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성형미인이 되었나 - 강남 성형외과 참여관찰기
임소연 지음 / 돌베개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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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타인의 몸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거침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을 때 드러나는 몸을 애써 가리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옷을 들어서 자신의 가슴이나 배를 보여주고 내게 만져보라고 할 정도였다. 외모에 대해서는 초연한 척해야 하는 세계, 타인의 외모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되는 세계, 그리고 외모에 대한 관심과 개입을 외모지상주의라는 말로 덮는데에 익숙한 세계에 속했던 나에게 자신과 상대방의 몸에 대해서 이토록 격의 없이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문화는 낯선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황스러웠고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이상하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어떤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 느껴졌다고 할까. - P171

이 사회에서 여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그렇다. 여자로 태어나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여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많은 것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화장품, 원피스나 치마, 높은 구두, 상냥한 말씨, 밝은 미소, 몸매 관리 팁 등.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남자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 여기에는 지시에 따라 주어진 업무를 잘 처리하고 고객을 늘 친절하게 응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손목을 잡아끄는 남자에게 못 이기는 척 끌려가는 것까지 포함된다. 나는 그곳에서 그동안 목말랐던 여성성에 대한 갈증을 맘껏 풀 수 있었다. 그제서야 온전히 여자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왜 그전까지 내가 여자임을 의심하고 불안해했는지 알게 되었다. - P178

그야말로 젠더 수행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고 그것은 개인에게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주는가. 젠더는 생물학적 실체가 없고 과학으로 입증되지 않은 신화이지만 신화만큼 강렬하게 실재하는 것도 없다. 그때의 나는 여성성 신화를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마냥 행복했다. 여자가 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실패를 거듭해오던 나는 그렇게 청담 성형외과 탕비실에서, 리셉션 데스크에서, 클럽에서 완전한 여자가 되었다.
흔히 여자는 외모로 평가된다고 하지만, 예쁜 여자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 클럽의 예쁜 누나가 성형외과의 임 코디보다 더 우월한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세명 중 가장 마지막까지 테이블에 남아 있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세명 중 가장 먼저 테이블을 떠나게 된다고 해서 그곳의 남자들보다 우월하거나 그들과 동등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여자로서의 나의 집, 나의 안식처는 남자와 동등하게 경쟁하는 세계에서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나는 끝까지 가보고 나서야, 성형수술의 세계에 얽혀 마침내 사회가 규정하는 여성성을 온전히 수행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여자 됨이 주는 깊은 ‘만족감‘을 여성성 수행에 대한 각성으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깨달은 다른 여성들 덕분이다. 그들은 바로 ‘탈코르셋’ 운동을 주도해온 동시대 젊은 여성들로, 여자 됨에 남자보다 열등하거나 보조적인 역할 혹은 성적 대상화가 필수요건임을 깨달은 이상 그러한 방식의 여자 됨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그들 나이였을 때 화장을 하지 않으면 "초등학교 남자애 같다"는 말을 듣고 나는 더 열심히 화장을 했다. 그러나 ‘코르셋에서 탈출한‘ 요즘의 여자들은 ‘초등학교 남자애’ 같은 모습을 ‘디폴트‘라고 하며 당당해한다. 여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사물들을 몽땅 버리고도, 아무것도 더 하거나 덜 하지 않고 여자로 태어나 살아온 것만으로도 여자가 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들 덕분에 알았다. 남자들과 경쟁하고 그들을 이겨도 내가 여자임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이다.
이 새로운 여자 됨의 핵심은 생물학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젠더 신화에 대한 저항이다. 물론 생물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사회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해온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여자들은 (사회가 기대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고 실제로 그런 여자가 아님에도 여자로 태어난 것만으로 (사회가 기대하는 여자일 것을 기대받고 그런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왔다. 젠더 신화는 보조적이거나 열등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여성스러운 일로만듦으로써 이런 불평등과 차별을 정당화한다.
어찌 보면 그때의 내가 청담 성형외과에서 여자가 되는 오래된 방법을 마침내 실현해본 덕분에 그 후의 내가 여자가 되는 새로운 방법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실현하고자 애쓰는 여자가 되는 완전히 다른 방법은 이렇다. 다른 여성을 돕고 다른 여성에게 도움을 받으며, 서로의 성장과 성공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좌절과 실패에 함께 맞서고 버티는 것. 세대를 넘어 동시대 여성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 함께 이뤄내고 싶은 일이 무척 - P182

성형수술로 효과를 가장 크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물학적인 몸의 변화, 눈에 보이는 겉모습의 변화, 그리고 자신의 외모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의 변화 등에 잘 대처해서 스스로 아름다워졌다고 믿을 수 있는 의지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자기 몸을 스스로 잘 돌볼 줄 모르고 다른 이들의 시선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성인이라고 해도 성형수술은 위험한 선택이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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