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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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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으로 떨어진 역사적 폭력 속에 수평으로 펼쳐진 개인을 향한 온갖 구조적이고 비가시적 폭력에 대한 이야기, 애나 번스의 <밀크맨>

애나 번스의 <밀크맨>은 가시적 폭력이 난무한 폐쇄된 공동체에서 어떻게 구조적이고 비가시적인 폭력이 행해지고 은폐되며 작동하는지를 한 젊은 여성의 눈으로 생생하고 촘촘하게 묘사한다. 화자인 '나'가 사는 사회는 북아일랜드의 얼스터 지방의 상징으로 영국으로부터 아일랜드가 독립하면서 영국계 신교도와 아일랜드계 구교도 사이에 폭력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 폭력은 어떻게 나뉘고 작동하는가. 어떤 폭력은 폭력이라 말할 수 있고, 어떤 폭력은 폭력이라 말할 수 없는가. 정의로운 폭력은 무엇이고 부정의한 폭력은 무엇인가.

지젝은 자신의 책인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발터 벤야민을 빌려와 폭력에 대해 설명하려 했다. 여기서 폭력 자체의 개념을 정의하려 하기보단 현상을 보여주고 분류하는 방식으로 대체했다. 폭력의 핵심이 바로 언어를 통한 틀 지우기인바, 어쩌면 폭력에 하나의 정의와 하나의 얼굴만 부여하는 것도 그 자체로 폭력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에 따르면 폭력에는 가시적인 주관적 폭력과 비가시적인 구조적이고 객관적인 폭력이 있다. 개인의 일탈에 의해 행해지는 폭력이 가시적이고 주관적 폭력이라면 구조가 생산해내고 은폐하고 강화는 폭력이 비가지적이고 주관적 폭력이다.

가시적인 폭력만을 폭력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가시적 폭력 또한 구조적 폭력의 표출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주인공 '나'가 사는 세계가 바로 이런 가시적 폭력만을 폭력으로 인정하는 사회인데, 이런 사회에서는 폭력에 희생당하는 주체뿐 아니라 그 폭력을 손에 들고 휘두르는 주체조차도 폭력에 희생된다. 그 권력자조차 구조의 일부이고 구조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촉측발의 상태에서 개인들이 각자도생을 해나가야만 하는 그런 사회에서는 권력을 가진 한 인물에 의해 삶의 안정이 좌지우지되며, 모든 것이 정치적 논쟁을 촉발하고, 누구나 배신의 공모자가 될 가능성을 말 한마디 한 마디에 품고 살아가기에 삶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상도를 벗어난 이들은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된다.

화자인 '나'가 사는 세계가 아닌 곳에서 과연 벤틀리는 어떤 의미일까? 부와 자본의 상징이거나 계급과 취향의 문제, 약간 양보해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영국의 상징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과연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국이라는 국가의 상징이 부와 계급의 상징보다 힘이 셀 수 있을까? 그러나 '나'가 사는 세계에서 벤틀리가 내포한 다양한 해석은 탈취되고 단지 제국주의의 상징인 '영국'만이 남는다. 벤틀리조차, 아니 벤틀리의 일부분에 불과한 과급기조차 이편과 저편을 가르고, 사상을 의심하고, 배신자로 낙인찍을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정치적 논쟁이 된다.

구조적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는 특히 젠더가 문제 된다. 아니, 젠더 자체가 구조적인 폭력이라 할 수 있다.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이 나누어져 있다는 것, 사회가 구성하고 생물학적 성에 따라 역할을 배분해놓고, 한 성이 다른 성에 종속되는 일, 심지어 이러한 분리와 차별에 대한 명령이 그 자체로 자기 예언적 역할을 하는 하나의 거대한 가스라이팅의 세계가 바로 화자의 세계이다. 밀크맨이 '나'에게 은밀히 접근해 그의 눈빛과 존재감만으로 나를 위협하고,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을 모두 알고 있고, 권력자인 그가 나를 쫓아다닌다는 사실이 피해자인 나를 어느새 남자를 홀리는 방탕한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진실은 아무도 믿지 않으며, 결국 밀크맨과 나의 불륜 아닌 불륜은 기정사실화되는 이 상황은 젠더가 구조적 폭력임을 말해준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만 없었다면 이는 폭력이 아닌가? 관계와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그 힘 자체가 폭력이란 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

이 구조적 폭력은 인간 삶의 조건에 틈틈이 스며들어있다. '나'의 세계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해선 안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든 죽을 수 있기에,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아픈 일이기에. 그 아픔을 견딜 수 없는 취약한 상태의 사회에 사는 취약한 인간들은 덜 사랑하는 사람을 그들의 배우자로 택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하늘의 색이 하늘색이고 붉은색이기도 하며, 핑크색이나 보라색, 혹은 노란색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고통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몇 안 되는 빛나고 순수한 사람들은 희생당하거나 사회적 타살인 자살을 택한다. 두려움과 슬픔이 압도하는 곳에서 그들은 살기 힘든 존재들이다. 혼란과 혼돈이라는 비정상이 정상이 된 상태에서 사람들은 구심점 없는 관점들만을 가지고 엄청난 증오를 자기 안에 축적한 채 살아간다. 그 분노는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고, 결국 내면세계가 통째로 사라져 버린다. 이것이 바로 구조적 폭력이 인간의 삶을 압제하는 방식이다.

<밀크맨>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떠올리게 했다. 엄청난 폭력 앞에서 과연 어떤 언어가 이를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형식과 문체는 상상할 수 없는 폭력적 세계를 살아가는 개인들이 겪는 혼란과 혼돈, 단절과 상실의 내용을 형식 그 자체로 표현한다. 애나 번스가 그와 비슷한 문체나 형식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밀크맨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비슷한 무언가를 느꼈다. 내 질문은 이것이다. "밀크맨"은 '나'를 괴롭히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가? 아니면 아일랜드인의 일상에 대한 침범과 경계의 감각의 상징인가? 애나 번스의 문체와 문장의 길이, 인물들 간 대화 방식, 폭력을 묘사하는 형식 자체가 단절되어 있음과 동시에 이 분절의 효과가 소설 전체의 주제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말이 난무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각자 혼자 떠들고 있는,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오해하고 의심하는, 오해를 풀기 위한 말이 오히려 문제를 더 일으키는 사회. 아이러니한 것은 '나'와 말이 통하는 인물들과는 실제로 말 다운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엄마의 첫사랑이자 친구인 진짜 밀크맨,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빛나는 알약 소녀의 동생, 아직 상징계의 법에 덜 물든 세 명의 어린 동생들, 정치성이 없어 결코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형부는 다소 폭력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폭력에 대한 이야기로만 끝나야 하는가. 애나 번스는 알약 소녀와 알약 소녀의 동생의 일화를 빌려 말한다. "나쁜 일들을 놓아버리면 용서가 뒷문으로 들어온다. (중략) 나는 용서할 수 없다, 특히 아직 사과도 받지 못했는데 용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중략) 나는 누구한테 사과를 받아야 하는지 용서받지 못한 자들이 무엇에 대해 사죄해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언니한테 마냥 사과를 기다리는 건 공격적인 생각 같으니 기다리기를 그만둘 수는 없겠느냐, 계속 기다리다 보면 심심이 더욱 피폐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언니는 떨치고 갈 수는 없고 일단 사과를 받아야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했고 나는 아니다, 정말 정말 아니다라고 했고 (중략) 세 번째로 둘이 차를 마시며 대화를 했을 때는 헛된 일, 받지 못한 사과, 용서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주제가 아니라 정체성, 유산, 전통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했다고 했다. (중략) 언니한테 내 생각에는 언니가 독을 넣을 때마다 자신을 분리하고 고립시키는데 너무 그쪽으로 신경을 쓰고 집착하고 어쩌면 적절한 수준 이상으로 몰입하는 것 아니냐고 했어. 다 같이 살아야 하잖아라고 물었더니 언니는 존중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게다가 반짝이는 면에만 주목한다면 다들 다른 면은 없다고 생각할 거라고 했어. 사람들이 잊어비록 말 거라고. 모든 게 괜찮다고 생각할 테고 그러면 기억하는 사람은 자기밖에 남지 않을 거라고했지." "너의 충실한, 힘든 날뿐 아니라 모든 날의 타인에 대한 공포가"

결국 제국주의, 종교 충돌, 인종 젠더 계급 간의 충돌 등 모든 것은 타인에 대한 공포에서 연유된다. <밀크맨>은 타인의 폭력에 대한 구체성을 통해 보편성을 이야기하고, 다시 보편성을 통해 구체성으로 되돌아간다. 그 충돌과 분열 사이에서 탄생한 거대한 분노와 증오의 서사는 역사가 되고 타인에 대한 공포는 커져만 간다. 우리는 이런 과거를 세탁기에 빨래 넣듯이 깨끗하게 털어내고 용서한 후 앞으로만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얼룩 그 자체를 나쁜 일은 나쁜 일로서 받아들여 잊지 않고 용서를 끝까지 받아내야 하는가. 두 선택지 중 하나의 답이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지막 장에서 우연의 방식으로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고 인물들은 한 발자국 앞으로 디뎌 삶을 살아나간다. 당장은 큰 도약이 없지만, 그렇게라도 살아나가야 하는 것, 사랑이 마음을 흔들게 하고 아름다움이 삶을 조금 더 살고 싶게 만드는 것, 우선 그것부터 회복해보자고 말하기 위해 '나'의 이야기는 <밀크맨>으로 탄생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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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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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사회에서 개인들은 보통 한 두가지의 차별을 당연히 겪고 살기 마련이다. 인종 사다리의 가장 꼭대기에 있다는 백인 남성의 경우에는 삶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지 모른다. 백인 여성의 경우는 다른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백인 남성의 한 사다리의 아래에 있다. 흑인이나 히스패닉, 아시아인이라면 어떨까? 아마도 그들은 여남 불문 백인보다는 아래에, 그러나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 여성들보다는 상위에 있을 것이다. 물론 계급과 각자가 가진 위치성에 따라 이 사다리의 높낮이는 이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은 단일 국가, 인종, 계급, 성별과 같이 한 세계에만 속해 있을 때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 경계를 인지하거나 넘는, 즉 다른 세계 속으로 진입하는 순간 주류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선연히 보고 느끼고 경험할 가능성이 커진다. 약 800페이지에 달하는, 두 권으로 쓰인 이 책 <아메리카나>는 아프리카 대륙의 나이지리아의 하층민 계급에 속한 흑인 여성 이페멜루가 미국에서 겪은 일들에 관한 이야기다. 흑인으로서, 하층민으로서, 여성으로서 3중의 차별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이페멜루의 미국 이야기.

내겐 아디치에의 소설은 <보라색 히비스커스>에 이어 <아메리카나>가 두 번째였다. 미국 이민 초기에 작가의 삶이 불안정하고 불안했던 시기에 쓰였던 <보라색 히비스커스>에 비하면 <아메리카나>는 그가 미국생활에 어느정도 적응하여 생활이 안정되던 시기, 그러니까 자신이 경계에 서 있는 자로서의 위치를 파악하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판단하고 관찰할 수 있게 된 시기에 쓰여졌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전작보다 밝고, 유머스럽고, 동시에 더욱 신랄하고 비판적으로 느껴진다.

이 책은 어쩌면 아디치에가 아니라면,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에 이민 온 흑인 여성이 아니었더라면 쓰지 못할 책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사는 미국이라는 나라, 다양성 자체가 미국적 가치로 여겨지는 나라, 그러나 흑인 노예 제도가 분명히 존재했고 이 제도의 존폐를 두고 남북이 전쟁을 해야했던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인종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오히려 이 사실 때문에 인종차별은 더 이상 미국에서 용납되지 않고, 모두를 불편하기 만들기에 오히려 침묵하고, 이제는 인종차별은 범죄라고 법률이 선포한 이 나라에서 또또또! 인종, 여성, 차별을 이야기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미국 사회는 더 이상 인종 차별을 용납할 수 없다는 사회적 합의를 거두었다. 그러나 여전히 차별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혹은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언어로 포장되어 사람들이 자신이 이성적으로 행동하는(그러나 실제로는 차별의 단면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 듯하다. 아디치에는 이런 미묘하고도 애매한 차별의 순간들을 재치있게 폭로한다.

백인 남자친구 커트가 이페멜루가 보는 흑인여성만 나오는 잡지를 인종편향적이라고 하자 이페멜루가 백인여성만 나오는 잡지를 보여주며 이건 왜 편향적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애초에 흑인여성만 나오는 잡지가 왜 필요한지는 아냐고 묻는 장면, 흑인을 아름다움과 연결짓고 아프리카를 자연과 신의 존재로 연상시키는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를 가진 백인들을 보며 언제나 특수성은 보편성의 반동에서 나온 것이며 늘 그것이 온갖 치창된 형용사와 부사를 달고 다닌다는 사실, 대학 강의에서 함께 본 영화에서 깜둥이라는 말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나오는 것에 대해 그 말이 실제로 역사에서 쓰였기에 현실을 드러내는 수사로서 감춰서는 안 된다는 의견과 그 단어가 흑인들에게 상처를 주니 써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대립하는 장면, 어떤 흑인이 자신이 차별을 당했을때 인종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 대해 다른 이들이 인종때문만이 아니라고, 더 복잡한 상황 때문이라고 말하며 차별피해를 희석할때 사실은 그 복잡한 상황이라고 말하는 태도가 더 단순한 해석이 아니냐고 반박하는 장면, 미국 사회에서 이제 흑인이 아니라면 아이비리그에 들어가기도 힘들다고 말하며 역차별을 강조하는 백인들의 말, 이페멜루 자신은 백인 남친과의 관계에서 인종적 차별이나 성적 억압을 받은적이 있냐는 질문을 받자 차별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차원의 일이라고 반박한 그의 말, 흑인 인권 운동이 아니라 이제는 인류 전체를 위한 휴머니즘이 되어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의 아주 휴머니즘적인(결국 그들이 말하는 휴머니즘의 대표는 백인?)주장에 대해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이야기한다.

이 에피소드들이 주는 불편한 늬앙스와 애매모호함 속에 가려진, 이제 차별은 없다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언어의 위선을 아디치에는 신랄하게 까발린다. <아메리카나>는 완벽하고 아름답게 포장된 미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균열을 보여준다. 흑인에 대해, 흑인 내부에서도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아프리카인들의 차이에 관해(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예를 들어 미국에서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 모두 중국인 혹은 아시아인으로 여겨지는 것과 같은 것), 흑인이자 여성에 관해, 미국에 굴복되어진 미국에 관한 아디치에의 재치있는 항변같은 책이 바로 <아메리카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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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대중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사랑은 이타적이 아니다. 최초의 끌림은 상대방의 자기 충족과 통합적 개체에 관한 호기심 어린 존경,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이 자아의 한 부분이 되고 그 정신적 균형의 중요한 부분이 되려는 소망에 근거하고 있다. 상대방의 자기 충족 욕망을 창조한다. 즉, 상대방에 대한 존경은 상대방의 특질을 받아들이려는 소망이 된다. 자아의 충돌은 상대방의 커져가는 지배력을 물리치려는 개별적 시도로 이어진다. 사랑은 상대방과 최종적으로 마음을 터놓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에게 자신이 어떻게 대우받고 싶은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랑은 이기심의 절정이다. 자아는 또 다른 존재를 흡수하여 풍요로워지려고 한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 심리적으로 활짝 여는 것이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완전히 상처받기 쉬운 상황에 처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상대방을 체내화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아의 교환이기도 하다. 상호 교환이 부족한 사랑은 어느 한쪽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으며 떠올랐던,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글이다. 어디에 저장해 놓았는지를 몰라 이곳저곳 아케이브를 뒤지며 한참을 찾았다. 결국 핸드폰의 사진앨범 스크린샷 파일에서 이 글의 토막을 발견했다. 파이어스톤의 짤막한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이 글은 사랑에 대한 글이고, 결국 성숙과 독립, 마지막엔 자유에 관한 글이구나.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주인공 캄빌리의 이야기는 바로 사랑과 성숙, 독립과 자유라는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상호교환이 핵심인 사랑, 바로 그 사랑의 외피만 가져다 입은채 타인을 억압하는 것들이 세계의 도처에 깔려 있다. 때때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의 입과 목소리는 너무 달기 때문에 달다고 말할 수 없는 음료와 같다. 마실수록 달콤한, 달짝지근함에 입안이 텁텁해져 오는, 사랑하는 이의 손에서 내 손으로 건네진 것이기에 마실 수 밖에 없는 음료.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주인공 캄빌리는 바로 이 지독히도 달달한 음료를 아무말 없이 마셔야 한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만든 이 음료, 이것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런데 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아니, 진정 사랑이기는 한 것일까?


사랑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며 모순적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고, 애국자는 나라를 사랑하고, 인간은 동물을 사랑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부모의 뜻에만 따라사는 기계로 만들고, 여성을 성적으로 감정적으로 착취하고, 나라를 위한다며 국민을 짓밟고, 동물의 살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맛있게 먹어버린다. 사랑이라 불리는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를 가장 많이 억압한다는 것, 그럴싸해보이는 수사들 때문에 억압의 사실 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억압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도 쉽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 폭력도 사랑이라고 믿고 싶게 만드는 것.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잔인하게 인간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 중 하나이다.


가족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름다운 외피를 두른 폭력에 불과했다. 폭력이 폭력으로 보이지 않게끔 베일을 두르고, 자유를 전적으로 박탈한 뒤 자유란 위험한 것이라고 속이고, 지배자의 언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를 금한다. 캄빌리의 아버지가 행하는 선행조차도 자신이 세운 편협한 도덕관에 따른 결과일뿐이었다. 캄빌리는 유산한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용서' 받아야 하는지, 다른 종교를 믿는 할아버지가 왜 지옥에서 구원되길 기도해야 하는지, 자기생각을 당당히 말하는 이들을 아버지가 왜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혁신된 민주주의를 외치며 정의를 표방하는 신문사를 운영하고, 자신이 축적한 부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생활이 힘든 마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며, 많은 자선단체에 익명으로 기부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는 사랑했을지 모르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개인을 향한 구체적 가치를 사랑하는데는 무능했다.

약자는 다름아닌 자신의 언어와 세계를 가지지 못한 자들이다. 캄빌리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알려준 기도문이나 아버지가 듣고 싶어하는 말 이외에는 말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말을 했을때 '저 말을 내가 했었어야 했는데'라고 바란다. 캄빌리는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아버지의 욕망을 따른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며 억압자의 논리를 내면화한다. 아버지의 법에 따라 가치판단의 기준을 세운다. 캄빌리는 아버지의 세계에서 성장했고 그 성장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페오마 고모네를 만나며 캄빌리는 다른 세계와 조우한다. 누구를 기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말하고 떠들고 행동하는 이페오마 고모와 사촌들은 캄빌리를 아버지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초대한다. 두 세계가 부딪히며 충돌하고 분열한다. 죄책감이 밀려오지만 해방감을 느낀다. 캄빌리는 그렇게 자신의 언어를 배운다. 그가 만났던 수많은 자유로운 자아들과 상호작용하며.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억압적 가정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개인과 나이지리아 역사가 절묘하게 엮이는 지점에서 억압적 체제의 이중성에 대해 폭로한다. 캄빌리의 아버지 유진은 이 이중성의 화신이다. 나이지리아인이지만 서구의 사고방식을 철저히 내면화한, 그럼에도 가족에게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고수한다. 캄빌리에게 아버지는 사랑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를 상징적으로나 실제로나 죽여 넘어서야 했다. 힘은 우리가 그 대상을 '믿을 때' 에만 존재한다. 캄빌리가 아버지의 권위를, 가부장제의 실재를 믿지 않고 오로지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일을 할 자유가 있단 사실을 믿을때 그 폭압적 힘은 존재할 근거를 잃는다. 그냥 하는 것, 이유를 묻지도, 자격을 따지지도 않고 하는 것, 사랑은 한 자아가 다른 자아를 완전히 흡수해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고 넓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캄빌리는 성장한다. 모순되고 이중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언어를 찾아가는 캄빌리의 성장은 어쩌면 작가 아디치에가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는 용기있는 개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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