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행위예술가 오를랑은 성형수술 퍼포먼스로 잘 알려져 있다. 오를랑은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총 9회의 성형수술을 하고 그 과정을 행위예술과 미술작품으로 보여주는 작업을 했다. 오를랑은 〈성녀 오를랑의 환생〉(1990~1993)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서양 미술사의 옛 거장들이 그린 명화 속 여성 인물들의 신체를 모방한 얼굴을 만들고자 했다. 오를랑은 다섯 명의그림 속 인물들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가져오기로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이마, 프랑수와 제라르가 그린 프시케의 코,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볼, 16세기 퐁텐블로파 화가가 그린 다이애나의 눈, 그리고 귀스타브 모로가 그린 유로파의 입술이었다. 원래 총10회로 계획된 성형수술은 1993년 12월 14일의 아홉 번째 수술을 마지막으로 종결되어, 결국 이 중 프시케의 코는가질 수 없었다. 오를랑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각각의 부위를 합성해서 서구 미의 전범이라고 할 만한 얼굴 모델을 만들어냈고, 그것을 자신의 얼굴에 적용했다. 1993년 11월 21일 뉴욕에서 이루어진 일곱 번째 수술은 미국 CBS TV쇼인《20/20》이 제작을 담당하고 위성을 통해 뉴욕, 파리, 토론토의 미술관에서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몸은 뉴욕의 수술대 위에 있지만 그러한 몸의 이미지는 시차와 지역을 초월해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해서 <편재〉Omnipresence(1993)라는 제목이 붙었다. 오를랑은 국소마취만 했기 때문에 수술을 하는 중에도 관람객이나 의료진과 대화를 나누거나 텍스트를 낭독하는 등의 행위를 할 수 있었다. 이 퍼포먼스 당시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했던 표현을 패러디해 "이것은 내 몸이다. (…) 이것은 내 소프트웨어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오를랑의 성형수술 퍼포먼스는 여성성, 외모, 주체성과 연관된 몸, 테크놀로지 등에 대해 다양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으로 해석되어왔다(신채기, 2002; 이수안, 2017; 조윤경, 2011; 전혜숙, 2016).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오를랑의 작품은 지배적인 미의 기준에 순응하는 미인을 양산하는 성형수술을 다양한 방식으로 비판한다. 우선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시되는 회화 작품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반복적으로 차용함으로써 서구적 여성미를 비판하는 독특한 정치성을 구현한다. 일반적인 성형수술이 수술하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미를 추구하는 데 반해, 오를랑의 성형수술은 수술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성형수술의 비가시성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결정적으로 아홉 번의 성형수술을 거친 오를랑의 얼굴은 전형적인 미인보다는 ‘괴물‘ 이미지에 가깝다. 관자놀이 양쪽에 보형물을 넣어 마치 뿔이 난 사람처럼 보인다. 일부러 그로테스크한 얼굴을 만들어 자발적으로 괴물이 됨으로써, 성형수술을 페미니스트 도구로 전유하고 페미니스트적 미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오를랑의 성형수술 퍼포먼스에서 몸이 매우 중요하게 부각된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1993년 작품에서 오를랑은 성형수술 후부터 41일 동안 회복 중에 있는 자신의 얼굴을 매일 한 장씩 사진으로 담아 컴퓨터로 합성된 41개의 초상화 이미지와 나란히 붙여놓는다. 몸이 변형되고 수정되는 과정을 가시화함으로써 성형수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몸의 허상 대신 물질로서의 몸, 물질화 과정에 놓인 몸을 보여준다. 더 직접적으로는, 수술 과정에서 추출된 자신의 피를 사용해 그림을 그린다든지, 지방이나 살점 등을 방부액에 넣고 ‘성유물‘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는 방식으로 몸의 물질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런 걸 ‘아브젝트abject 예술‘이라고 부른다. 관객들로 하여금 혐오감이나 불쾌감 등을 느끼게 하면서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주제를 다루는 것이다. 오를랑의 성형수술 장면은 그 자체로도 그로테스크하다. 국소마취로 고통을 느끼지는 않는다지만 얼굴의 일부가 절개되어 속살을 드러내고 피를 흘리는 사람을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몸의 노출이 주는 혐오감은 몸의 물질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 P101
성형수술 환자의 디스포리아는 성형 후 갖게 된 구체적인 몸과 성형으로 갖고 싶었던 추상적인 몸 사이의 불일치 때문에 느끼는 불만족이다. - P146
아, 내가 이렇게 대상이 되는구나. 철저하게 대상화되는 이 경험이 즐거워졌다. 마치 내가 예술품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의사는 예술가이고 나는 작품이다. 그는 지금 내 몸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나는 내가 아름다운 작품으로 창조되는 과정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대상화라는 것이 꼭 부정적인 것일 필요가 없겠다, 이렇게 긍정적이고 즐거운 경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이 상황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통증이 없기 때문이었다. 내 몸이 고통을 느낀다면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끔찍했을 것이다. 조금의 통증이라도 이 즐거운 경험에는 장애물이 된다. 통증을 전혀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 몸을 스스로 대상화하며 이 상황을 기꺼이 즐기고 있는 것이다. - P156
불임클리닉 현장을 연구한 과학기술학자 캐리스 톰슨Charis Thompson이 여성 환자의 행위성과 대상화가 양립 가능하다고 본 이유도 여기에 있다(Thompson, 2005). 의료 절차 중의 대상화는 환자가 합의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정당화된다. 당연히 의사 중심의 대상화, 편의성이나 효율 중심의 대상화, 비윤리적인 대상화 등 여러 논쟁적인 지점들과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나, 요는 의학적 대상화 그 자체가 악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 P164
내가 꼽는 좋은 대상화의 사례 중 하나는 하미나의 <미쳐 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동아시아, 2021)이다. 수십 명의 20대 여성 우울증 환자를 인터뷰한 이 책에는 우울증 환자 당사자인 저자의 경험과 사유가 깊이 담겨 있다. 그가 저자로서 하고자 하는 주장이 무엇인지에 앞서, 대상화의 의도와 목적이 사려 깊게 충분히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에 힘을 더한다. 김초엽과 김원영이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사계절, 2021)도 훌륭한 사례다. 당사자가 아니면 해당 연구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당사자의 이야기가 지니는 특유의 힘을 부인할 수는 없다. 아니 당사자란 반드시 환자나 장애인 등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든 이야기는 당사자의 이야기여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의사, 상담실장, 지식인 남성, 혹은 성형수술을 한 아이의 부모 역시 기술과 ‘다양하게 얽힌 몸‘을 가진 당사자다. 그러한 얽힘이 드러나는 몸과 기술의 이야기가 더 많이 쓰여야 한다. 좋은 대상화의 기본 조건은 연구 대상과 자신의 관계를 드러내, 대상이 되는 당사자의 몸뿐만 아니라 대상화를 하는 자기 몸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형미인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이 책에서 성형한 내 몸과 성형외과를 참여관찰하는 내 몸을 감추지 않는 이유이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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