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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더 메이드 살인 클럽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북스토리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462페이지. 결코 적은 분량의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읽어내릴 수 있는 가독성, 흡인력에 츠지무라 미즈키는 역시 그런 작가들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작가들이라하면 이렇게 독자를 순식간에 이야기의 공간 속으로 빨아들여 현실과 비현실, 즉 가상과의 경계선을 흐려놓고 독자를 그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두게 만든다. 그런 힘이 있는 작가, 잘 없지만 분명 있다.
다소 자극적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더 메이드(Order made)란 주문에 의하여 제도된 상품을 말한다. 즉 주문하는 자가 주문을 '원한다'는 것. 타의가 아닌 자의라는 점에서 오더 메이드는 주문받는 자보다 주문하는 자가 우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오더 메이드 살인 클럽은 무엇인가. 제목을 풀이하면 '살인을 주문하는 클럽'이 된다. 즉, 살해해달라고 상대방에게 주문하는 것. 과히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없지는 않다. 분명 이것도 어디선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언제나 일상과 비일상은 종이 한 장 차이니까.
그렇게 화자인 '코바야시 앤'은 곤충계인 같은 반 옆 자리인 '도쿠가와 쇼리'에게 자신을 죽여주지 않겠냐고 이야기한다. 그 계기는 이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서 나왔다. 빨간 머리 앤의 열렬한 팬인 어머니가 끝내 자기 딸의 이름에까지 붙여 이름에 콤플렉스가 생긴 앤에게 쇼군 주니어라고 불리는 도쿠가와가 앤 불린이라는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빨간 머리 앤이 아닌 타나토스적인 요소를 갖춘 앤 불린. 자신의 이름의 위상이 순식간에 높아지고 달라졌다. 코바야시 앤은 도쿠가와 쇼리에게 자신을 죽여주지 않을래,라고 묻는다.
자신이 제대로 중2병을 즐기고 있다고 말하는 앤. 따돌림을 당하고 따돌림을 시키면서도 어쩔 수 없다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해 더 궁지에 몰리는 민감한 소녀. 타인을 깔보면서 도쿠가와를 곤충계로 무리짓고 자신은 다르다고 말하는 오만함. 중학교 2학년이 가질 수 있는 생각과 심리가 마치 더 나이 먹은 작가가 쓴 것 같지 않은, 그런 정교함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읽는 독자마저도 내가 마치 중학교 2학년의 소녀로 돌아간 듯한, 죽음을 동경하고 친구 문제로 고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세계에 함몰되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런 나이로 돌아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오더 메이드 살인 클럽의 회원인 코바야시 앤과 도쿠가와 쇼리는 비밀 클럽의 회원처럼 외진 곳에서 만나 기묘한 인형집이나 시체 사진을 주고 받기도 한다. 마치 다른 클럽의 활동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오더 메이드 살인 '클럽'인 셈이다. 그리고 이들은 오더 메이드 살인 사건을 만들기 위해 궁리한다. 가장 임팩트 있고 세간에 오래도록 회자되면서 모방범죄가 일어날 정도로 센세이션한 사건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들은 그 방법을 찾는다. 정확히 말하면 앤이 찾는다. 죽여달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런 각오가 되어 있지 않는 거냐며, 쥐가 아닌 고양이의 죽음에 애통해하는 앤에게 도쿠가와는 일침을 가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반쯤 장난과 같은 오더 메이드 살인. 실제로는 죽을 마음도 없으면서 '그렇고 그런 분위기'에 취해서 살인 공모를 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죽음에 가까워진 것 같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날짜를 잡고 실제 계획이 세워지고 답사까지 갔다오자 서서히 오더 메이드 살인은 현실이 되어간다. 독자는 정말 도쿠가와 쇼리가 코바야시 앤을 죽일지 노심조차하며 다음장을 얼른 넘길 수 밖에 없다. 오더 메이드 살인 사건은 현실화 될 것인가?
하지만 소설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독자가 간과하고 있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어째서 앤도, 읽는 독자도 '도쿠가와 쇼리'가 당연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가. 실제 살인자들처럼 쥐나 고양이를 죽였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우리는 '도쿠가와 쇼리'가 동물을 죽이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답은 없다. 피가 흘러 넘치고 동물의 사체 옆에 있는 도쿠가와 쇼리를 코바야시 앤이 보기는 했지만 직접 죽이는 것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웃기게도 우리는 코바야시가 생각한 것에 휘말려, 도쿠가와 쇼리라면 분명히 코바야시 앤을 죽여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왜냐하면 도쿠가와 쇼리는 코바야시 앤이 보기엔 실제 살인자들이 이전에 했던 행동과 똑같이 하니까. 하지만 그것은 코바야시 앤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간과한 독자들은 앤처럼 똑같이 생각해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도쿠가와 쇼리는 왜 코바야시 앤이 자신을 죽여줄래라고 물었을 때 그 대답에 응했는가. 여기에는 여러가지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답이 아니다.(물론 소설에서는 답을 주고 있다.) 중요한 건 살인 오더에 응할 정도로 도쿠가와 쇼리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중학교 2학년 아이가 다른 여자아이, 그것도 급우를 죽이고 살인자로 평생 살아가겠다고 말할 수 있는가.(여기서 조금의 의문은 가졌어야 했다.) 분명 거기에는 그에 마땅한 이유가 있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만 눈치챈다면 사실 이야기는 하나로 관통되지 않을까한다. 또한 이것이 독자의 허점을 찌르는 부분이기도 하고.
코바야시 앤은 옆에 있는 한 남자아이가 끌어안고 있는 사정도 그 마음도 헤아리지 못했다며 대학교 입학 전 회자한다. 그리고 청춘은 부끄러운 기억의 연속이라고 말하며 도쿠가와 쇼리와 자신이 오더 메이드 살인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도 그런 부끄러운 기억으로 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기억을 공유한 만큼 둘은 두 번 다시 이어질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어차피 부끄러운 청춘의 기억으로 치부할 거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어쨌거나 그들은 아직 청춘이고 앞으로도 부끄러운 기억의 연상선상에 있을 테니까.
츠지무라 미즈키는 역시 청춘 미스터리를 잘 쓰는 것 같다. 이 작품은 미스터리라 하기엔 그 힘이 다소 부족할지 몰라도 분명 재미있다. 마치 일단은 미스터리 작가이면서도 일반 소설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치오 슈스케처럼.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장르란 어차피 그저 편의를 위해 구분해 놓은 게 아닌다. 넘나들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어떤 책이든 명백하게 선을 그을 수는 없으니까. 여하튼 미치오 슈스케도, 츠지무라 미즈키도, 어떤 장르를 쓰던 분명 재미있는 글을 쓴다는 점에서는 변하지 않는다. 츠지무라 미즈키는 나오키 상을 받았으니 앞으로도 더 많은 작품들이 번역되어 나올 것이기에 더 기대된다.(일단 상 받았다하면 죽죽 나오니까.) 뭐, 딱히 나오키 상을 받아서 기대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상을 받기 전에, <밤과 노는 아이들>로 이 작가를 처음 만났는데, 그 때도 분명 좋았다. 작가의 다른 책들도 더 읽고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독자로써는 좋은 소식. 다음 작품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