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모든 설레는 것들의 노래가 축제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 진정한 축제의 시간이란 온몸으로 자신을 느끼는 시간을 이름이지. 온몸으로 자신을 느끼는 시간.... 그의 말을 들으며 왠지 행복해졌습니다.

 

화진에 이르렀다. 언제부턴가 나는 동해안의 그 많은 포구들과 해수욕장의 이름들 중 화진을 제일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꽃나루인지, 꽃이 다 진 포구인지 잘 모르겠다. 이곳에 오면, 이곳에서만 피어나는, 참으로 아름답고 눈부시고 장엄한 꽃들의 화엄을 만날 수 있다. 꽃들은 서로 어깨를 걸고 팔짱을 껴고 아무런 쓸쓸함이나 두려움 없이 밀려오고 또 밀려간다. 산산히 부서지고, 하늘까지 다다를 듯 응고하며, 깊고 깊은 포발 속에 선명한 무지개의 가루를 드리운다. 26  

 

지나간 계절은 혹독했고 쓸쓸했으며 위대했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나무들의 나신이 뿌리 뽑혔으며 삶의 방황은 끝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 바다에서는 늘 새로운 꽃이 지고 꽃이 핀다. 봄의 냄새가, 밀려오는 꽃향기가 파도의 이랑 하나하나마다 깊게 스며 있는 것이다. 아무도 그 축제를 거스릴 힘은 없다. 힘들수록 더 거세게 부딪치고 싶은 열망. 새로운 계절은 지나간 계절의 혹독함을 부드러운 숨결 속에 묻는다. 광기도 고통도 열망도 다 파도의 꽃이파리 속에 따뜻한 두 손을 펼쳐드는 것이다. 겨울꽃은 지고 봄꽃은 찬란히 피어라. 26-67 

 

 

 왜 하필이면 F심 연필이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인가 하는 의문이 들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영문을 알 수 없어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리하여 어느 새 F심 연필이 완전히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여행가방에 냉국수용 소면 다발을 열다섯 개나 넣어서 하와이로 날아왔다. 이런 얘긴 어떤 가이드북에도 실려 있지 않을 테지만-아마도 그럴 테지-하와이에서 먹는 냉국수는 정말 일품이다. 하와이에 장기간 체재하실 분은 반드시 냉국수용 소면을 지참하십시오. 95

 

결국 독서란 것이 유일한 신화적 미디어였던 시대가 급속하게 종식되고 만 것이다. 지금의 독서는 다양한 각종 미디어 중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155

 

 

 

 

 

태양은 페인트가 가장 얇게 칠해진 곳의 점들 사이로도 빛나고 있었어. 방의 오프 화이트 벽에 중국 식당의 야릇한 빨간 불빛을 발하면서 말이야. P.20

 

그들은 살며시 쳐들어왔어.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가득 찬 첫 번째 페인트 통이 윤기 나는 마호가니 문을 낮게 철썩 때리는 소리, 철썩거리는 파도의 자장가처럼 유리에 뿌려지는 페인트 소리, 페인트가 후두두둑 떨어지는 소리, 사납게 떨어지는 빗줄기보다 결코 크지 않은 소리를 내면서 말이야. 우리 집은 즉흥적 분노에 휩싸인 데이글로의 습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훌륭한 프랑스 소스처럼 진하고 맛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린 증오로 듬뿍 발린 거였어. 22-23

 

그리고 난, 아무리 지독한 면이 있어도 타인을 돌이킬 수 없는 문제로 여기고 후회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하지만 케빈은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지, 안 그래? 28

 

'당신'은 구원을 의지의 행위로 봤어. 당신은 고집스럽게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나 같은 사람들-을 폄하했지. 그건 살아있음의 단순함을 끌어안지 못한 채 나약한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니까. 33

 

 나중에 그 생각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날 괴롭히게 됐지만, 그때만 해도 난 엉킨 실타래를 단단한 껍질의 샘소나이트 가방에 쑤셔 넣는 사람처럼 다루기 힘든 기형의 경험을 잘 정돈된 상자에 집어 넣으려는, 당신의 강박관념을 예측하지 못했던 거야. 난 당신이 활동을 제한하는 것, 셔츠를 접을 때도 엄격한 방식을 고수하는 것, 식이요법을 지키는 걸 귀엽게 여겼어. 하지만 진지한 맥락에서 봤을 땐 말이야, 프랭클린, 난 그게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진 않았어. 질서 정연함이란 시간과 함께 기꺼이 순종으로 전락하고 마는 성질을 지녔으니까. 34

 

나이가 들면서 우리의 소모적 전환 중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암송한다는 거였어. 난 알아야 했어, 내가 매일 나 자신의 이야기에서 도망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이야기가 길을 잃은 충직한 동물처럼 날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그런 이유로 내 어린 자아에서 벗어나게 된 걸 보여주는 한 가지 측면은, 내가 자신에게 해줄 얘기가 별로 없는, 또는 아예 없는 사람들을 지독하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게 됐다는 거였어. 36

 

돌이켜보면 더 많은 '이야기'를 원한다던 내 말은, 사랑할 다른 누군가를 원하고 있다는 걸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41

 

그러니까 난 내 엄마가 되는 게 두려웠던 게 아니라, 보통 엄마가 되는 게 두려웠던 거야. 난 내가 부러워할지도 모를 여행을 하고, 미래가 여전히 닻을 올리고 있고 미래의 지도가 아직 그려지지 않은 다른 젊은 탐험가를 위해 출발점 역할이나 하는, 영원히 정지된 닻이 될까 봐 두려웠어. 배낭을 트렁크에 실을 때 잘 가라고 손을 흔들며 키스를 날리는 출입구의 전형적 인물, 추레하고 투실투실항 사람이 되는 게 두랴웠고, 출발하는 배기가스 연기 때문에 헝클어진 앞치마로 눈을 비비는 사람, 쓸쓸하게 자물쇠를 돌리고 천장이 내려앉을 것 같은 적막 속에서 싱크대에 있는 얼마 되지도 않는 접시들을 설거지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될까 두려웠던 거야. 난 떠나는 것보다 남겨지는 것에 대한 공포를 더 키웠어. 그 무서운 짓을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많이 저질렀는지. 저녁 식사 도중 떨어뜨린 바게트 껍질로 당신 발을 묶어버리고,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얼른 올라타 사라져버리는 짓을 말이야. 59-60

 

내가 두려웠던 건 폐쇄되고 돌처럼 차가운 내 본성, 나 자신의 이기심, 관대함의 부족, 내 안에 머물면서 두터워진 억울함의 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것과 마주하게 되는 거였어. 내가 아무리 '페이지 넘기기'에 관심이 있다 해도,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에 가망없이 옭아 매일 거랑 예감은 날 몹시도 당혹스럽게 만들었지. 60

 

난 아이들이 항상 그렇게 말한다는 걸 알아, 난 네가 싫어, 난 네가 싫어! 눈물을 짜면서 말이야. 하지만 케빈은 열여덟 살이 다 됐고, 그 애 말엔 흔들림이 없었어. 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