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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랑만 한다면 우리는 죽을 수 있다 - 페소아의 내면보고서 ㅣ 러너스북 Runner’s Book 2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이준혁 편역 / 고유명사 / 2024년 11월
평점 :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진보하는 것은 죽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는 것은 죽는 것이니까.
고유명사 출판사의 러너스 북(Runner's Book) 2번째 트랙이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처음 들어본 작가다. 다른 이름이 무려 75개나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름이 한 10개만 넘으면 아무리 내 이름이라도 헷갈릴 것 같은데, 페소아는 이 모든 이름을 기억했을까? 포르투갈의 이스쿠두 지폐 모델이 될 정도면 꽤 유명한 사람인 것 같다.
다중인격 문학의 선구자라고 하는데 고전문학과 페미니즘 문학 정도만 들어봐서 어떤 문학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한 작가가 75명의 작가 역할을 했다면 천재인 것은 분명하다. 처음부터 멋진 말이 나와서 롱 인덱스를 붙이면서 읽었는데, 좋은 말이 자꾸만 나와서 결국은 거의 모든 페이지에다 인덱스를 붙여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 쭉 읽고 붙일 걸 그랬다. 공부하다가 중요한 것만 밑줄을 쳐야 되는데 결국은 본문 전체에 전부 밑줄을 그어버린 셈이다. 형광펜 사용하거나 인덱스 붙일 때 참고하시길.
33 Km <오직 사랑만 한다면 우린 죽을 수 있다>
일단 제목부터가 이해가 안 된다. 작가가 표현한 대로 거의 원문에 가깝게 번역을 했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나는 이 점이 참 마음에 든다. 번역가의 의역이 아니라 작가의 원문 그대로를 번역함으로써 내가 페르난두 페소아랑 만나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다.
그럼 사랑을 안 한다면 우리는 죽을 수 없다는 말인가? 사랑을 하건 안 하건 상관없이 우리에게는 죽음에 대한 선택권이 없는데? 있다면 자살일까? 그럼 사랑만 하면 자살을 해도 된다는 소린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에 목숨 걸라는 얘긴가? 이렇게 짧은 제목 하나로도 오만가지 생각을 하다가 결국 나는 "오직 사랑을 실천했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죽을 수 있다"로 결론 내렸다. 아님 말고.
32 Km 잘못된 점을 이야기하라. 말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표현을 하지 못한다. 표현은커녕 얼굴로는 웃고 속으로만 화낸다. 남의 부탁도 왠지 미안해서 거절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해도, 내가 참고 혼자 끙끙거리며 스트레스받는 타입이다. 그런데 페소아는 내가 지금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낫다면 말하라고 한다.
상대방에게 섭섭한 게 있으면 말하고, 혹시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괜히 미루지 말고 깔끔하게 말하고 사과하자. 사람은 원래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른다. 알아서 내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는다. 다만 감정이 격할 때는 바로 말하지 말고, 일단 한 발자국 물러나서 마음을 차분히 한 다음에 감정을 빼고 이야기해야 한다.
나는 이 책으로 존재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잘못된 점을 이야기하면서 살기로 했다. 그래서 서평단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 어떤 분이 서평은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비평가가 아니라 독자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서평을 하시는 분들께 참고하시라고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
페소아는 디테일은 늘 나쁘다고 했다. 그냥 슬슬 읽으면 될 것을... 부족한 점과 모자란 점을 찾으려 하면 어떤 책이든 어떤 글이든 완벽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페소아 역시 고도로 분석적인 정신은 오류만을 본다고 말하고 있다. 내 생각에는 너무 똘똘한 거보다 나처럼 좀 무식한 편이 나은 것 같다. 자기 위안이다.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함으로써 나도 한번 존재해 봤다.
84 Km 보는 것은 앎에 대한 언제나 최고의 은유일 것이다.
이 말도 뭔가 좋은데 이해가 잘 안돼서 나만의 추측을 해보았다. 뉴턴은 페스트가 유행해서 무료하게 사과나무를 보다가 만유인력을 발견했다. 만유인력은 뉴턴이 사과나무를 봤고 거기서 자연의 은유를 발견했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졌다. 이처럼 보는 것은 앎에 대한 최고의 은유라서 그 의미를 찾을 수도 있고 못 찾아도 좋다. 그저 보는 것의 아름다움과 감사함을 느끼면 충분하다. 라이트 형제가 새를 보고 비행기를 발명했듯 자연은 최고의 은유 덩어리다. 사람도 자연이다.
그러면 책은 어떨까? 이 책도 그렇고, 고전이나 문학 작품은 도대체 아무리 읽어도 아무리 보아도 나에게 해당되는 무언가를 찾기가 정말 어렵다. 하지만 괴테 할머니께서(전영애 교수님)는 의미를 찾으려고 너무 애쓰지 말라고 하신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은유로 표현한 것을 굳이 몇 날 며칠 고민하면서 알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렇게 편안하게 마음먹고 자연을 보고 책도 보면 어느 순간 앎이 내게로 다가오지 않을까?
그나마 내가 이해한 문장은 이렇게 3개이다. 나만의 해석이라서 정답은 아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본 이 책은 일단 얇아서 휴대하기 좋고 여행할 때는 부록으로 된 한 장짜리를 가지고 가면 좋을 것 같다. 비행기 안에서 보면 여행과 사색을 동시에 할 수 있어서 스스로 좀 멋져 보일 듯? 다른 좋은 말들도 많은데 도저히 말로는 설명을 할 수가 없다. 나의 얕은 이해력은 요 정도.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을 하다가, 이 책으로 워터 포인트에서 물 한 모금 마시며 쉬어가는 기분을 느껴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