공급했다.
대규모 근대적 한옥 집단 지구가 탄생한 것이다. 소유자인 디벨로퍼의 입장에서는 10평 원룸 한 채를 소유하는 것보다 5평 원룸 두 채를 소유하는 것이 소득이 더 많았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일본인의 경제력은 조선인에 비해 월등해서, 만약 자본력을 갖춘 조선인 디벨로퍼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일본인들이 북촌 지역의 토지를 대량 구입했을 것이며, 적산 가옥 주택 건설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우리는 북촌 한옥마을이 아니라 대규모 적산 주택 단지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조선인 디벨로퍼들의 존재는 단순히 조선식 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했다는 측면을 넘어서 일제 강점기 경성 내부에서 유일한 조선인 거주 공간이었던 북촌을 지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조선인의 북촌이 있었기에 삼청동 계동 익선동의 근대 한옥 집단 지구가 지금까지도 보존된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 개발 회사인 건양사(建陽社)를 설립했다. 건양사를 통해 공급된 이 개량 한옥은, 전통미는 살리고, 생활은 편리하게 만든 도시형 한옥이었다. 작은 규모의 개량 한옥을 대량 공급한 결과 중산층 이하 서민 계층이 경성을 떠나지 않고 살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경성은 서울의 옛 이름이다.
정세권인 본인이 건설한 한옥의 품질을 검수하려고 한옥 집단 지구를 개발하면 온 가족이 일정 기간 그곳에서 거주했다. 실제로 살아보면서 집의 하자 등을 고치고,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포디즘(Fordism)은 20세기 초반 미국의 헨리 포드가 도입하여 발전시킨 대량 생산 및 대량 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생산 방식이다. 제품과 부품, 그리고 작업 과정까지 표준화하고 단순 반복적인 작업으로 세분화한다. 이렇게 하면 미숙련 노동자도 생산 라인에 투입할 수 있다.
건양사가 개발한 창신동 한옥 집단 지구의 모습은 스케일은 작아도 미국 롱아일랜드 소재 레빗 타운과 비슷한 모양새의 주택을 대량으로 건설한 흔적이 너무 비슷했다.
대량 생산과 비용 절감으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제품의 표준화와 규격화는 필수 요소인데, 한옥을 지을 때 표준화된 규격화를 시도한 점이 놀랍다. 그 덕에 더욱 싼 가격에 주택을 공급할 수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던 조선 사람들에게 건양사의 주택은 구세주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정세권은 신간회, 조선물산장려회, 조선어학회 등을 후원하면서 민족운동의 대열에 참여했다. 정세권은 조선물산장려회관을 직접 건설하여 기증하고, 회관 운영비와 기관지 등 연간 운영비의 반액 이상을 지원했다. 정세권의 재정적 후원과 노력 덕분에 한때 침체했던 조선물산장려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된 것이다.
조선물산 장려회관은 다양한 상공업자들이 상품을 진열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했고 이를 정세권의 건양사가 도맡았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회관에서 팔 수 있는 물건을 모아, 진열관에서 전시하고 판매했다. 생산과 판매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이다.
염매시(廉賣市)는 싸게 파는 시장이라는 뜻으로, 조선물산장려회가 주관했던 행사의 명칭이다. 국산품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할인 장터 역할을 하며 대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조선물산장려회를 민족운동으로 간주한 일제의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해산된다.
정세권의 조선어학회 참여는 목숨을 건 독립운동이었다. 그는 조선물산장려운동 중 이극로를 만나면서 조선어학회를 후원하기 시작했고, 출판업계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이극로의 활동도 전폭으로 지지했다. 안재홍도 가담했는데 이들 모두 조선어학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고문을 당했다.
정세권에 대한 연구는 건축학계에서는 근대식 한옥 집단 지구의 작은 한옥을 건축한 집장사로, 역사학계에서는 조선물산장려회의 재정을 담당한 인물로, 한글학과 인문학계에서는 조선어학회를 후원하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탄압을 받은 인물로 연구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다양한 분야에 흩어져 있던 정세권에 대한 기록을 모아 정세권을 통합적으로 연구해서 이 책 <건축왕 정세권>을 발간했다. 그래서 그가 단편적인 활동가가 아니라, 집을 지어 나라를 지킨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이자 위대한 애국지사이며 민족 운동가임을 온 세상에 알렸다. 이 점에서 이 책이 가진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북촌과 익선동 한옥마을은 수많은 사람들과 외국인 관광객들로 분비는 관광 명소다. 그곳에 혹시 방문할 일이 있다면, 이제는 경성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건설한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이자 민족운동과 정세권을 기억하자. 그리고 이 책과 이 책을 다양한 언어로 번역한 것을 그곳에서도 팔아서 <건축왕 정세권>을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
정세권이 실천한 일들은, 내가 가진 능력이 무엇이든, 그것을 함께 나누고 공유할 때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어떻게 보면 역사책인데 한 인물을 중심으로 누구나 익숙하고 친숙한 장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니 지루하지 않고 더 재밌게 읽게 되었던 것 같다.
큰돈을 가져서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각자가 가진 만큼 내 가까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어찌보면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써서 정세권 선생님이 계셨고 이런 일들을 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작은 일 역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애국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평안함은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유산이다. 우리가 각자 있는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한다는 건, 그래서 나와 내 주위를 밝고 행복하게 만드는 건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행복한 '나'라는 유산을 잘 지키고 나누는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