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후
박승현 / 북스(VOOXS)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조선, 혹은 대한제국의 황후라고 하면 으레 떠오르는 것은 명성황후이다.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밀어내고 지아비 고종과 함께 권력을 차지하여, 쇄국을 끝내고 개화하며 격동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조선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이웃나라 정치가들의 비인간적인 판단과 그를 실행한 무도한 낭인들의 검에 의해 살해당한 비운의 여인.

 

마지막 황후는 그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씨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훗날의 순정효황후, 막 어머니를 잃은 열세 살 소녀 증순은 권력을 노리는 백부 윤덕영과 빚투성이 망나니인 부친 윤택영에 의해 팔리듯이 황태자비가 된다.

 

당당한 증순에게서 명성황후를 연상하여 기를 꺾고자 하는 이토 히로부미와 그 뜻을 받아 움직이는 상궁들. 이미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한일합방이 눈앞에 있는, 바람 앞 등불 같은 처지의 왕실에서 새 황태자비는 전혀 존중받지 못한다. 아군이라고는 증순과 기묘한 인연을 맺게 되어 시종무관으로 함께 궁에 들어오게 된 나석중, 힘없는 일개 나인이지만 최선을 다하여 증순을 돕는 나인 성옥염 뿐.

 

"나, 나도 훌륭한 왕이 되고 싶었소. 하, 하지만 그때는 이미 국운이 쇠잔할 대로 쇠잔하였소."

"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욕을 참고 왕실을 보, 보존하는 것 뿐이었소. 일본으로부터, 친일파로부터, 왕실을 잊어 가는 백성들로부터 온갖 모욕을 참으며 나무처럼…… 뿌리를 깊이 내린 채 겨울을 견디는 나무처럼 그렇게……." - p.294

 

사실 읽다 보면 비중 자체는 석중이 더 많지만^^; 마지막 황제로서 옅은 족적을 남긴 황태자 이척도 인상적이다. 순종은 윤덕영에 대한 반감으로 증순을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고 싸늘하게 대하였지만, 증순이 생명의 위협에 처하자 발빠른 행동력을 보였다. 겉으로는 냉대했지만, 순종은 증순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러나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하고 늘 빼앗겨 왔기에, 황후마저 빼앗길까 두려워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윽고 서로에게 차근히 마음을 열어간다. 망국의 왕이란, 얼마나 서글픈 존재인지. 없어진 나라의 그림자 속, 한때는 그 나라 자체였던 사람 역시 말라죽어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속에 맺힌 억울함과 분노마저 토해내지 못한 인생, 순종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공화정이란 이름의 새 왕국을 세우려는 것 같군요. 웬만하면 그만두세요. 사욕으로 세워진 왕조가 얼마나 가겠어요?" - p.284

 

단편적으로,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비중으로 등장하는 이승만. 실제로 대한민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며 왕실과의 관계에서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그는, 극렬 공화주의자이지만 공화국의 탈을 쓴 자신의 왕국을 꿈꾼다.

석중은 승만을 스승으로 모시고 어버이처럼 따랐으며 그에 의해 승만과 증순 사이에도 교류가 있었지만, 승만과 증순은 결국 결별하게 되고 잊혀진 황후 증순과 달리 화려한 권좌에 오른 승만은 이후 자신의 욕심을 위해 증순의 목숨을 노리기까지 하는 관계가 된다.

 

"사람들이 또 강물이 되어 흐르는구나. 나는 저 도저한 물결을 예전에도 본 적이 있다. 누군가가 총을 쏘고, 누군가가 피를 흘려도 저 푸른 물결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 p.326

 

되새겨보니 그녀야말로 시대의 격동을 겪으며 굴곡어린 인생을 살아왔다. 조선왕조가 종지부를 찍고 치욕의 시간을 지나 이윽고 해방, 그리고 전쟁, 혁명에 이르기까지……. 이름은 화려한 황후였지만 인고의 삶이었다. 눈물어린 세월의 그림자 속, 이러한 사람도 이러한 인생도 있었구나 하고 새삼 되새겨 본다.

 

/131120 읽고 131121 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