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여성 예술가들
파이돈 편집부.리베카 모릴 지음, 진주 K. 가드너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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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WOMEN ARTISTS, 위대한 여성 예술가들. 


을유문화사 출판사에서 출간된 거대한 한 권의 책. 색감과 무게감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미국의 미술사가 린다 노클랜은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 라는 글에서, 위대함은 개인의 능력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체제에 어느정도 부합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여성, 바우하우스로부터에서 인용) 사회는 남성의 이름을 보편으로, 여성의 이름을 특수로 여겼으며, 예술의 영역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여성을 드러냄으로서 그 세계의 견고함에 균열을 가해야 한다. 더 많은 여성 예술가를 발굴하고 소개함으로써 지형 자체를 재편해야 한다. 페미니즘과 예술이라니. 이토록 멋지다니, 이 한권의 도록을 예술에 관심있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해당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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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 삶에 깊은 영감을 주는 창조자들과의 대화
윤혜정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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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밀란 쿤데라의 작품들에 흠뻑 빠져 내 주위의 모든 풍경을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의 세계에 연관지어 살았던 적이 있었다. 사랑의 정의는 토마시의 테레자를 향한 마음, 인간의 사랑보다 더 나은 사랑은 동물과 인간의 무조건적이고 무교환의 사랑, 인생은 우연과 필연의 모순에서 발생하는 아름다움과 슬픔, 진정한 행복은 슬픔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 더 나아가 미래에 또 다른 반려견이 생긴다면 그의 이름은 카레닌. 그러고는 좀 더 오바해서 프랑스에 가면 쿤데라의 사적인 공간에서 길고 긴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비현실적인 욕망. 이 소망을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을까.

영화에서, 그림에서, 사진에서, 조각에서, 문학에서, 대부분의 예술작품들은 그것들을 창조해낸 예술가를 뛰어넘어 작품만 홀로 남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겐 쿤데라처럼 작품 뒤에 숨겨진 예술가들의 삶에 대한 내밀한 호기심에 더더욱 끌린다. 수많은 대중의 한 명인 내게 이를 충족시킬 방법이란 그들의 작품을 읽어내는 것 외에는 인터뷰집을 읽는 방법 밖엔 없는것 같다.

질문은 어렵다. 타인중심적임과 동시에 대중과의 현실적인 접점을 잃지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예술가와의 인터뷰는 더더욱 그렇다. 인터뷰는 대화이다. 대화는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알아가며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적확하고 사려깊고 통찰력있는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어가 필요하다. 질문 자체가 그 예술가와 작품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로 인터뷰집의 가치를 결정한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의 윤혜정 인터뷰어는 질문을 던지는 자로서의 제대로된 역할에 충실했다. 질문은 상대방을 향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작가와 작품에 관한 애정어린 관심과 깊이있는 공부가 필수적이다. 인터뷰의 질문에서 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자벨 위페르와의 대화에서 그는 "여성은 애초에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신뢰를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보부아르의 말을 인용했다. (p.390) 예술 또한 역사적으로 남성의 전유물이었다는 점을 회기해볼때, 그러니까 어떤 예술이나 미학 책을 읽을때마다 온통 남성들의 신화적인 이야기만을 읽어내야만 하는, 그런 상황이 불만족스러우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어 주어진 선택을 강요당할때, 늘 지워지고 숨겨진 여성 예술가들의 서사를 달라고 시위라도 하고 싶어진다. 이자벨 위페르가 말한 신뢰의 쟁취에 대한 노력은 독자에게도 유효하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은 많은 여성 예술가들을 내가 만족할만큼 다루고 있었다. 이자벨 위페르, 틸다 스윈튼과 같은 배우나 아니 에르노와 같은 프랑스 문학의 거장의 인터뷰를 다룬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내가 알지 못했던 칸디다 회퍼, 제니 홀저, 로니 혼 같은 여성 예술가들을 소개했다. 젠더뿐 아니라 예술의 영역에서도 다양함을 뽐내는데 만화가인 다니구치 지로라던지, 게르하르트 슈타이들이라는 출판 장인까지 다루며 예술의 영역을 확장한다. 분량한계 상 모든 예술가들을 다루지 못하겠지만, 동서양의 측면에서도 균형을 잡으려 애쓴 것이 보였다.

권태와 노곤함이 밀려올때마다 예술가들과의 대화를 몇 장 씩 나누어 읽었다. 타인의 삶을 잠깐 들여다보는 기분은 단순히 즐거움을 넘어서는 무언가이고, 그러한 즐거움을 주는 인터뷰집은 많지 않다. 이 인터뷰집 덕분에 2주가 소소하게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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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만든 세계사
함규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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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벽을 단순히 트럼프식 장벽으로만 보는 것에 반대한다. 트럼프식 장벽이 폐소적이고 나르시즘적인 동시에 타자에 대해 억압적이라면, 그 반대의 벽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떤 장벽은 해방의 성질의 띤다. 자유를 지키기 위한 혁명의 상징으로서의 벽이 바로 프랑스의 코뮌장벽이다. 다른 장벽들이 대부분 권력의 손으로 쌓였다면, 이 장벽만큼은 해방을 꿈꾸는 민초들의 장벽이었기 때문이다. (116)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의 메타포 만으로 현실을 읽는 것이다. 벽은 억압하는 자의 손이 아니라 억압당하는 자의 손에 의해 세워질 때 분명 의미가 교차하는 다양한 양상을 지닌다. 이 책에는 벽의 상징에 관한 다양한 스토리들이 산재되어 있다. 그것을 어떻게 읽을지는 독자의 몫이겠지만,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는 저자의 목소리는 상당히 깊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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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벽을 세우고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이 물리적 벽이든, 상징적 벽이든 상관없이, 벽은 늘 우리와 함께 한다. 그러나 그 벽에 어떤 의미와 목적을 둘 지는 늘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벽은 정치적이다. 우리는 그 벽을 우리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무지한 돼지가 되기 위해서, 우리의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세울 수 있도 있다. 반면 억압하는 타자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서, 해방과 자유를 위한 하나의 몸짓으로서도 세울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벽은 오래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벽이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거대한 장벽이 되기 마련이다. 자신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벽은 결국 한 치만 멀리서 보면 일종의 감옥이나 다름없다. 그 감옥안에서 행복해하는 무지한 죄수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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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벽을 키워드로 한 역사적이고 현대적인 이야기의 나열에 가깝다. 그렇기에 이 책을 덮은 후 우리는 다시 한번 벽의 상징에 대해 생각하고 문화적이고 철학적 해석으로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책은 늘 질문으로 끝나야 한다.
#벽이만든세계사 #함규진 #장벽 #역사 #세계사 #문화사 #차별 #분단 #단절 #책추천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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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이영채.한홍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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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영어토론 수업뿐 아니라 국제학과 학생으로서 외국인을 많이 접하는 나는 그들과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다. 대학원에서 동아시아 국제관계와 정치에 관한 수업만 해도 동아시아 평화와 긴장의 변수인 한일 관계는 수업 대부분의 주제와 관련이 있다. 동아시아에서 결코 대화로 풀리지 않는 고리가 하나 있다면 바로 그것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바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고리'이다. 이 고리는  많은 한국인뿐 아니라 비아시아 국가의 외국인들에겐 오해로 얼룩져 있거나, 한국이 피해자이고 일본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지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외국인 교수님과 학생들과 수업을 듣고 토론을 하면서 다가온 한가지 슬픈 사실은 한일관계에 대한 그들의 이해 속에는 바로 현대에 들어 한국이 가해자로, 일본이 피해자로 여겨지는 등 가해와 피해의 사실 관계가 도치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의 눈으로 보았을때, 한국은 일본이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에 대해 수차례 사죄를 했고, 도쿄 재판에서 전범자들은 처벌을 받았으며, 왜 여전히 사과와 보상을 원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심지어 몇몇은 한국이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상대로 깡패처럼 군다는 인식까지 있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식에는 명백히 두 가지가 결여 되었다. 첫 번째는 역사적 팩트에 대한 결여이고, 두 번째는 역사적 팩트에 대한 해석적이고 인식론의 결여다. 그들을 비난하고자 함은 아니다. 내가 그들의 눈에는 오히려 민족주의자나 종족주의자처럼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어떤 나라에 대해서든 동일한 역사적 인식과 해석으로 그들의 주장에 대응했을 것이다. 한홍구님이 책에서 말씀했듯이 나는 식민지와 전쟁범죄 문제를 "보편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기본적으로 한일 관계는 한국인에게든 다른 이들에게든 많은 오해로 점철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위안부' 문제가 그렇다. 한일청구권에 명시된 배상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 협상은 개인에 대한 청구권까지 포함하는가? 그들의 배상은 어떤 성격을 지녔는가? 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우리는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해 치명적인 오해를 하기 쉽다. 이미 피해에 대한 보상은 이뤄진 것이 아닌지, 왜 한국인들은 보상을 받고도 또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는지, 한국인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그러나 간단히 말해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극우세력의 "반일종족주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알지 못하면,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각없이 타인의 의견만을 따라간다면 그들이 짜놓은 프레임에 걸려들어 얼마나 쉽게 부당한 논리에 빠질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우선 1965년의 한일 청구권에 각 개인의 청구권이 이로 소멸하는지 않는지에 관해 한일 양국간의 입장 차이가 있다. 일본은 한일청구권으로 인해 각 개인의 청구권도 소멸했다고 보지만, 한국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일본의 모순이 등장한다. 애초에 국가간의 청구권 협정은 각 개인의 청구권을 포함하지 않으며, 이로 인해 소멸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은 바로 일본이었다. 세계 2차 대전에서 패한 후 피폭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보상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국가가 바로 일본이었고, 그들은 일본 국민이 핵폭탄을 터트려 피폭 피해를 받은 일본 개개인의 국민에게 개인 청구권을 인정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한국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논리를 뒤집어 한일 청구권 협약으로 모든 피해보상이 완료되었으며, 그렇기에 일본은 전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자국민에게는 인정한 권리를 한국인에게는 인정하지 않는 이 모순에 대해 일본정부는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일본 정부가 전후 55년 체제동안 해온 보상은 과연 어떠한가? 일본 정보는 고노 담화를 통해 일정부분 한국의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배상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금은 대부분 사적영역, 즉 일본 국민들이 개인적으로 지원해서 나온 금액이지 국가의 이름으로 지불된 배상이 아니었기에 계속해서 문제가 된다. 국가가 피해보상금을 지급한다는 것은 과거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한 인정과 공식적인 사과를 의미하는데, 일본 정부는 교묘하게 이를 사적 영역으로 옮겨놓음으로서 국가의 책임을 부정하고 회피했던 것이다. 공적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 사적영역으로 옮겨지게 하는 것은 국가행위의 불법성을 감추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대표적인 눈가림막이다. 호주의 스콧 모리슨 총리는 파리기후 협약에서 호주의 탄소 배출량 감소를 약속했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조치를 국가적 차원에서 이행해야 했지만 결국 사적영역인 기업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단순한 인센티브 형태로 그 책임을 돌려버린 예가 있다. 그래서 얻은 결과는 결국 호주의 꺼지지 않는 산불과 수많은 인명과 재산, 자연피해였다. 



한홍구님은 '위안부' 문제에 관해 보편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기에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러한 관점에 대해 페미니스트 진영에서 많은 비판이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페미니스트로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과 한홍구 님의 의견에 완벽하게 동의한다. 애초에 한국은 '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했는데, 그 논리는 일본남성이 한국 '여성'을 강간했다, 이는 나라가 힘이 없기 때문이고,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국력을 키워야 한다, 라는 식이었다.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 논리 아래에는 '더럽혀진 여성'과 '순결한 여성'이라는 이라는 이분법적인 여성혐오 관념이 흐르고 있고,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응하여 같은 폭력적인 논리로 대응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때때로 한국남성들은 우리도 일본 여성을 강간하자고 외치기도 했으며, 효순이, 미순이 사건 당시 미국에 대한 반발로서 "Fuck You, USA"와 같은 강간의 노래를 탄생하게 하기도 했고, 박근혜 탄핵심판 중의 촛불항쟁 동안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여성성을 비난하는 혐오언사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들이 말하는 민족 안에 '여성'이란 존재하는지 부터가 의심스럽다. 과연 그 민족이란 누구인지, '남성'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을 따름이다. 만약 그 민족 안에 여성도 포함이 되었고, 한국이 국력이 약해서 한국 여성들이 결코 회복되지 않을 피해를 입은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한국국민이 인정했더라면, 왜 '위안부' 피해자들은 한국에 돌아와서 그토록 오랜기간 동안 수치심에 시달리며 침묵해야 했는가. '위안부' 문제는 젠더의 문제로 한홍구님이 말한 것처럼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강제 징집이 남성에게 한정된 폭력에 가까울지언정 나는 그것이 남성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똑같이 '위안부' 문제가 여성에게 한정된 폭력일지라도 그것은 여성의 문제이고, 그렇기에 보편적인 인권 문제이다. 이 문제는 민족주의적 관점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해야 하고 그럴때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일본은 아베라는 인물이 추구하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을까? 일본의 극우화는 어쩌면 예정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베 정부 이전의 55년 체제 동안의 일본은 최소한 동아시아의 평화를 추구했으며 어느정도의 상식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2011년 지진과 핵시설 파괴, 1990년부터 시작된 경제 불황과 같은 국내외적 상황으로 당시의 여러 당이 파괴되며 보수화의 길을 걸었다. 그 사이 아베는 극우익 단체인 일본회의를 결성하여 점차 정치권을 장악해 나갔는데 그 결과 현재 아베 내각의 70%가 극우정치결성체인 일본회의 멤버가 차지하고 있다. 일본회의는 정치뿐 아니라 교육 분야에도 손을 뻗쳤다. 새역사교과서모임인 새역모를 만들어 일본인의 역사의식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처음에 교과서 채택률이 너무나 낮자, 곧 아베는 교과서 채택 방식 자체를 바꿔버린다. 그 결과 현재 일본의 20대들은 아베가 의도한대로 보수화되었고, 넷우익이 활개를 치며 혐한을 외치고 있다. 



한국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일본정부의 경제적 보복조치는 일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이나 다름없다. 아베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과 목표를 위해 국내외적 정세를 이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아베의 자신감 뒤에는 미국이, 앞에는 남북한의 분단 현실이 놓여져 있다. 일본의 극우인 아베를 지탱하는 이 두 축 중 하나라도 균열이 생기거나 무너지는 날에는 아베 정권은 몰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굉장히 낮다. 그럼에도 일본의 극우화는 일본이 정치적으로 국가적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하나의 징후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연 국가를 대표하는 정부의 태도가 이럴지언정, 결코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는 한일관계는 어떤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까. 한홍구님은 일본과 한국의 시민사회의 연대를 희망으로 제시한다. 극우정치 세력과 국내외적 상황에 의해 일본시민사회가 많이 붕괴되었을지언정 여전히 양심있는 시민들이 남아있고,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은 평화를 원한다. 시민적 연대가 남아있으면 당장 현세대는 아닐지라도, 미래의 세대에겐 희망이 있는 것이다. 화해의 길은 탑다운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바텀업 방식으로 이루어지도 한다. 부모세대가 하지 못한 일을 자식 세대에서는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보자. 



개인적으로 엄청 재미있게 읽었다. 나는 늘 한일관계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가진 이들과 대화를 나눠야 했고, 심지어 언어의 방식이 영어였던지라 늘 큰 부담감이 있었다. 내가 어디까지 설명해서 해명해야 하는지, 어떤 부분은 너무 전문적이라 해학적으로 들리진 않을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렵고 복잡한 사건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을 싫어한다) 걱정하고 고민한다. '위안부', 강제징용, 한일관계, 경제보복 등에 대해 정치철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국제관계적이고 외교적인 실용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수업에서는 흔히들 '객관적'이라는 태도를 유지하며 역사적 현실을 무시하고 일본과 한국을 동등한 선에 놓고 논의하는 경우가 잦은데, 사실 이러한 태도는 내게 씁쓸함을 느끼게 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해명하는 것이 엄청난 피로감과 부담감으로 다가왔고, 그러한 태도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내민 관점의 다양성과 객관성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하지만 팩트는 팩트이고, 우리는 반일종족주의의 관점을 가진 이들에게, 혹은 단순히 오해를 하는 이들에게 설명할줄은 알아야 한다. 설명 이후의 판단은 그들의 몫이겠지만, 대화와 토론의 힘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다. 모든 한국인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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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의 이단자들 - 호크니, 프로이트, 베이컨 그리고 런던의 화가들
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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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대미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현대 미술을 정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특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문학, 시, 회화, 조각과 같은 예술이 무엇인지 물었을때, 정의는 무엇이고 폭력이란 무엇인지 물을때, 사랑이란 무엇이고 휴머니즘이 무엇인지 물었을때 우리는 늘 당황할 수 밖에 없다. 질문은 늘 또 다른 회의로 귀결된다. 과연 이것들을 정의하는 것이 가능한가? 어쩌면 무언가를 정의하는것 자체가 예술의 지향과는 애초부터 어긋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부분 예술, 정의, 선과 같은 가치들에 대해 물을때면 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엄청난 양의 지면을 할애해 그들의 모습과 계보를 가능한 최대한으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대미술을 다른 미술양식과 비교해 정의해보자면, 현대미술은 반고전주의로부터 시작된 낭만주의 재현을 거부하고, 예술의 자율성과 세계와의 단절을 거부한 순수미술의 추구라는 모더니즘도 거부하며, 이러한 순수미술을 거부하며 사회적 쟁점들을 미술에 도입하며 저항의 정신을 외치는 아방가르드의 반예술 추구라는 길을 달려 역사길에 이르른 하나의 지점이다. 







현대미술은 그 정의가 부정의 된다는 점에서 핫한 동시에 쿨하기까지 하다. 마치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이들에게 선물처럼 던져진 철학적이고 미학적이고 문화적인 생활방식이 된듯하다. 대중들에겐 너무나 새롭고 획기적인 이 현대미술은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현대 미술을 이야기할때 우리가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현대적인, 너무나 현대적인 미국이라는 나라와 자유의 가치이다. 물론 이또한 저자가 책에서 "냉전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과 위상을 확대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국 정부는 추상표현주의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결국 이 사실이 알려졌을때 파리에서 뉴욕으로 미술계의 관심이 옮겨 간 것이 정치적 조작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이어졌다. 폴록을 비롯한 미술가들이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증대시키는 데 사용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언급했듯 추상미술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현대미술이 미국과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은 정치적 조작의 가능성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일정 부분 결과론적 사실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마틴 게이퍼드의 <현대미술의 이단자들>에서 현대미술을 다루는 방식에 다른 책들과 주목할만한 차이점이 있다. 







첫 번째는 장소와 매체의 차이와 경계짓기다. 저자는 장소에서 미국이 아닌 영국 런던을 다루고 있으며, 미술을 다루는 매체에서도 다른 방식이 아닌 물감으로 표현하는 미술만을 다룬다. 현대미술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미국이라는 장소가 아닌 영국의 런던을 의도적으로 선택했으며, 물감만을 다루는 미술에 주제를 한정했다. 두번째는 작품에 대한 해석을 시대나 배경이 아닌 예술가 개인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책은 '그림은 사회적, 지적 변화뿐 아니라 개인의 감수성과 성격의 영향도 받는다'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베이컨의 출현에는 역사적인 필연성이 없었다. 사실 어떤 지점에서 그의 심리적, 미학적 기질은 매우 특이했고 낯설었다. 그래서 그의 출현은 여전히 이해가 쉽지 않다. 그러나 베이컨이 없었다면, 또는 프로이트, 라일리, 호크니의 기여가 없었다면 이후의 런던 화단의 상황은 분명 상당히 다른 이야기로 전개되었을 것이다."(p.11)라고 언급했다. 셋째로 현대미술의 "이단자들"에 초점을 맞춘다. 추상과 구상 사이에서, 현실의 모방과 자기만의 세계 창조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을채 자신만의 감각과 스토리를 작품에 새긴 런던의 이단적인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 다른 특기할점은 저자가 여성 예술가들과 남성 중심적인 예술계에 대해 적은 분량이나마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예술계가 얼마나 성차별적인지에 대해 단순히 침묵하지 않는다. 물론 강하게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것도 아니지만 여태까지 단순히 남성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는 책들이 이에 완벽하게 침묵하고 넘어가는 모습과 비교하면 일면 나아보인다. 책의 한 예를 들자면, 문제가 된 초상화를 그린 앨러웨이의 부인 슬레이의 작품을 남성 화가들은 비판했다. 실제로 "슬레이의 그림은 공간적으로 일관성이 떨어진다. 모든 인물을 제각기 연구한 다음 어설프게 조합한 것이 분명했다. 에이리스에 따르면 슬레이는 '그들이 모두 남자였기 때문에 불쾌해 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슬레이의 의견 역시 타당성이 있는데 '상황'전의 미술가들은 어떻든 간에 의심할 바 없이 압도적으로 남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에이리시는 그녀가 긴 남성 화가 명단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었다는 점과 예를 들어 중요한 하드에지 화가인 테스 자레이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 매우 충격적이라는 소회를 털어놓았다. (중략) 엘러웨이와 슬레이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앨러웨이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되었고, 슬레이는 이후 10년 동안 여성 미술 운동의 중요한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슬레이의 그림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로부터 자신감과 활력을 얻었다. 그녀의 초상화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예고하는 징조였다. 추상은 중요한 언어로 남았지만, 성 정치, 정치가 배제된 성, 성이 배제된 정치, 유머, 개인의 정체성과 같은 내용이 미술 속으로 다시 말려들어올 기세였다."(p.240) 







단순히 현대미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틴 게이퍼드 저자 자신이 한정한 세 가지 렌즈로 현대미술의 예술가들을 다루는 방식이 다른 미술책과의 차이점이자 주목할 만한 점이 될 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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