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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aker 관여자
이문기 지음 / 좋은땅 / 2024년 12월
평점 :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너는 누구지?
의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나지막히 들려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마음속 울림 같기도 했고 근방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목소리에게 어떻게 자연의 이치를 다 꿰뚫고 있는 것처럼 나를 가르치냐고,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냐고 물으니 순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연은 순응한다. (p.100)
이 책은 소설가 이문기 집사님의 경험을 토대로 한 논픽션 소설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정민이고 남편은 윤성이다. 두 번의 사고에서 살아난 정민은 결국 오갈 데 없는 상황에 처하는데,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정민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환상과 찬양과 신앙으로 조금씩 성장해 간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존재에 대한 물음은 아직까지 정답이 없다.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왔다면 무엇을 하기 위해 왔는지, 나는 어떤 목적을 갖고 살고 있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김상용 시인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마지막 구절인 '왜 사냐건 웃지요'를 인용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정답은 각자의 몫.
<관여자>라는 제목을 보고, 알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해, 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관여나 참견 또는 개입이라는 말은 별로 좋은 느낌이 아니다. 그래서 관여자라는 제목을 보고 남의 일에 간섭하는 사람을 지칭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 인생에 관여를 해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절대자인 '관여자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이 관여하면 기분 나쁜데 왜 절대자의 개입은 괜찮을까? 아마도 우리가 우리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피조물의 입장이니 말이다. 그래서 자식에게도 관여하면 안된다. 나는 자식을 낳았지 내가 창조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은 아끼고 사랑하면 된다.
나도 잠깐 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다. 어떤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의 가사가 생각난다. 아주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신다는 내용이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내 머리카락 개수까지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 있는데,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 아픔을 헤아려 주신다면 나는 하나님을 믿을 것이다. 내가 죽을 병에 걸렸는데 하나님을 믿어야 살 수 있다면 당연히 믿을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으면 그 어떤 약보다 낫다.
나는 모든 종교와 양자역학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양자역학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무식하게 얘기할 수 있다는 점은 양해를 바란다. 양자역학과 끌어당김의 법칙과 하나님도 같은 것이 아닐까? 종교에서 말하는 것도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겨자씨만 한 믿음을 강조하셨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으면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안 믿으면 없는 것이다. 양자역학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내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없어진다. 그래서 나는 정민의 신비한 체험이 스스로를 살린 소중한 종교적 체험이자 하나님의 도움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처럼 정민의 신비한 체험을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체험은 정민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목사님께서 집으로 오신 날 정민은 마치 예수님이 목사님 모습에 겹쳐 보인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처럼 그럴 수도 있겠구나, 얼마나 황홀하고 신비로웠을까 참 행복했겠다 생각하면 진실이 된다. 적어도 정민과 나에게는 진실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아닐까.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나도 내 주위의 모든 사람도 예수님처럼 귀하고 소중히 대하라는 뜻 같다. 정민이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신 모든 분들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정민은 그 사랑을 다시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어 주게 될 것이다. 그럼 그 도움을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정민 역시 사람의 모습을 한 예수님으로 비치지 않을까?
나는 누구인가?
관여자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이다. 자연에서 와서 자연에 순응하며 잠깐 지구별 여행을 하다 떠나는 여행자이다.
정민은 남편 윤성과 함께 강원도 여행 중에 차가 논에 빠지는 사고를 당한다. 차도 사람도 다친 데는 없었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정민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말한다.
차를 몰고 나갔는데 갑자기 돌풍에 송판 조각이 날라왔다. 피할 수도 없는 상황. 다행히 송판 조각이 범퍼에 박혀 다치지 않았다. 정민은 자신의 몸속에도 송판 조각이 박혀 있음을 깨닫는다. 침묵하는 하늘이 알 수 없는 의미를 담고 내려보는 것 같았다고 한다.
허리가 너무 아파서 좋아하는 볼링도 못 치게 되었다. 집안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열등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아침에 일어날 이유가 있어야 의욕이 생기는데, 왜 밥을 먹어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허망하다. 지친 그녀는 절대적인 신의 존재 앞에 나약한 자신을 인정하며 외친다. "살려 주세요, 하나님!"
검사 결과 종양은 아니었지만 네 군데의 디스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어그러져 있었다. 그때 옛날 같은 동네에 살던 윤희선이라는 친구를 만난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때가 되니 우리를 만나게 해 주신거랬다. 정민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다 믿고 싶었고, 교회 나가면 병이 낫는다는 말에 그녀를 따라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작은 교회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미칠까 염려했던 정민. 주일예배 때 꿈에서 본 광경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남편이 신문사를 퇴직하고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큰오빠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경황이 없는 중에 은행에서 온 우편물은 이자가 3개월이 밀렸다는 내용이었고 집에서 쫓겨난다. 결국 교회 분들의 도움으로 거처를 마련하고, 찬양과 예배로 상처 나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달래며 버텼다. 그러나 교회를 벗어나면 여전히 마음이 아렸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어 공감이 갔다.
동해 여행 중 사고에서 목숨을 건져 주시고, 강변북로 낙하물 사고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관여자로 정민의 생명을 지켜주셨다. 다양한 환상 체험으로 정민의 영혼까지 관여하시는 하나님. 남편의 이중 대출로 집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인생에 관여하고 계심을 알게 된다.
정민은 하나님의 관여하심에 감사하며 영적으로 성숙해 간다. 어느 날, 긴 병마 앞에 나약해진 아버지가 식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는 것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앓아서 짜증 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하나님과 만나며 정민은 아버지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우셨을지 헤아리지 못한 것이 너무도 죄송했다. 어쩌면 이런 안쓰러움과 미안한 마음은 관여자 하나님께서 주신 치유의 묘약이 아니었을까?
앞으로 남은 날들은 정민과 관여자 하나님과의 행복한 동행이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