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라는 말에 할머니가 슬쩍 얼굴을 붉힌다. 자, 찍을게요. 말하자 화면 가득 환한 미소가 번진다. 셔터를 누르기 직전 앵글 속 할머니가 조금씩 변해간다. 까맣게 핀 검버섯과 굵고 선명한 주름이 사라진다. 움푹 파인 회색 눈이 커지더니, 또렷하게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된다. 푸석하고 짧은 곱슬머리가 풀어져 귀밑에서 찰랑거린다. 바람에 까만 비단이 흔들리듯 흑단 머리카락이 남실거린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75세 최옥분씨가 아니다. 두 볼이 통통하고 발갛게 달아오른 열다섯 옥분이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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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두 손으로 조심히 머그잔을 쥐고는 한 모금 또 한 모금 커피를 마신다. 아니, 음미한다. 우유 거품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주름진 입가에 번진다. 할머니가 잔을 내려놓고는 카페 곳곳에 시선을 둔다. 딱히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이다. 그런데 할머니의 환한 얼굴이, 그 안온한 미소가 보이지 않는 파도가 되어 가슴 깊숙한 곳까지 밀려든다. 할머니는 지금 카페에 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나는 유리 너머에 있는 할머니를 바라보다 카페로 다가간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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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법한 모든 것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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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시절 안에서 질식사하기 전에, 우주의 무용한 먼지조차 이루지 못하고 부서지기 전에, 부풀어오른 흉터를 덮어두는 대신 찢고 통과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참화에서 빠져나오는 마음은, 폐광 속 이름도 가치도 모를 광물 쪼가리 같았다.

- 니니코라치우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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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피해자들 각각의 몸이 바벨탑이었을지 모르나 어느새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바벨탑이 된다. 말이라는 군도에 붙어 기식하던 땅덩이들이 갈라지더니 흙덩이와 돌덩이로 세분되고 세절되어 풍랑에 흩어진다. 명쾌한 의미 전달을 빌미삼아 말로 선을 넘던 자들은 이제 선이 없는 존재들이 된다. 세상은 말을 잃은 자들과 아직 말을 잃지 않은 자들 두 부류로 나뉘는데 아직 말을 잃지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제대로 된 말을 구사하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을 만큼 말의 체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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