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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수직으로 떨어진 역사적 폭력 속에 수평으로 펼쳐진 개인을 향한 온갖 구조적이고 비가시적 폭력에 대한 이야기, 애나 번스의 <밀크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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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 번스의 <밀크맨>은 가시적 폭력이 난무한 폐쇄된 공동체에서 어떻게 구조적이고 비가시적인 폭력이 행해지고 은폐되며 작동하는지를 한 젊은 여성의 눈으로 생생하고 촘촘하게 묘사한다. 화자인 '나'가 사는 사회는 북아일랜드의 얼스터 지방의 상징으로 영국으로부터 아일랜드가 독립하면서 영국계 신교도와 아일랜드계 구교도 사이에 폭력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 폭력은 어떻게 나뉘고 작동하는가. 어떤 폭력은 폭력이라 말할 수 있고, 어떤 폭력은 폭력이라 말할 수 없는가. 정의로운 폭력은 무엇이고 부정의한 폭력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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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은 자신의 책인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발터 벤야민을 빌려와 폭력에 대해 설명하려 했다. 여기서 폭력 자체의 개념을 정의하려 하기보단 현상을 보여주고 분류하는 방식으로 대체했다. 폭력의 핵심이 바로 언어를 통한 틀 지우기인바, 어쩌면 폭력에 하나의 정의와 하나의 얼굴만 부여하는 것도 그 자체로 폭력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에 따르면 폭력에는 가시적인 주관적 폭력과 비가시적인 구조적이고 객관적인 폭력이 있다. 개인의 일탈에 의해 행해지는 폭력이 가시적이고 주관적 폭력이라면 구조가 생산해내고 은폐하고 강화는 폭력이 비가지적이고 주관적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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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적인 폭력만을 폭력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가시적 폭력 또한 구조적 폭력의 표출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주인공 '나'가 사는 세계가 바로 이런 가시적 폭력만을 폭력으로 인정하는 사회인데, 이런 사회에서는 폭력에 희생당하는 주체뿐 아니라 그 폭력을 손에 들고 휘두르는 주체조차도 폭력에 희생된다. 그 권력자조차 구조의 일부이고 구조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촉측발의 상태에서 개인들이 각자도생을 해나가야만 하는 그런 사회에서는 권력을 가진 한 인물에 의해 삶의 안정이 좌지우지되며, 모든 것이 정치적 논쟁을 촉발하고, 누구나 배신의 공모자가 될 가능성을 말 한마디 한 마디에 품고 살아가기에 삶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상도를 벗어난 이들은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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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인 '나'가 사는 세계가 아닌 곳에서 과연 벤틀리는 어떤 의미일까? 부와 자본의 상징이거나 계급과 취향의 문제, 약간 양보해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영국의 상징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과연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국이라는 국가의 상징이 부와 계급의 상징보다 힘이 셀 수 있을까? 그러나 '나'가 사는 세계에서 벤틀리가 내포한 다양한 해석은 탈취되고 단지 제국주의의 상징인 '영국'만이 남는다. 벤틀리조차, 아니 벤틀리의 일부분에 불과한 과급기조차 이편과 저편을 가르고, 사상을 의심하고, 배신자로 낙인찍을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정치적 논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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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는 특히 젠더가 문제 된다. 아니, 젠더 자체가 구조적인 폭력이라 할 수 있다.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이 나누어져 있다는 것, 사회가 구성하고 생물학적 성에 따라 역할을 배분해놓고, 한 성이 다른 성에 종속되는 일, 심지어 이러한 분리와 차별에 대한 명령이 그 자체로 자기 예언적 역할을 하는 하나의 거대한 가스라이팅의 세계가 바로 화자의 세계이다. 밀크맨이 '나'에게 은밀히 접근해 그의 눈빛과 존재감만으로 나를 위협하고,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을 모두 알고 있고, 권력자인 그가 나를 쫓아다닌다는 사실이 피해자인 나를 어느새 남자를 홀리는 방탕한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진실은 아무도 믿지 않으며, 결국 밀크맨과 나의 불륜 아닌 불륜은 기정사실화되는 이 상황은 젠더가 구조적 폭력임을 말해준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만 없었다면 이는 폭력이 아닌가? 관계와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그 힘 자체가 폭력이란 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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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조적 폭력은 인간 삶의 조건에 틈틈이 스며들어있다. '나'의 세계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해선 안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든 죽을 수 있기에,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아픈 일이기에. 그 아픔을 견딜 수 없는 취약한 상태의 사회에 사는 취약한 인간들은 덜 사랑하는 사람을 그들의 배우자로 택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하늘의 색이 하늘색이고 붉은색이기도 하며, 핑크색이나 보라색, 혹은 노란색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고통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몇 안 되는 빛나고 순수한 사람들은 희생당하거나 사회적 타살인 자살을 택한다. 두려움과 슬픔이 압도하는 곳에서 그들은 살기 힘든 존재들이다. 혼란과 혼돈이라는 비정상이 정상이 된 상태에서 사람들은 구심점 없는 관점들만을 가지고 엄청난 증오를 자기 안에 축적한 채 살아간다. 그 분노는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고, 결국 내면세계가 통째로 사라져 버린다. 이것이 바로 구조적 폭력이 인간의 삶을 압제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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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맨>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떠올리게 했다. 엄청난 폭력 앞에서 과연 어떤 언어가 이를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형식과 문체는 상상할 수 없는 폭력적 세계를 살아가는 개인들이 겪는 혼란과 혼돈, 단절과 상실의 내용을 형식 그 자체로 표현한다. 애나 번스가 그와 비슷한 문체나 형식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밀크맨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비슷한 무언가를 느꼈다. 내 질문은 이것이다. "밀크맨"은 '나'를 괴롭히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가? 아니면 아일랜드인의 일상에 대한 침범과 경계의 감각의 상징인가? 애나 번스의 문체와 문장의 길이, 인물들 간 대화 방식, 폭력을 묘사하는 형식 자체가 단절되어 있음과 동시에 이 분절의 효과가 소설 전체의 주제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말이 난무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각자 혼자 떠들고 있는,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오해하고 의심하는, 오해를 풀기 위한 말이 오히려 문제를 더 일으키는 사회. 아이러니한 것은 '나'와 말이 통하는 인물들과는 실제로 말 다운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엄마의 첫사랑이자 친구인 진짜 밀크맨,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빛나는 알약 소녀의 동생, 아직 상징계의 법에 덜 물든 세 명의 어린 동생들, 정치성이 없어 결코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형부는 다소 폭력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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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소설은 폭력에 대한 이야기로만 끝나야 하는가. 애나 번스는 알약 소녀와 알약 소녀의 동생의 일화를 빌려 말한다. "나쁜 일들을 놓아버리면 용서가 뒷문으로 들어온다. (중략) 나는 용서할 수 없다, 특히 아직 사과도 받지 못했는데 용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중략) 나는 누구한테 사과를 받아야 하는지 용서받지 못한 자들이 무엇에 대해 사죄해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언니한테 마냥 사과를 기다리는 건 공격적인 생각 같으니 기다리기를 그만둘 수는 없겠느냐, 계속 기다리다 보면 심심이 더욱 피폐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언니는 떨치고 갈 수는 없고 일단 사과를 받아야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했고 나는 아니다, 정말 정말 아니다라고 했고 (중략) 세 번째로 둘이 차를 마시며 대화를 했을 때는 헛된 일, 받지 못한 사과, 용서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주제가 아니라 정체성, 유산, 전통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했다고 했다. (중략) 언니한테 내 생각에는 언니가 독을 넣을 때마다 자신을 분리하고 고립시키는데 너무 그쪽으로 신경을 쓰고 집착하고 어쩌면 적절한 수준 이상으로 몰입하는 것 아니냐고 했어. 다 같이 살아야 하잖아라고 물었더니 언니는 존중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게다가 반짝이는 면에만 주목한다면 다들 다른 면은 없다고 생각할 거라고 했어. 사람들이 잊어비록 말 거라고. 모든 게 괜찮다고 생각할 테고 그러면 기억하는 사람은 자기밖에 남지 않을 거라고했지." "너의 충실한, 힘든 날뿐 아니라 모든 날의 타인에 대한 공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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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국주의, 종교 충돌, 인종 젠더 계급 간의 충돌 등 모든 것은 타인에 대한 공포에서 연유된다. <밀크맨>은 타인의 폭력에 대한 구체성을 통해 보편성을 이야기하고, 다시 보편성을 통해 구체성으로 되돌아간다. 그 충돌과 분열 사이에서 탄생한 거대한 분노와 증오의 서사는 역사가 되고 타인에 대한 공포는 커져만 간다. 우리는 이런 과거를 세탁기에 빨래 넣듯이 깨끗하게 털어내고 용서한 후 앞으로만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얼룩 그 자체를 나쁜 일은 나쁜 일로서 받아들여 잊지 않고 용서를 끝까지 받아내야 하는가. 두 선택지 중 하나의 답이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지막 장에서 우연의 방식으로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고 인물들은 한 발자국 앞으로 디뎌 삶을 살아나간다. 당장은 큰 도약이 없지만, 그렇게라도 살아나가야 하는 것, 사랑이 마음을 흔들게 하고 아름다움이 삶을 조금 더 살고 싶게 만드는 것, 우선 그것부터 회복해보자고 말하기 위해 '나'의 이야기는 <밀크맨>으로 탄생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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