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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소년 - 박형근 장편 소설, 제5회 대한민국 디지털작가상 대상작
박형근 지음 / 노블마인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박형근의 <20세기 소년>은 20세기의 소년에서 21세기의 어른이 된 사람들이 '21세기가 우리를 배신 했어!'라고 외치며 21세기 현대 사회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복수는 주인공인 신이 아르바이트로 올리는 뉴스 포털 사이트의 사진중의 하나를 정치인 대신 대머리 게이 사진으로 바꾸는 일로 시작된다. 신은 늘 새벽 4시가 되면 딱 3분 동안만 풍자스러운 사진으로 바꿔 지루한 일상과 끔찍한 아르바이트로부터 소소한 일탈을 맛보며 즐기는데, 어느날부터 자신의 그런 즐거움을 방해하는 것이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새벽 4시에 딱 3분 동안만 바뀌는 사진에 달리는 댓글. "팬이에요."
자신이 팬이라며 댓글을 남긴 사람인 호제는 신의 앞에 나타나고 오타쿠스러울 줄 알았던 인상은 의외로 겉은 멀쩡했다. 호제는 신 대신 뉴스 포털 사이트 아르바이트를 하며 서서히 신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호제와 같이 자신이 팬이라고 밝힌 사람들이 하나 둘 신에게 접근해오면서 신은 그들을 모아 한바탕 크게 놀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눈길을 사로잡는 시작부터, 신 이외의 등장인물들이 누구하나 과하지도 않고 매끄럽게 신과 관계를 맺으면서 21세기를 향한 복수를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가는 이야기는 강한 흡인력과 속도감, 유머스러움 그리고 신세대스러운 문체로 시종일관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한다. 뿐만 아니라 21세기에게 복수하기 위한 과정들은 그야말로 통쾌하기 짝이 없어서 읽는 내내 큰 소리로 웃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의 무엇보다 굉장한 점은 유머스러움이 풍자로 변하는 순간, 날카롭게 현대 사회에 대한 고찰이 빛난다는 것이다. 21세기가 되어 20세기 소년 때 그렸던 상상화의 유토피아같은 현실은 실현되었지만, 소년 시절 그렸던 행복은 없고 21세기를 위해 사람들이 쌓아놓고 만들어 놓은 틀에 길들여지고, 디지털과 기계에 길들여져 폐기물 같은 세대로 전락한 자신들 밖에 발견 할 수가 없다. 그러한 자신들의 모습에 21세기에 배신감을 느낀 20세기 소년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20세기의 모든 것들에 순응하며 살아갔던 자신들과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21세기에게 분을 터뜨리는 것이다. 21세기의 대표 전유물인 스마트 폰을 시작으로 사람들 주위를 당연한 듯이 감싸고 있는 기계더미들 사이에서 작가는 20세기 소년들을 통해 우리가 정말 행복한지를 묻고 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책에서 작가는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행복할까라는 의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우리가 그들의 땅으로 들어가 기계로 헤집어 놓는 것보다 자연 그 상태로 사는 게 더 행복하지 않을까라고 말해본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문명의 혜택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는 문명의 혜택으로 기계의 지배하에 놓여 발전적인 사고는 커녕 기존의 지식과 틀을 담습하는 인간상을 고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할 힘이 없는 21세기 사람들에게 주체적으로 살자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니체는 타인의 낡은 의견인 화석을 사는 대신 자신의 의견인 살아있는 물고기를 손에 넣으라고 말한다. 이는 주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라는 말이다. 이는 본 책에서 20세기 소년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같다. 비본래적 자아로써의 삶을 살 것이 아니라 본래적 자아로써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시류에 휩쓸려 대중문화와 미디어가 만들어낸 아이콘에 열광하는 21세기의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점들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20세기 소년들은 이러한 결함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려고 한 것이다. 본 책에선 21세기의 대표주자라 할만큼 전형적인 사람이 "깨어있자!"라는 문구를 20세기 소년인 신에게 보여주었다. 신은 지루해하며 대충 넘겨버린다. 그건 깨어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깨어 있지도 않은 21세기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겠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게 아닐까. 정작 깨어있어야 할 사람은 깨어있자고 말한 상대방인데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깨어있다'라는 단어도 의식이 있고 나는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는 젠체하기 위한 21세기 대표 문구 중의 하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깨어있다'라는 말 자체를 나는 그다지 쓰고 싶지 않다.
책 속의 20세기 소년들과 같이 20세기와 21세기를 걸쳐 살아가는 나는 무척이나 공감이 되는 소설이었다. '실시간'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던 날부터 익숙해지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을까. 자연스럽게 파고드는 디지털적 사고에도 나는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건 정말 태어날때부터 컴퓨터와 같이 생활하는 지금의 아이들이 누릴 수 없는 엄청난 행운이다. 하지만 이미 취직을 위해 고등학교 때부터 자신의 흥미와 재능과는 상관없이 공부를 해나가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 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상태로 졸업을 하고 말았다. 그런 어중간한 상태였던 것은 나 역시 20세기 소년들처럼 만들어진 틀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썩히고 경쟁과 취직을 위해 끊임없이 인생을 낭비하는 길을 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증표가 아닐까. 재능을 살리는 것도 그렇다고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었던 나는 그들이 잘못 된 줄 알면서도 한편으론 부러워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지인이 한 말처럼 취업을 위해 공부하는 것과 같이 시류에 휩쓸리면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편안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행복할까? 20세기 소년들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이제 시작되었다. 진정한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