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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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으로 급관심 작가가 된 줌파 라히리..

인도계 미국인이라는데에서부터 호기심은 발동한다.  책날개에 실린 그녀의 사진을 보면 상당한 미인이다.  인도인다운 깊고 큰 눈과 짙은 눈썹, 피부가 까무잡잡해서 그렇지 서양인다운 마스크를 가졌다.   미국인과 결혼했는데, 그녀의 단편 <길들지 않은 방>의 내용과 같이 부모님의 반대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와 쭉 자라왔는데도, 그녀의 단편 소설을 보면 인도인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보였다.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집에서는 영어 말고 인도 벵골어로 말하게 양육되었기 때문일까.  집에서는 벵골어, 학교에서는 영어를 사용해야만 했다.   그녀는 뱅골어를 완벽하게 말해 부모님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고, 미국인으로서도 온전히 인정받기 위해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싶었다.   둘 다 뿌리내리지 못했고 둘 다 불완전함을 느꼈다고..  

 

"이 두 언어는 서로 맞지 않았다.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양립할 수 없는 원수 같았다.  벵골어와 영어는 나를 빼곤 서로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 나 자신도 언어에서 모순을 느꼈다"(120페이지)

 

이중 언어 사용자의 분열된 정체성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영어로 글을 써서 인정받았는데도 영어에 깊이 안착하지 못했다.  이탈리아어를 듣는 순간 어떤 친숙함, 인연, 애정을 느꼈다.  이탈리아어를 배우지 않으면 자신을 채울 수 없고 완성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어를 점차 알아가는 것은 그녀에게 흥분과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이 작은 사전은 부모라기보다 형제 같다.  여전히 내게 필요하고 아직도 날 이끌어준다.  사전에는 비밀들이 가득하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18페이지)

 

그녀가 이탈리아어를 처음 접한 것은 동생과 함께 이탈리아 피렌체로 여행을 가서이다.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17세기 영국 극작가들에게 미친 이탈리아 건축의 영향"으로 쓴 이후였다.   

 

"이탈리아어 공부는 나의 삶 안에서 벌어진 영어와 벵골어의 긴 싸움으로부터 도주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모국어 벵골어도 새어머니인 영어도 거부하는 길이었다.  독립적인 노정이었다"(123페이지)

 

이탈리아어 공부에 빠지더니 남편, 아이들 모두와 함께 아예 로마로 이주했다.   영어 작가로 인정받은 이후여서 모두들 의아해 했다.   그녀는 이제 마치 한번도 글을 써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왜 작가로 명성을 안겨준 영어를 포기하고 불완전하고 빈약한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려고 했을까. 

 

"이탈리어어로 글을 쓰면서 난 영어에 대한 패배감이나 성공에서 도망치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탈리아어는 아주 다른 문학 과정을 내게 선물한다.  작가로서의 장비를 떼어낼 수 있기에 난 다시 나를 만들어갈 수 있다.  나 자신을 전문가라 생각하지 않은 채 단어를 모으고 문장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 나는 갖은 애를 써도 실패한다.  하지만 오래전 영어에 대해서 느꼈던 패배감과는 달리 난 실패해도 고통스럽지 않으며 고민하지 않는다"(133페이지)

 

줌파 라히리의 어머니가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 문화에 저항하고, 인도인의 정체성을 지킨 것에 자부심을 느낀 것에 반해, 그녀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어했다.  전에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우리를 움직이는 뭔가를 찾고 싶었다.  그녀는 새로운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작가다운 변모이지 않나.    건물에 무너질지 몰라 가설물, 비계를 설치하는 것처럼, 그녀도 지금은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 비계를 필요로 한다.  그녀는 언젠가 이 비계를 제거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글을 쓸 날을 기대하고 있다.  

 

이탈리어어가 어떤 언어인지 이 책을 읽다보니 궁금해진다.  어떤 언어이길래 줌파 라히리가 듣는 순간 친숙함과 아름다움을 느꼈을까.   새로운 언어가 이렇게 사람을 휘감아 몰아칠수도 있구나.  언어적으로 뛰어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마법같은 걸까.  이탈리아 문학도 갑자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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