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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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 토리노 대학교 화학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프리모 레비는 화학자로서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하며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시대는 파시즘의 기운이 휘감고 있었고, 인종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전쟁은 코앞으로 다가온 듯 했다.   사람들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못본듯 곧 잊혀질 것들로 치부했기에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었다. 

 

저자는 인종법에 따라 직업의 자유가 없는 유대인이지만 지식인 화학자였기에 광산에서 "니켈"을 분류하는 일을 하고, "인"을 추출해 당뇨병 치료제를 만드는 연구를 하면서 위태위태한 시간을 보냈다. 

  

파시즘은 20년간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들더니 이탈리아를 전쟁의 불길에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제 사람들은 파시즘에 분노를 표출했다.  하지만 충분한 준비도 없는 헛된 몸짓..   나치의 점령 기회를 제공하고, 저자는 동료들과 함께 빨치산으로 항전하다 잡혀 아우슈비츠에 수용된다.  

 

수용소에서의 일은 다른 책에 자세히 나와있다며 이 책에서 많은 양을 할애하지는 않았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일터 화학공장 실험실에서 물건을 몰래 빼와 먹을 수 있는 것은 먹고 팔 것은 팔아 배를 채운 얘기는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짐작케해 준다.   심지어 파라핀을 산화시켜 얻은 지방산을 먹기도 했고, "세륨"(발화성물질) 막대를 며칠 밤 몰래 갈아서 성냥공장에 팔아 빵을 사먹기도 했다. 

 

그리고 러시아군이 도착해 수용소를 떠나 며칠밤을 걸었던 일,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은 학살당한 이야기도 다른 책에서 서술했다며 간략하게 언급만 했다.   저자는 <이것이 인간인가>, <귀환>으로 그의 수용소 생활과 기적적인 생환에 대한 얘기를 증언한 바 있다.  이 두 권의 책으로 프리모 레비라는 작가는 세상에 알려졌지만, 그는 여전히 화학자이길 바랬다.  이 책은 그가 화학자임을 잊지 않게 해준다.    주기율표에 나오는 21개의 원소 하나 하나와 연관하여 그의 인생의 한 단면을 꺼내 얘기해 주고 있다.

 

첫번째 원소가 "아르곤"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유대인 이웃 선조를 아르곤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아르곤은 비활성 기체로, 실상 이산화탄소보다도 스무배 또는 서른 배가 더 많은 양인데도, 희유가스라고도 불린다.   유대인 선조들은 존재하지만 활동이 억제되어 드물었던 것 처럼 느끼면서 자라온 화학자가 이를 두고 아르곤으로 비유한 것은 어떤 씁슬함과 허탈감이 보이는 듯 하다.  

 

다음은 위에서 말한 대학 시절, 연구소 생활과 간략하게 언급한 수용소 생활이 이어지고, 책의 후반부에는 수용소 생활의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는 "우라늄"과 "바나듐"에 얽힌 얘기가 나온다.   특히 "바나듐"편에서 저자는 수용소에서 만났던 독일인 뮐러 박사와 일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면서 적을 용서할 준비가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에 직면한다.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띄었지만 소설이 아니다.  저자의 생생한 증언이고 작은 역사이다.   저자는 글을 쓰면서 귀환자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글은 치유의 힘이 정녕 없었던 것일까.  여러권의 책을 썼음에도 돌연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책이 아주 잘 읽히는 것은 아니다.  서사적 구조와 어떤 전개 위기가 있는 소설이 아니라, 덤덤한 회상 이야기라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은 것은 원소 하나하나에 어떤 이야기가 연상되어 펼쳐질지 궁금하고 저자가 어떻게 극한 인생을 극복하고 살아내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 인생 이야기는 감동적이고 책은 만족스럽다.    뒷부분에는 필립 로스와 프리모 레비의 대담이 부록으로 실려있다. 

 

"이 이야기가 소설이라면 나는 이 시점에서, 해방을 맞은 독일인이 보낸 겸손하고 따스하고 기독교적인 편지와 고집스러운 인종주의자가 보낸 야비하고 거만하고 차가운 편지, 이런 두 종류만을 소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꾸며낸 게 아니다.  현실은 허구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덜 정돈되어 있으며, 더 거칠고 덜 원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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