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93페이지)

 

우리는 이 책의 저자 아니 에르노와 그녀의 아버지를 말한다.   왜 그들이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는지, 왜 그들에게 거리감이 찾아왔는지에 대해서 알려면 아버지의 유년 시절, 아버지의 삶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아버지는 배우는 것을 좋아했지만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수료반에 있던 그를 빼내어 농가에 집어넣었다.    어린 나이부터 농가에서 먹고 자며 일하다가 1차 대전이 일어나자 입대한 후 드뎌 세상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제대 후에는 공장에 취업한 후 결혼하게 되고, 노동자로 일하다가 가게를 운영해 보기로 했다.   가게는 외상으로 사가는 사람들이 많아 운영은 어려웠고, 그 와중에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피난을 떠나게 된다.  그 때 어머니는 아니 에르노를 임신중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카페겸 식료품점을 운영하게 된 아버지와 어머니..  카페는 어머니가 주도해서 운영하고, 가족적인 분위기에 단골도 늘어났다.  아버지는 주변을 고치고 손보는 일을 주로 하며, 가게가 잘 안될 때에는 공장에 취업해서 일하기도 했다.   아니 에르노는 부족한 것 없이 자랐고, 기숙 학교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자기 의견을 드러내지 않고, 예절 바르게 보이려고 소심해지거나 뻣뻣해지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사람들에겐 점잖게 얘기하다가도 가족들에겐 사투리와 욕설이 튀어나오고, 딸을 품위있게 혼내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가족간에 다정한 대화는 잘 오가지 않았다.  

 

아니 에르노는 어머니와는 같은 여자로서 통했지만,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아버지하고는 대화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니 에르노에게 해 줄 게 아무것도 없었고, 아니 에르노도 아버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는 딸이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느껴면서도, 딸과 점점 멀어지는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두려워했다.

 

아버지는 딸의 친구들이 찾아왔을 때엔 최선을 다했고 딸을 창피하게 만든 적이 없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 했다.   딸이 교양있고 예의 바른 사위감을 데리고 왔을 땐 더없이 좋아했다.   결혼 이후에 딸을 잘 만나지 못했고, 딸이 한번씩 친정을 방문할 때 사위는 함께 오지 않았다.  

 

"식구 대부분이 고학력자이며 대화 중에 끊임없이 <아이러니>를 구사하는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남자가 어떻게 이 순박한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즐거울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치 있는 대화의 부재>라는 이 본질적인 결함을 보상할 수는 없었다."(108페이지)

 

아니 에르노가 두살 반 된 아들을 데리고 방문했을 때, 아버지는 가슴 어딘가 통증을 하소연하며 며칠 앓다가 숨을 거뒀다.    서민의 소음과 나부대는 아이들을 싫어하는 자신의 모습에 브루주아 여자 다 되었다며 경악스러워했고, 이 모든 것을 설명해 보고 싶었다.  아버지와 그의 삶에 대해, 계층 간의 거리감,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지만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그것이 바로 아니 에로노기 아버지를 중심인물로 한 이 글을 쓴 이유였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부유하고도 교양 있는 세계에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내려놓아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작업을, 난 이제 이렇게 끝냈다"

 

마지막에 아니 에르노는 옛 제자를 만난 에피소드를 덧붙혔다.  그녀가 매장 계산대에서 옛 제자를 만나게 되었고, 제자에게 별 뜻 없이 <잘 지내요? 여기 일은 재미있나요?> 라고 물어보았다.   제자는 <네. 네..  기술학교 들어가서 잘 풀리지 못했어요>라고 답했다.   제자는 자신의 진로를 그녀가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왜 덧붙혔을까.  제자가 자신의 진로를 구차하게 변명하고 있듯이,  그녀도 자신의 아버지를 자신의 태생적인 실체를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밝히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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