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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예찬 - 문학과 사회학의 대화
지그문트 바우만.리카르도 마체오 지음, 안규남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9월
평점 :
처음에 책을 읽는 것은 마치 남극에서 불을 붙이는 것과 같다. 최초의 독서는 책과의 친밀함을 데우지도 못하고 불 피우지도 못한다.
나에게 딱 맞는 말이다. 최초의 독서의 불꽃은 곧 이런저런 일상에 묻혀 꺼져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서평단 마감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친밀함도 없던 독서를 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지각의 글쓰기 온도는 0도였다. 처음에는 솔직히 '재밌었다'밖에 쓸 말이 없었다. 그다음에는 책의 내용을 거의 다 베끼고 내 의견을 한 줄 정도 적었다. 지금은 내 생각이 몇 줄 더 늘었지만 아직 서평이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이 책을 읽으면서 이해되는 부분이 조금 생겼다는 것이 엄청 뿌듯했다.
<문학 예찬>은 서로 협력해야 할 문학과 사회학의 관계에 대해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 이탈리아의 리카르도 마체오가 주고받은 편지다.
독서는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인데, 나도 단순하게 읽는 행위라면 잡지책은 많이 읽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생각을 하면서 읽은 적은 없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독서 예찬이라고 하지 않고 문학 예찬이라고 한 것 같다. 탁월한 문학 작품을 위주로 설명하기 때문이 아닐까.
말은 수많은 광고 전단의 문구로 전락했고, 말이 점차 쇠퇴하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다. 어떻게 하면 이 기만적이고 위험한 장난감 나라로 언어를 끌어들이고 있는 이 거센 소용돌이에서 언어를 해방시킬 수 있을까? 정말 똑같은 말인데 어쩌면 이렇게 어렵게 표현을 할 수 있는지 존경스럽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소리가 음악 창조의 일부이듯, 언어는 개념 창조의 일부라고 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마르셀 프루스트나 케이티 페리나 라캉이나 모두 의식이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 싶은 중요한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문학 작품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거나 뭉클한 감동이 느껴질 때인 것 같다.
과거와 미래라는 비실재야 말로 물속의 물고기처럼 담론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붙잡고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실재다. 과거와 미래는 실재하지 않는다. 이 비실재적인 실재를 경험이라고 한다. 경험과 체험이 같은 말인 줄 알았는데, 경험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고 체험은 우리가 그 일을 어떻게 겪고 버텨 냈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체험학습이라고 하지 경험학습이라는 말이 없나 보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조금의 변형도 거치지 않은 있었던 그대로의 선험적이나 경험적 실재는 환상이라고 하는 것 역시 기억이 왜곡되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미래는 상상으로만 존재하니까.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 학교>라는 작품의 주인공은 야콥이다. 그는 하인 학교에서 지배자와의 싸움에서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간단하게 행복에 이른다. 내가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욕구하고 사랑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집안일을 싫어하는데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 이 일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원해서 하는 일로 만들고 그 일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싶은 일로 만들면 더없는 행복에 이른다.
아디아포라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모든 것을 신경 쓰면 피곤하니까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려면 중요하지 않은 일에 스트레스받지 말고 그냥 하고 싶어서 하면 된다. 한용운의 복종이라는 시에서도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라며 내 스스로 원해서 하는 복종을 자유보다 달콤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복종하기 싫지만 마음을 비우고 복종해 보자. 하기 싫은 공부도 즐거워지지 않을까? 어차피 학생들은 공부하는 게 의무니까. 복종해야만 하니까. 매우 어려울 것 같지만 인생 마음먹기 나름이다.
반면 알베르 카뮈는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했다. 야콥도 하인 교육을 받으면서 어떻게 말도 안 되는 명령과 상황에 열받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반항할수록 본인만 더 고통스럽고 힘들어졌다. 그래서 불공정한 명령에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이다. 진심으로 기꺼이. 그리고 그는 복종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문학을 예찬하는 이유는 내가 이렇게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해주기 때문인 것 같다.
옛날에는 대학 나오면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 정년퇴임까지 고체처럼 세상이 탄탄했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액체처럼 유동적으로 흐르고 빠르게 변한다. 이렇게 불안정한 세상을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현대라고 부른다. 자기가 하는 일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앞지르는 것이 성공이다.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사람이 아닌 스크린과 보낸다. 짧은 메시지 교환에 숙달된 사람들은 갈수록 대화의 기술을 상실한다. 사교 기술은 사라지고 친밀한 인간관계도 줄었다. 소속감과 유대감도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지루한 자아의 발견보다 진정한 자아로부터의 도피에 있다. 자신을 파고들기 보다 자신을 다른 존재로 변신시키는 것에 더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가라오케 문화가 생겼다. 일본어로 가라(空)는 비었다는 뜻이고, 오케는 오케스트라의 약자인데 이 둘을 합쳐서 실제 오케스트라 없이 녹음된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노래방이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다. 그러나 늘 과한 것이 문제다. 인터넷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이크를 잡고 다른 사람의 노래를 자신의 버전으로 부른다. 소통보다는 개인의 즐거움에만 빠지게 되는 것이다
베스트셀러 1위는 만화이고, 2위는 소설을 각색한 책이다. 우리는 이해하기 쉽게 정리된 손쉬운 해결책과 전문가들의 짧은 조언을 듣는다. 우리나라에서 웹툰이 인기가 있는 것처럼 일본에서는 휴대폰 소설(携帯小説)이 인기다. 어쩌면 문학이라고 부르기 힘든 문학만이 출판 시장에서 살아남게 될지도 모른다. 작은 아씨들은 작은 뱀파이어 아씨들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좀비 나라의 앨리스로 바꾸어서 말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앨런 커비(Alan Kirby) 교수는 이런 사이비 문화를 '사이비 모더니즘'이라고 한다. 대중의 눈길을 끌기 위해 단순하고 충격적이고 파괴적인 표현을 반복해서 비판적인 사고 능력을 저하시킨다. 가치도 감성도 빼앗기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믿음도 없게 된 세계에서 워너비, 도플갱어, 닮은 꼴, 아바타 등이 만들어 낸 사이비 문화라는 얄팍한 현상은 사회학자에게 흥미와 우려의 대상이다.
세컨드라이프라는 가상 현실 플랫폼에서는 사용자들이 아바타를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 린든 달러라는 가상 화폐로 사용자들은 아이템과 서비스를 판매한다. 우리는 자신의 세계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갖는다. 아무런 위험도 없는 편안하고 안전한 세계다. 에피소드가 맘에 안 들면 다른 에피소드로 가면 그만이다. 나의 아바타는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우리의 판타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액체 현대를 구성하는 유일한 요소는 선택이다.
나도 홈페이지에 가봤는데 정말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았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근본적인 실존적 문제를 다시 공적 의제로 만드는 것이 문학과 사회학의 공동 소명입니다. 이런 문제를 찾아 제시한다는 점에서 문학과 사회학은 일치합니다. 둘은 서로 보완하고 끊임없이 서로 자극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p.265)
문학과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방향을 제시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줄 수는 있다고 본다. 내가 드라마 몰아보기를 하면서 느낀 것은 정말 생각이란 것을 단 한순간도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바우만은 문학과 사회학은 운명적으로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같은 일을 하고 협력할 수밖에 없다. 상상력과 분석이야말로 사회학과 문학의 공통된 운명이라고 한다. 문학은 우리의 삶을 상상력으로 표현하고, 사회학은 문학을 통해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한다. 문학과 사회학이 상호 보완해 간다면 우리의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복잡한 사회 현상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것이다. 결국 이것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 받는 것에서 주는 것으로, 파괴에서 창조로, 상점에서 사랑과 일로 중심을 옮겨야 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로 유명한 주제 사라마구는 "태초에 이 세계는 그저 현상이었고 표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보이는 대로 존재했습니다. 신은 우주의 침묵이고 인간은 그 침묵에 의미를 부여하는 외침입니다." 라고 했다. 신의 의미이자 외침인 인간으로서 오늘 지금이 순간 최대한 행복하자.
♥ 인디캣 책 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