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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 할머니의 인생 수업
전영애 지음, 최경은 정리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평점 :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 산에 저런 나무가 있고 이 산에 이런 나무도 있구나. 내가 지금 이 나무 밑에 있어보니 기분이 좋네. 뭐 이 정도가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대체 고전 문학은 왜 이렇게 어렵고 이해가 안 되게 써 놓았을까? 내가 고전을 싫어하는 이유다. 늘 첫 부분만 읽다가 포기한 책이 한두 권이 아니다. 고전은 해설서보다 자신이 이해하는 만큼만 이해하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읽기 쉬운 책도 안 읽는데 굳이 고전까지? 그냥 고전을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고전이나 어려운 문학작품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고전이든 한강의 문학작품이든 왜 그렇게 어렵게 썼는지 그 해답을 이 책에서 찾았다. 사람마다 모두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나처럼 어렵게 쓰고 싶어도 못쓰는 사람도 있고, 전문용어만 알고 쉬운 말을 몰라서 쉽게 못 쓸 수도 있고, 한 작가만의 작품 세계의 언어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괴테 할머니의 답은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나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이 나무 밑에 있어보니 이런 기분이 드네'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몇백 년 전의 어느 누구와 만나 나의 세계가 조금 풍요로워지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라고.
세상 사람을 어떻게 다 이해하겠냐는 말에 어찌나 위안이 되었나 모르겠다.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하물며 남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문학을 대하는 태도를 살짝만 바꾸었는데 마음이 편해져서 문학 작품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
문학은 나무다. 이 나무 아래 있었더니 나는 이런 느낌이 드네. 내가 나무의 말을 어찌 알아듣겠냐마는 그저 느껴지는 것으로 충분하다니까 앞으로는 이해가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그냥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쉬어가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괴테 할머니의 인생수업>이라는 제목에 세계적인 대문호 괴테를 통해 어떤 삶에 대한 지혜를 알려줄지 기대하며 읽었다. 엇? 이런 엄청난 가르침이 있다니! 아무것도 안 가르쳐 준다. 정말 내가 경험한 최고의 가르침이다. 괴테 할머니는 그저 괴테의 인생을, 자신의 인생을 수채화처럼 맑고 투명하게 이야기할 뿐이다.
나라는 존재는 남이 키워 줄 수 없기에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힘들고 외로운 작업이지만 고단함과 외로움은 꼭 견뎌야 한다. 그리고 치밀한 계획보다는 10년 정도는 염두에 두고 매일 그날의 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면 된다.
책을 읽다가 몇 군데서 책 읽기를 멈추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도대체 평범한 이야기에 왜 이렇게 울컥하게 되는지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여백 서원과 괴테 마을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괴테 할머니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도 나온다. 이렇게 살라고 갈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만의 길을 가라고 한다. 실패도 하고 길을 돌아가도 괜찮다고. 나도 사기를 당한 적이 있는데, 이것 역시 나만의 길이었고 내가 감당할 몫이었고 또 그렇게 바보처럼 당했어도 괜찮다는 위안이었다. 내가 상처받고 아프다는 것은, 상처받고 아픈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는 것이라고. 괴테 할머니는 묵묵히 나무처럼 곁에서 나를 믿고 응원해 주시겠다고.
뒷부분에 나오는 괴테가 여행했던 기록을 따라가며, 괴테가 느꼈을 기분을 생각하며, 더 정확하게 괴테의 문장을 번역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정말로 한 사람을 깊이 존경하고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는 열정 때문일까. 나도 함께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여행지가 어떤 곳이었는지 검색해 보며 읽었다. 나도 마치 괴테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것 같았다. 사기 안 당했으면 나도 진짜로 따라 걸었을 거다. 하핫.
중학생이던 딸이 눈이 몹시 내리는 날 자기 전 재산을 털어 눈길을 헤치고 가서 사준 만년필로 괴테의 말을 적으며 괴테에게 자기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는 글귀도 딸의 엄마를 걱정하는 예쁜 마음도 감동으로 남는다.
먼 타국에서 딸과 헤어져야 하는 순간 딸이 가방을 뒤지더니 연필을 부러뜨려서 반 토막을 줬다고 한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딸은 "인생에서 힘든 고비를 만나면 글 쓰면서 견디세요"라는 뜻이었을 거라고. 그 덕에 힘든 순간을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괴테 할머니의 보물 1호는 이 만년필과 몽당연필이다. 이렇게 사람뿐 아니라 사물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면, 이렇게 너도 나도 모든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귀하고 가치있게 대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홀레 씨 내외분과의 만남 이야기에 또 감동이 밀려왔다. 1999년부터 2022년 12월까지 1년에 두어 차례씩 괴테 할머니가 관심을 가질 만한 신문 기사들을 모아 보내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분 다 돌아가시자 괴테의 <서동시집> 초판본과 250여 권의 귀중본들을 자녀가 아닌 괴테 할머니에게 물려주셨다. 그래서 더 괴테 마을을 만든 것이기도 하다. 같은 민족이 아닌 진정으로 괴테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물려준 그분들의 진심에 사람이 이렇게 멋있을 수도 있구나...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괴테 할머니는 아이들을 기르면서 이래라저래라 간섭을 못했다. 갈팡질팡하고 옆길로도 가는데 부모가 간섭해서 여기가 바른 길이라고 알려주면 과연 스스로 내면에서 솟아 나오려고 하는 마음이 가려는 길보다 더 좋은 길을 안내해 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고. 아이들이 너무 귀해서 귀한 아이들의 인생에 함부로 개입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다.
요즘은 다 도어록이 있지만 옛날에는 열쇠였다. 부모님이 일하러 가셔서 혼자서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아이를 열쇠 아이라고 한다. 괴테 할머니는 일은 해야하는데, 열쇠 아이로 만들기는 싫어서 문을 안 잠그고 다녔다. 괴테 할머니 집은 그때부터 아이들과 친구들의 좋은 아지트가 됐다. 하지만 독일 친구들은 '열쇠 없는 열쇠아이'라고 놀렸단다. 괴테 할머니는 그렇게 그냥 아이들이 크는 걸 지켜 지켜봤다.
그러면서 짧은 시간이라도 정말 소중하도록 아이와 함께하는 즐거운 추억 만들기를 했다. 함께하는 즐거움을 위해서는 틈이 있어야 한다. 쉴 틈이 없으면 꿈까지 생길 틈이 없다. 아이들의 꿈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시간을 주고 기다려주고 지켜봐 주는 것. 그리고 끝까지 믿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뿌리와 날개 이야기도 참 좋다. 나도 이렇게 아들을 응원해 줄꺼다. 뿌리는 사람을 땅에 발 붙게 하는 것이다. 자기 일은 자기가 하는, 넘어져도 스스로로 일어나고 다시 달리는, 혼자 힘으로 서는 노동이다. 어릴 때부터 튼튼하게 뿌리내릴 수 있게 부모는 사랑을 주면서 한 걸음 떨어져 지켜보며 열심히 응원하면 된다.
날개는 스스로 꿈꿀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피아노를 치라고 닦달을 하면 피아노를 배우는 게 아니라 닦달을 배운다. 꿈까지 주입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서 날개가 돋아나기를, 꿈과 뜻이 자라기를 기다려 주어야 한다. 부모가 대신 달아주면 짐이 될 뿐.
자녀가 스스로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단단히 설 수 있게, 그래서 세상으로 훨훨 날 수 있게 고정관념의 틀에 가두지 말자. 스스로의 인생을 남이 정한 틀에 맞추라고 하지도 말자.
아이가 자기 물건을 잘 못 챙겨서 답답해하는 엄마에게는 뭘 빠뜨리고 가면 낭패인 것을 경험하고, 겉옷을 안 입고 가면 춥다는 걸 배울 것이라고 이야기해준다. 아이는 다른 길을 가보고, 엎어지고 자빠지며 경험을 쌓는다. 그렇게 헤맨 곳이 그 아이의 영토가 된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가 뭐 하나라도 해냈을 때 눈여겨 보고 칭찬하고 격려해 주는 것 정도이다. 아이가 발을 뗐다는 생각이 들 때 구역 하나를 정해주는 일. 이 구역 요만큼은 나 혼자서 책임진다. 그렇게 시작된 세상 한 귀퉁이가 점점 자라나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나이 듦에 대한 철학도 참 여유롭다. 들꽃이 시들지 않겠다고, 혹은 시들면 어쩌나 부들부들 떤다면 참 우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우리도 대자연의 생물 중 하나이니 그냥 정해진 대로 살자고 하신다.
괴테 할머니는 젊어 보이려고 애를 쓰지 않는다. 젊었을 때도 썩 좋은 일이 없었는데, 젊게 보인다고 좋은 일이 생길 것도 아니기 때문이란다. 제일 큰 문제는 젊어지면 또 살아야 되는 것. 이제까지 사느라 얼마나 애썼는데 또다시 살아야 된다니. 그래서 젊어지는 건 절대 사양.
나이 들어 좋은 점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 시간이 부족해서 좋은 점은 안 해도 될 말, 쓸데없는 말을 할 시간이 없는 것. 왜냐하면 좋은 말만 하고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까. 그럼 젊어서 좋은 점은? 좋은 말만 하고 살기에도 시간이 남아돈다는 것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