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아저씨 손 아저씨 우리 그림책 1
권정생 지음, 김용철 그림 / 국민서관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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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옛이야기와는 느낌이 다른 책 한권을 만났다. ‘지성이와 감천’이라는 옛이야기를 권정생 선생님이 다시 해석해서 썼다는 ‘길아저씨 손아저씨’. 보통 옛이야기라고 하면 이야기의 흐름을 반전하는 커다란 사건이 있기 마련인데 ‘길아저씨 손아저씨’에는 뜻밖의 행운이라든가, 주인공이 처해있는 운명을 바꿀만한 커다란 사건이 없다. 그냥 말 그대로 ‘옛날에 이런 사람이 살았더라’ 하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듣노라보면 ‘정말 이런 사람들이 있었을 테지. 어려운 처지이지만 서로 도우며 따뜻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의 소설 ‘한티재 하늘’을 역사소설이라 이름 짓기는 하지만 그냥 그보다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살았던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아온 이야기’라는 느낌이 더 크게 와 닿는 것처럼, 이 책도 그렇다.

그래서 소박하지만 더 정겹고, 따뜻하다.


‘옛날에 두 아저씨가 있었어요’ 이렇게 시작되는 이 책은 두다리가 불편한 길아저씨와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손아저씨의 이야기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자, 자기 힘으로 걷지 못하는 길아저씨는 하루종일 방안에서 갇혀 지내야 했고, 손아저씨는 그나마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구걸을 해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방안에서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파 묻은 체 앉아 있는 길아저씨, 그 앞에 비친 컴컴하고 커다란 그림자는 아저씨 앞에 놓인 절망의 크기를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어느날 손아저씨가 이웃 할머니한테 길아저씨 이야기를 듣고는 그 길로 길아저씨네 집에 찾아가서는 서로 도와 가면서 살자고 말한다. 손아저씨의 말에 금세 마음이 환하게 밝아진 길아저씨는 손아저씨의 눈이 되고 손아저씨는 길아저씨의 발이 되어 그렇게 한몸처럼 살게 되었다. 아저씨들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듯 이 때부터는 그림이 아주 밝아진다. 어두운 그림자는 없어지고 두 아저씨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묻어난다.

두 아저씨는 구걸을 하기도 했지만 새끼를 꼬기도 하고 짚신도 삼으면서 부지런히 일을 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두 아저씨의 솜씨도 점점 늘어나 이제는 남에게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꼼꼼하고 솜씨 좋은 아저씨들의 물건을 모두들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길아저씨와 손아저씨는 그들의 착한 마음을 알아주는 착한 아가씨한테 장가를 들었다. 두 아저씨는 부지런히 일을 해서 나란히 집도 새로 짓고, 함께 도우며, 사이좋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누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뭐지?’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알고 보니 ‘길아저씨 손아저씨’는 ‘지성이와 감천’이라는 이야기를 선생님이 재해석해서 쓴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펴내기전에도 ‘눈이 되고 발이 되고’ 라는 제목으로 이미 비슷한 이야기를 책으로 냈는데 ‘지성이와 감천’, ‘눈이 되고 발이 되고’, ‘길아저씨 손아저씨’는 이야기의 줄기는 같은데서 왔지만 그 느낌이 서로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길아저씨, 손아저씨’에는 눈이 불편한, 두다리가 불편한 아저씨가 살고 있다고 나오지, 아프다거나 장애가 있다는 말이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지성이와 감천이야기에는 다리가 아픈 앉은뱅이, 눈이 먼 장님이라고 나온다. 아프다는 것과 불편하다는 것, 비슷한 말이지만 많은 차이가 있다.

지성이와 감천이도 길아저씨와 손아저씨처럼 몸이 불편하지만 서로의 눈과 발이 되어 도우며 살아간다. 그런데 두사람은 우연히 냇가에서 황금덩어리를 발견하고, 서로 가지라고 양보하다가 싸우게 되자 이래서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황금덩어리를 도로 냇가에 갖다버린다. 다른 사람이 황금덩어리를 주우려고 보니 똥으로 변해 있는데 지성이와 감천이 다시 보니 황금덩어리가 둘로 나눠져 있어서 둘은 황금덩어리를 부처님께 갖다 그래서 지성이는 눈을 뜨게 되고 감천이는 오그라졌던 다리가 펴져 걷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지성이와 감천이’ 이야기는 두사람이 서로 도우며 착하게 산 덕으로 황금덩어리라는 큰 복을 얻게 되고 그해 두사람의 인생이 확 달라지는 반전으로 끝이 나고, ‘눈이 되고 발이 되고’ 에는 두사람이 황금덩어리를 도로 물에다 갖다 놓자 황금덩어리가 두동강으로 나눠 져서, 두사람은 그걸 가지고 마을로 내려가 소도 사고, 논도 사고, 집도 사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걸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

 

그런데 ‘길아저씨와 손아저씨’ 이야기에는 옛이야기에서 흔히 나오는 착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행운이나 두사람의 운명을 바꿀만한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처지가 비슷한 두 아저씨가 서로 도우며 살다가,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나가는 소박한 이야기이다. 

더구나 석판화로 그린 민화풍의 그림은 이 이야기의 느낌과 너무나 잘 어울려 소박하면서도 정감어린 책이 되었다. 배경을 줄이고, 인물을 중심에 드러낸 그림은 두 사람의 마음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어, 불편한 몸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헤아려 보게 된다. 


아이들한테는 이 이야기가 어떤 느낌으로 와 닿을까?

앞의 두 이야기와 비교해보면 너무 시시하다고 할까? 어떨까?

고학년이 되어 세 이야기를 같이 읽고 이야기를 나눠 보면 참 좋을 것 같다.

서로가 어려운 형편이다 보니 마음이 더 잘 통해서 함께 도우며 한몸처럼 살아가는 이야기.

지금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꿈같은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도 어디에선가 어렵고 힘든 처지를 서로 보듬고, 몸과 마음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두 아저씨처럼 큰 불편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조금씩 모자란 점이 있어 혼자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기에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는 평범한 진실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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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뿌뿌 비룡소의 그림동화 36
케빈 헹크스 글 그림, 이경혜 옮김 / 비룡소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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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헹커스의 글과 그림에는 그만의 유머와 재치가 느껴져, 읽고 나면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데 ‘내 사랑 뿌뿌’도 그렇다. 낡은 담요 한 장에 담긴 아이들의 마음을 어쩜 이렇게 잘 표현해냈을까?

이제 학교를 입학 할 나이가 됐는데도 아직 아기 때 쓰던 이불 뿌뿌를 늘 끼고 다니는 오웬. 엄마 아빠는 거기에 별 생각이 없어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옆집에 사는 족집게 아주머니가 딴지를 건다. 다 큰 애가 저렇게 애기처럼 굴어서 어떡하냐고....... 그러자 그때부터 오웬의 부모님도 뭔가 잘 못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뿌뿌를 떼어 놓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전수 받는다.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가도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면 아이한테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여기는 부모의 모습이 오웬의 엄마 아빠에게도 그대로 드러난다. 아이에 대해서 누가 뭐라고 한마디만 해도 아이를 잘 못 키우고 있는 건 아닌가? 저래서 앞으로 어떻게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 뭐 이런 생각까지 하니 오웬의 엄마 아빠가 느끼는 심정이 충분히 이해간다.


뿌뿌를 떼어놓기 위해 족집게 아줌마는 여러 가지 비법을 가르쳐 주는데 그 첫 번째 방법은 요술담요 비법이었다. 요술담요가 뿌뿌를 데려가는 대신 굉장히 멋지고, 훌륭하며,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오웬은 그 모든 것보다 뿌뿌가 더 좋다. 그래서 잠옷 바지 속에 뿌뿌를 꼬꼬 쑤셔넣고 잠자리에 드니 요술 담요 비법이 통할 리가 없다.

두 번째 식초 방법, 오웬이 한 눈을 판 사이에 아빠가 뿌뿌를 식초에 적셔보지만 오웬은 그걸 마당에 파묻었다가 다시 파내고는 새 담요 같다고 말하니 식초 비법도 소용이 없다. 예전처럼 폭신폭신하지는 않지만 흔들어 댈 수도 있고, 걸칠 수도 있고, 끌고 다닐 수도 있으니 오웬은 여전히 뿌뿌가 좋기만 하다.

마지막 방법은 ‘안 돼’ 비법인데 족집게 아줌마는 이것을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권했을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오웬의 마음만 상하게 할 뿐이었다. 뿌뿌를 학교에 데리고 갈거라는 말에 엄마 아빠가 무조건 안 돼라고 말하자 오웬은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런 모습을 보니 엄마 아빠도 마음이 안됐는지 오히려 오웬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굉장히 멋지고,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고, 대단히 근사한 생각을 해냈으니, 그건 바로 뿌뿌를 여러장의 손수건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웬은 굳이 뿌뿌를 떼어 놓지 않고도, 어디든 함께 다닐 수 있었다.


엄마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다른 애착대상물을 갖게 된다 하니 오웬한테 뿌뿌는 그냥 담요가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로부터 떨어져 나가면서 생기는 불안과 두려움을 달래주고 위로해주었던 뿌뿌를 어떻게 어느 날 갑자기 떼어 버릴 수가 있을까? 우리 조카는 젖을 떼면서 엄마가 입던 윗옷에 애착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냥 평범한 줄무늬 티셔츠였는데 잠을 잘 때는 물론이고, 울다가도 그 옷을 찾아 만지고 냄새를 맡으면서 울음을 그치곤 했다. 할머니집이나 먼 길을 갈 때도 늘 그 옷을 챙겨가곤 했는데 어쩌다 밤에 깨서 옷을 찾을 때 비슷하게 생긴 다른 티셔츠를 던져주면 귀신같이 알아내고는 아니라며 그 옷을 달라고 했으니, 그 옷은 돌을 지나 젖을 떼면서 허전하고 두려웠을 아이의 마음을 달래주는 대상이었다.

다섯 살이 되도록 그 옷을 가지고 다니던 조카의 모습이 생각나 뿌뿌를 떼어 내고 싶지 않은 오웬의 마음이 너무나 잘 와 닿았다. 다른 사람들은 집착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내눈에는 엄마말고도 안정감을 주는 그런 대상이 있다는게 나쁘지 않아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서 다 큰 애가, 그것도 남자 애가 엄마 옷에 집착한다고 한마디씩 건넸지만 그 옷에 담긴 아이의 마음을 안다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오웬을 위로해주고, 오웬에게 뿌뿌를 떼어나지 않아도 되는 멋진 방법을 찾아준 오웬의 엄마 아빠를 보니 아무리 주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권한다 해도 내 아이에게 맞는 방법은 그 아이의 부모가 가장 잘 찾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웬의 마음을 헤아리고, 오웬에게 필요한게 무엇인지 알아내는 엄마 아빠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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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무서워, 안 무서워, 안 무서워
마사 알렉산더 지음, 서남희 옮김 / 보림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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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기보다 더 어리고 약한, 돌봄을 필요로 하는 대상 앞에서는 누구나 더 굳세어지고, 무서움도 피하지 않고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말이 떠오른다. 아이는 작은 곰 인형을 안고 숲 속을 걸어가면서 “걱정하지마, 내가 널 지켜줄게”라고 말하며 혼자 걸어가기에는 쉽지 않은 낯선 숲길을 헤쳐 나간다. 숲에는 동물 울음소리 같은 여러 가지 소리들도 들리고, 커다란 나무토막도 떨어져 있다. 이리로 가면 집으로 나오는 길이 열릴 거라 생각하고 곰돌이를 안심시키며 걸어가는 작은 아이. 바람처럼 달릴 수도 있고, 나쁜 애들이 나오면 커다란 몽둥이로 때려눕힐 테니 하나도 안 무섭다고 큰소리치며 걸어가지만 마음속으로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낯선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 잘 해보겠다고, 잘 할 수 있다고 자기 암시를 하며, 그렇게 용기를 내어보다가도 막상 그 길을 들어서고 나면 잘 할 수 있을까? 이 길이 맞기나 하는 걸까?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걸까? 두려움이 일기도 하고 자신이 없어지기도 하니....... 이제 막 혼자 힘으로 일어서기 시작하고, 세상에 맞서야 하는 아이들은 어떤 느낌일까?

물론 새로운 상황에 쉽게 적응하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소심한 아이들은 자기 혼자 힘으로 세상을 만나야 한다는 게 두렵고, 힘들기도 할 것이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는 마음이 안타깝긴 해도 직접 거기에 뛰어 들어 아이를 꺼집어낼 수는 없다. 아이가 스스로 두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지켜보고 마음으로 응원하는 수밖에……. 그런데 부모가 할 수 없는 일을 곰돌이 인형이 해주었다.


큰소리치며 자신감에 차 있던 아이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고, 몸은 자꾸만 움츠러들고 있으니 이때부터 아이의 품안에 안겨 있던 곰돌이 인형이 아이와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간다. 곰돌이 인형의 몸집은 점점 커져서 아이를 감싸기도 하고, 어깨를 어루만지고, 안아주었다. 커다랗게 변한 곰 인형이 두려워서 떨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아 주고 말없이 아이를 쳐다보는데 ‘그래 무섭지, 아까는 네가 날 지켜줬으니 이제 내가 널 지켜줄게’ 하고 말하는 듯하다. 따뜻한 곰 인형의 눈길이 느껴지는 그림이 참 좋다.


처음에는 아이가 곰돌이 인형을 돌보아 주고, 무서움에서 지켜주는 형 노릇을 했지만 나중에는 곰돌이 인형이 아이를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곰돌이 인형 앞에서 아이는 씩씩하고 용기 있는 안내자가 되기도 하고, 또 두렵고 무서운 자기 마음을 폭신하고 넉넉한 곰돌이 품에 기대고도 싶어 했다. 누구한테나 이런 곰돌이 인형 같은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낯선 곳을 두려워하고, 새로운 곳에 적응하기 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어 이래저래 걱정이 많은데 어쩔 수 없이 어린이집에 가야하는 어린 동생을 두고 “누나도 처음에 유치원에 갔을 때 좀 울었어,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처음에는 울 수도 있어” 하며 자기 경험을 들려주는 걸 들었다. 아직 세 돌이 되지 않은 어린 동생 앞에서 큰 아이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동생을 격려해주고 있었다.

엄마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는 훨씬 더 씩씩하고 용기가 있겠지만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네도 낯서니, 혼자서 학교에 걸어가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그럴 때 아이에게 용기를 주고, 아이를 지켜주기도 하는 곰돌이 인형 같은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학교를 오가는 길에 친구가 될 수 있는 작은 인형 하나를 가방에 메달아 주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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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내다 버릴 테야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66
마사 알렉산더 지음, 서남희 옮김 / 보림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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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묻어 두지 않고 드러내기.

‘엄마를 내다 버릴 테야’ 제목을 보는 순간 마음이 뜨끔하다. 무슨 내용일까 엄마인 내가 미리 검열부터 해야겠다 싶어 얼른 책을 펼쳐 들어 읽었다. 휴~ 다행이다. 엄마를 내다 버릴 테야는 제목은 아이의 속상하고, 화난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말이지……. 내가 생각하는 극단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책을 읽고 난 뒤에는 오히려 이렇게 자기감정을 발산하고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면,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들을 눈치 보지 않고 다 털어놓을 수 있다면 엄마와 그만큼 깊은 유대관계가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했다. 엄마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그다지 놀란 표정을 짓지도 않고, 아이를 나무라지 않고, 아이의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엄마의 태도가 인상 깊었다.

우리집 아이들이 만약 이런 말을 한다면 아마도 난 그 말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 몇날 며칠 그 말을 되새기며, 평소 엄마에 대한 감정이 이렇게 안 좋았나 싶어서 우울한 날을 보냈지 싶은데……. 올리버의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곧 동생이 태어날 걸 준비하면서 큰 아이의 물건을 이것저것 정리하는 가운데 올리버는 엄마의 관심이 온통 동생한테만 가 있는 것 같아 속상하고, 자기 물건을 물어보지도 않고 동생한테 줄려고 하는 엄마한테 화가 나서 엄마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릴 거라는 말을 했다. 쓰레기통에 던져서 뚜껑도 닫아 버리고, 막대기로 탁탁 때리고, 먹을 것도 안 줄 거라는 아이의 말이 너무 심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 엄마인 나도 화가 나고 속상할 때, 아이의 행동을 바로 잡는 구실 아래 심한 말을 내뱉으면서 아이가 하는 말에는 참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걸 알았다.

만약 우리집 아이가 쓰레기장에 가서 먼지를 팍팍 뒤집어씌우고 거기다 버려두고 올 거라고 말했다면 엄마한테 그렇게 심한 말을 하면 어떡하냐며,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라고 타이르기부터 했을 것 같은데 올리버의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화가 나고 속상해서 내뱉은 아이의 말을 과대해석하지 않고, 아이가 더 마음껏 감정을 발산하도록 도와주면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더러운데 우리를 버릴 거냐는 엄마의 말에 그럼 엄마대신 자기가 집을 나가 오두막에 가서 혼자 안거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니 동생한테 사랑을 빼앗겨 온통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아이의 상실감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속상하고 화난 순간에 그 감정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면, 눈치 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화나고 속상한 마음의 반은 풀어진 거라 하던데....... 올리버도 그랬나보다. ‘네가 나가지 않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며 엄마한테는 자기가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화난 마음이 스르르 풀어져 ‘내가 엄마 옆에 있어 줄게’라고 말하게 되었다.


보통 새 책을 받으면 엄마인 내가 먼저 읽지 않고 아이와 함께 읽으면서 책에 대한 선입관 없이 아이의 반응을 살피곤 하는데……. 이 책은 내가 먼저 읽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 뒤 아이와 함께 읽었다. 소극적인 우리집 큰 아이는 엄마를 내다 버릴 거라 말하며 그것도 쓰레기통에 엄마를 버리고 뚜껑을 닫아 막대기로 탁탁 칠거라는 장면을 보더니 조금 놀라기도 하고, 또 우습기도 한가 보다. 엄마를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못했는데 이럴 수도 있구나 싶어서 놀라운 듯 했다. 거기에 어떤 설명이나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냥 같이 읽었다.

네 살된 둘째 아이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장난처럼 엄마를 여기다 가두자는 말을 하기도 하고, 어쩌다 아빠가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때 그럼 아빠를 쓰레기통에 넣을 거야라는 말을 해서 우리 식구를 웃게 만들었다.

 

이제 초등학생 입학을 앞두고 있는 큰 아이가 앞으로 학년을 올라가면서 엄마 때문에 아님, 학교생활이나 친구 때문에 힘들고 속상한 마음을 묻어 두지 않고, 마음껏 털어 놓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때로 엄마인 내 기준에 벗어난 말을 한다하더라도 그 말을 도덕적인 잣대나 어떤 틀에 맞추어 옳다 그르다 판단하지 않고, 그냥 껴안아 주고 받아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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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 동생 낳아 달랬어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67
마사 알렉산더 지음, 서남희 옮김 / 보림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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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아이를 위해 동생을 낳는다고 생각했다. 혼자 있으면 쓸쓸하고 외롭지 않을까? 형제가 있어야 함께 어울려 놀고, 나누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생각하며 큰 아이를 위해 동생을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둘째를 가지는데 별다른 갈등이 없었다. 당연한 거라 생각하고, 큰 아이를 위해서는 너무 터울이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아야 한다 생각하고 임신을 계획하고 둘째를 낳았다.
첫째가 딸이니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커서까지도 서로 마음을 나누며 좋은 자매로 지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딸이 아니더라도 첫째가 여자 아이니 남동생을 잘 돌보아 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렇게 둘째 녀석을 낳았다.

그런데 낳고 보니 나의 기대와 바람은 온데 간데 없어져 버렸다. 순하고, 잠 잘 자던 큰 아이와 달리 둘째 아이는 잘 아프고, 잠도 잘 못자니 하루종일 손에서 놓지를 못했다. 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까 생각하다가 동생이 태어나고 자라는 걸 지켜보면 더 정이 두터워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집에 있기로 했는데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그러면서 든 생각, 큰 아이를 위해 동생을 낳는다 생각했는데 과연 그 말이 맞는 말인가? 동생은 자라면서 많이 수월해지고 한 없이 귀여워졌지만, 큰 아이와 손잡고 나들이를 하는 일도, 밤에 잠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던 일도 다 못하게 되었으니...... 큰 아이를 위한다는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욕심이 너무 많다고 했다. 남들은 둘째 아이가 더 예쁘다고 하는데 나는 첫째 아이가 느낄 상실감 때문에 그게 더 많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큰 아이는 동생에 대한 시샘이나 질투도 하지 않고 무던히도 잘 지내주었지만 나는 그게 안타까워 속앓이를 했다.

그래서일까? ‘내가 언제 동생 낳아 달라고 했어’ 이 책 제목을 보는 순간 너무 공감이 갔다. 아이를 위한다고 했지만 큰 아이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구나…….
책 속의 아이는 우리집 아이와는 달리 자기 의사 표현이 아주 적극적인 남자 아이였다.
모두들 동생한테만 관심을 가지고 귀여워하자, 그게 못마땅해 누가 아기를 키울 사람이 없는가 찾으러 다닌다. 유모차를 태우고 다니며 아기를 키울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지만 모두들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을 한다. 아무도 키우고 싶어하지 않는 아기를 데려갈 사람이 없을까? 찾아보다가 아는 형을 만나고 그 집에 아기를 데리고 간다.
그런데 아기는 그 집 엄마나 다른 형제들이 안아주어도 울기만 하니 아이들은 아기를 보고 말썽꾸러기라고 하고, 꽥꽥 오리처럼 소리를 지른다고 싫어한다. 그러던 아기가 오빠를 알아보고는 울음을 그치고, 오빠 품안에 안겨서는 방긋방긋 웃으니 할 수 없이 다시 유모차에 태워 집으로 데려간다.

그러면서 아이는 생각한다. 나중에 아기가 좀더 자라면 마차 놀이를 하면 좋겠다고....... 아이가 머릿속에 그려보는 상상은 이제 막 동생을 본 모든 첫째 아이들의 바람을 그대로 담고 있다. 동생이 태어나면 같이 놀고,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는 너무 작고 어려 같이 놀려면 한 참 더 기다려야 하고, 어른들의 모든 관심은 아기한테 가 있으니 동생이 태어나면 좋을 거라는 말이 실감나게 와 닿을 리가 없다.

우리집 아이는 책 속의 남자 아이처럼 적극적이지 않아 그런 속마음을 드러낸 일은 없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큰 아이가 ‘참 쉽지 않은 시간을 잘도 견디었구나’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물론 지금 큰 아이는 방학동안 동생이랑 하루종일 엉겨 붙어 논다고 심심할 틈이 없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성별이 달라도 서로 잘 어울려 놀고, 어쩔 때는 둘이 힘을 합쳐 엄마를 따돌리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흐뭇한 웃음이 나온다. 동생이 어쩌다 늦잠이라도 자는 날에는 빨리 일어나면 좋겠다고 깨우려고까지 하니..... 이제는 큰 아이를 위해 동생이 있고, 동생을 위해 누나가 있어서 좋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어린 아기 동생을 다른 사람한테 갖다 주려는 큰 아이의 행동과 그안에 담긴 마음을 여유있게 웃으면서 볼 수 있었다. 사이 좋게 어울려 노는 남매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한 것을 모르고, 조급한 마음에 속앓이를 했구나 싶다.  

동생이 태어나는 건 남편이 바람을 피워 딴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만큼의 큰 충격이라지만 돌이켜보면 힘들고 어려운 시간도 잠깐 인 듯하다. 혹시 갓난 아기가 태언난지 얼마 안되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엄마가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큰 아이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여유있게 기다리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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