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무선) 보름달문고 44
김려령 지음, 장경혜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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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로 나를 무지막지하게 울렸던 김려령 작가의 신작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가 출간되었다. 노오란 바탕색에 우글거리는(?) 사람들이 그려진 표지는 보자마자 "와~ 이쁘다"며 탄성을 지르고야 말았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에 100% 공감하는 나는 책도 표지가 이뻐야 눈길이 가고 눈길이 가야 손길도 간다는 지론으로 살아가는 나인지라 일단 표지에 보너스 점수를 주고 속을 들여다 보니 속에 글려진 그림도 상당히 이쁘다. 국문학을 전공했다는 장경혜님은 왜 글을 쓰지 않고 그림을 그렸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그림을 보면서 이해가 되는 듯도 했다.

<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는 입양아 가정의 짠하면서도 감동적인 가족사글 그린 이야기였는데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도 가족사를 담고 있다. 같은 가족사이지만 '해마'가 눈물샘을 무지하게 자극했다면 '그 사람'은 유쾌, 상쾌, 발랄하다는 점일 것이다. 아픔을 사랑으로 승화시켰다고나 할까?
어쨌든 재밌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오명랑 작가가 되어 이야기 교실을 열고 있기라도 한 듯이 입속에서 웅얼거리는 나를 발견하곤 또 혼자서 큭큭큭~

출판사 문밖동네에서 <내 가슴에 낙타가 산다>로 -웃겨서 넘어가는 줄 알았다, 종원이 표현을 빌리자면 낙타는 사막에 살아야지 그런 이상한 곳에 사니 책이 품절 되었다나. 하하하-
오명랑 동화작가가 이야기 듣기 교실을 열면서 선택한 첫번째 이야기는 '그리운 건널목씨' 다.
건널목을 둘러싸고 일어난 가슴 따뜻한 이야기,
감동을 넘어 아이들을 가슴 뛰는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시킨 이야기다. 

동화 작가가 꿈이지만 기자가 더 어울릴 것 같은 나경이,
영어 학원 가기 싫어 울며겨자 먹기로 참석한 종원이,
오빠를 따라 온 소원이,
이 세 아이에게 들려준 '그리운 건널목씨'는 
어느 날 갑자기 짜짜잔 하고 나타나 메말라 죽어가는 도희와 태석이와 태희의 마음을 되살려 놓고
홀연히 사려져 버려 아이들에게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은인이다.
그리고 아리랑 아파트 주민들에게도.
건널목이 멀어 무단횡단을 하게 되는 아리랑 아파트 후문에 깜짝 건널목이 등장했다.
아이들이 등교하는 시간마다 생겨나는 건널목은 카펫에 그려진 이동식이다.
그 건널목에서 신호를 보내는 신호등이 바로 이름이 되어버린 건널목씨다.
모자에 빨간색, 초록색으로 신호등을 그려 쓰고는 차와 사람이 원만하게 통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널목씨는 아빠와 엄마의 싸움으로 상처입고 떠도는 도희에게 안식처가 되어주고, 돈 벌어 오겠다는 집을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꿋꿋이 어린 동생을 돌보는 태석에게는 버팀목이 되고, 태희에겐 사랑이 되어 준 아저씨다. 사랑 받고 보호 받으며 성장해야 할 시기에 의지 할 곳 없는 아이들, 자칫 원망과 분노로 성장할 수 있는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가는 한 줄기뿐이었을지라도 빛이 되어준 건널목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의 아이들이 너무나도 밝고 씩씩하게 성장했다는 것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 힘든 시기를 상쇄시킬 수 있는 힘을 건널목씨에게서 얻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가슴의 응어리는 남아서 오명랑 작가는 글로 쓰고 싶어했고 결국은 아이들에게 이야기로 들려주며 마지막 응어리를 날려버리지만. 자신도 깊은 상처를 안고 있음에도 그 상처를 슬픔이라는 이름으로 헤매이지 않고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의 힘을 가진 건널목씨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이 건너는 건널목이 아니라 마음이 건너는 건널목이었으니까.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는 분명 초등학생용 동화인데 어른을 위한 동화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누군가의 건널목씨가 되어주자는, 이기적으로 내 생각만 하지 말고, 내 아이만 품으로 안아들이지 말고, 상처받고 고통스러워 하는 남의 아이도 따뜻한 마음으로 안이들이자는 뭐 그런 말들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상처와 아픔이 묻어 있는 이야기였지만 감동과 사랑이 더 커서 읽는이도 유쾌만드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를 한마리도 정리한다면 <아주 재밌다>.
누군가의 건널목이 되어줄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겠지. 내가 <그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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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가족 레시피 - 제1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
손현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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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속된 말로 말빨이 아니 글빨이 장난이 아니다. 제목만큼이나 범상치 않은 여울이네 가족 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불량가족 레시피>는 글에서 상당한 힘이 느껴진다. 그냥 툭툭 내뱉는 것처럼 던져지는 직설적인 말들이 오히려 시원스럽게 다가오며, 경쾌함을 넘어 시종일관 웃음을 자아내며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 같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구질해 보이는 가족사에서 슬픔보다는 희망의 작은 빛이라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글의 힘 때문이 아닐까 싶다.

권여울, 출가를 위한 지침서까지 만들어 놓고 출가를 준비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출가가 꿈인 소녀이다. 그러나 여울이가 꿈꾸는 출가는 구도자의 삶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가출을 하겠다는 것이다. 어차피 집을 나가는 것은 같으니 이왕이면 조금 더 멋있는 보이는 용어를 선택했을 뿐이다. 지긋지긋한 집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지만 참고 있는 것은 단 하나, 출가도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울이 가족은 여울이를 포함해 모두 6명이다.

양로원에서 남은 여생을 살다가는 것이 소원인 할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욕을 하는 욕쟁이 대마왕이다. 여울이만 보면 소리를 지르며 못살게 구는 고3 수험생 언니와 집안이 조금만 부유했더라면, 아버지가 조금만 더 관심 있게 돌봤더라면 평생 기저귀를 차고 살아야 되는 지경까지 병을 키우지 않았을 대학생 오빠, 여울이를 포함한 세 남매는 모두 엄마가 다르다. 그나마 오빠와 언니는 혼인신고라도 했지만 여울이는 그마저도 없이 태어났기에 같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눈치 보며 살아가는 신세다. 한때는 주식으로 잘 나갔으나 빚더미에 앉으면서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뇌경색으로 고생하고 있는 삼촌, 가족들의 인건비를 착취하며 일만 시키면서 소리만 질러대면서 나름 잘해보려고 애쓰지만 점점 무능해지만 하는 가장 바람둥이 아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아웅다웅하며 살아가는 여울이네 가족이다. 출가를 원했던 것은 여울이였는데 아빠와 싸운 오빠가 집을 나가고, 아빠와 싸운 삼촌이 집을 나가고, 또 아빠와 싸운 언니가 집을 나가면서 아니러니하게도 가장 집을 나가고 싶어 했던 할머니와 여울이가 집을 지키며, 가족을 기다리는 형국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나간 삼촌도, 언니도, 오빠도 잘 살고 있다며 걱정 말란다. 결국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마저도 구속되어 있는 생활이 더 편안해 보인다. 한데 어우러져 살던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언제 다시 함께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새삼 가족애를 느끼며 출가를 포기하는 여울이의 파란만장한 소녀시절을 담고 있는 <불량가족 레시피>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정말 재밌다.

<불량가족 레시피>는 여울이의 눈을 통해 참으로 많은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무늬만 가족인 듯 보이지만 그 속에 따뜻한 아음이 흐르고 있는 문제적 가족을 통해 이 시대의 진정한 가족의 의미는 무엇인지, 흔들리는 가장의 모습을 통한 계층간의 불균형,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 노인 문제를 통해 드러나는 제도적 불균형, 청소년들의 정체성 등 현실에서 흔히 부딪치는 일들을 가족이라는 우리에 한꺼번에 집어넣고는 흔들었다 놓는 것 같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독자들을 향해 당신의 가족이 이러하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고 물어보는 것만 같다. 정말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 불량스러운 가족 레시피를 가지고 어떤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니면 재료 자체를 버려 버릴까? 여울이의 삼촌이나 오빠 언니가 가출을 택했던 것처럼. 그리고 궁금하다. 내게는 재밌게만 느껴지녀 <불량가족 레시피>가 현재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에겐 어떻게 비쳐질지, 얼마만큼이나 공감이 되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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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여자 만들기 - 미인 강박의 문화사, 한국에서 미인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영아 지음 / 푸른역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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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의 주인공이 있었다.
주인공을 향해 댓가를 치러게 해야 한다고 전국이 분노하는가 싶듯니 새로운 여론이 형성되었다. 
목숨은 살려줘야 한다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건의 핵심 주인공이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아주 예쁜 여자. 
그녀의 얼굴을 본 많은 남성들이 구애의 편지까지 보낸다는 말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말의 위력을 눈으로 보면서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그 사건보다 더 씁쓸함을 남긴 사건이었다고나 할까?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 왜 이런 말이 생겼을까?
예쁜 여자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왜 모두 예뻐지고 싶어 안달하며, 예쁜 여자가 되기 위해 모든 투자를 아끼지 않는 적극성을 띄게 되었을까?
나는 이러한 것들이 요즘 현 시대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란다.
물론 아주 옛날부터 있었겠지만 근대라는 시대에서 두드러진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단다. 
그것도 1920년대 일제강점기를 넘어가는 과정에서.  


<예쁜 여자 만들기>
 제목으로 인해 자기계발서나 다이어트 책이라 생각을 했었는데 뜻밖에도 문화사였다.
'예쁜 여자'의 발자취라고나 할까? 
왜 예쁜 여자에 열광하는지,
누가,
무엇때문에,
어떻게,
그렇게 만들었는지 등등에 관한 고찰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s라인이 1920년대에도 강조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그 시대에 쌍꺼풀 수술을 한 여성이 등장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다리 미이용술'(조선일보, 1929. 4. 25),
'거꾸로 자전거 타기 운동, 체격을 좋게하는 미용체조'(조선일보, 1937, 11.2) 라는 기사에 거꾸로 자전가 타는 모습의 삽화와 함께 신문에 실렸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다. 
정말 s라인은 요즘이 대세가 아니라 그 시대, 그 시절부터 있어왔던 것이었다. 
정말 예뻐지고자 하는 마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그래도 참 놀랍다.  
하긴 요즘은 남자들도 화장을 하고, 성형을 하고, 나 성형했소 하고 당당히 밝히는 시대이니
뭐 더 할말이 필요하겠는가.
물론 나도 이뻐지고 싶다. 이왕이면 예쁜 여자이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예쁘면 더 좋지 않겠는가? 
나의 정신 건강에도 이로울 듯 하다. 내가 지금보다 더 예쁜 얼굴과 몸매를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겐 용기가 없다.
성형 수술을 할 용기도 없고, 그것에 엄청난 비용을 지불할 돈도 없지만 용기도 없다.
있었다면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많이 달라졌을까? ㅋㅋㅋ

저자는 이러한 현상들이 여자들이 원해서 이기도 하겠지만 시대가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선 우리 나라를 미개국이라고 알리고자 하는 일본의 각본에 의해서, 
또 출산 장려를 위해, 때로는 출산 억제를 위해,
건강해야 한다고 했다가, 사치로 치부하기도 하면서,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들 입맛대로 필요할 때만 휘두르는 권력에 의해서. 
긴 치마가 점점 짧아지며 말세가 왔다는 듯이 입으로는 한탄하며, 눈은 그 여성들의 다리를 쫓는 남자들에 의해서 여성들이 예쁘지고자 하는 마음은 점점 노출을 더해가며 시각화 되었다.
나라와 남자들의 잣대에 의해 권해지던 예쁜 여자는 이제는 여성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타인에 의해서건 자의에 의해서건 스스로 '예쁜 여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현대를 살면서 더 필요한 것이 '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쁘면 모든 것을 용서 받을 수 있다는 말처럼 예쁘면 입사도 쉽고, 남편감 고르기도 쉬울 뿐 아니라 '미' 자체가 경쟁력이 되고, 상품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저자는 '장미란' 역도 선수를 예를 들며 늘씬하고 예쁜 몸매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게으르거나 무능력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가 이루어 내는 성취감과 숭고함에 아름다움을 보는 것처럼 현재의 고착화된 미적 기준들을 넘어서서 다양한 여성의 몸을 아름다움과 숭고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아름다움의 형태를 좀 더 다원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서 ‘n개의 아름다움’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외부의 적에 의해 고통 받는 여성을 위로하며,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고 말한다.

처음으로 쌍꺼풀 수술은 한 '오엽주'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고 하는 그녀가 쌍꺼풀 수술을 하고 정말 행복했는지 아닌지는 난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 자신의 선택이었다면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아름다움을 원해서, 예뻐지기를 원해서 자신이 선택했다면(외부의 적때문이라 할지라도 그것도 선택이다)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뻐지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에 인간의 본성과 권력이 더해진다는 사실이 새롭기도 하다.
단순하게만 생각했었는데 사회 구조가 권력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낸다는 사실에 우리 곁은 흘러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지나친 비약같지만 누군가의 조정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은 좀 씁쓸하기도 하기도 하지만 '예쁜 여자 만들기'에 이런 찬란한 역사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수확이 아닐까 싶다. 결국 새로운 지식을 채운 기쁨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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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웨이 - 윤광준의 명품인생
윤광준 지음 / 그책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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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인생을 사는 일보다 비참한 선택은 없다고 말하는 <마이웨이>의 저자 윤광준에게
명품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앞에 쓴 책 <생활명품산책>을 읽어보라는 대답을 할까?
ㅋㅋㅋ
더 이상 자신을 명품인생이라 부르지 말아달라고 외치는 저자의 인생은 명품이 맞는 듯 하다.
우리는 안다.
명품 옷을 입고, 악세서리를 달고, 명품 가방이나 지갑을 들고 있는 것이 명품인생이 아님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면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진짜 명품인생임을.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니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고
음악을 좋아하니 조금 더 좋은 선율의 울림을 듣기 위해 발품 팔고, 손품 팔아가며 스피커를 사들여
하루 종일 음악에 취해 살 수 있는 인생, 이것이 누구나가 부러워 할 만한 명품 인생이 아니겠는가?
거기다 두 사람이나 되는 인생의 멘토까지 있다니 말이다.

몰입이란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아 선명한 사랑이다.(p.86)

무엇에 몰입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이 또한 행복이리라.
저자는 참 행복하게 사는 것 같다. 
물론 저자는 말 할 것이다.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다른 것 두서너개를 포기했다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향해 집중하고 누가 뭐라하던 꿋꿋이 걸어갈 수 있는 용기,
그것은 아무에게나 발휘되는 것은 아닐테니까.

자신이 찍은 몇장의 사진들과 명품스러운 글귀들이 마음을 울리는 <마이 웨이>를 읽으며
나도 외친다.
마이웨이, 내 길을 가련다.
내가 가야할 길이 뭐지? 나를 향해 묻는다. 
그리고 나가 대답한다.
진작에 재밌게 살걸하고 후회하지 말고 지금 현재, 이 순간을 재밌게 살자고.
이것이 나만의 마이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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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중독자의 고백
톰 라비 지음, 김영선 옮김, 현태준 그림 / 돌베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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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넘기면서 무지하게 재밌었다.
아~ 맞어맞어, 어쩜 내 마음을 이리도 잘 알까 하면서 혼자서 낄낄낄 거리면서 웃었다.
초기에는 책을 사는 것에 무한한 희열을 느끼지만 점점 갈수록 우발적으로 책을 사들이는 지경에 이르고
분명히 책을 읽겠다고 사지만-물론 읽는다- 손도 대지 않고 쌓여가는 책들이 점점 늘어는다. 책을 사는 이유도 다양하다, 표지가 이뻐서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흐름을 알고 싶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싶어서 등등등 책을 사야 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나열하며 자신을 설득시키며, 책을 그만 사겠다고 작심하고 결심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보지만 그것도 잠시 또 굴복하며 희열에 빠지게 된다는 글을 읽으면서 이건 완전 내 이야기라며 무릎을 쳤다. 나만 그런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많은 위안을 얻기도 하면서. 

그리고 책 속에 간간히 나오는 삽화도 사람 넘어가게 만든다. '멋진 책 수집광이 되는 방법'이나 '전국민 책읽기 총력안보 책읽기 백만인 운동 시작', '빌려준 책 돌려받기 특수비법 극비공개'는 정말 배꼽잡고 넘어가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나는 중독자인지 아닌지 해 보는 테스트도 재밌다. 테스트 결과 중독자라 나오지만 아니라고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가며 부정하는 나를 발견하며 나뿐이 아니라는 생각에 또 다시 위안을 받으며 좋아라 했다.

자신이 책 중독자라고 말하는 저자는 책의 역사나 책 도취증 환자들에 대한 특성, 대처법 등 여러 가지 재밌는 이야기들로 책 중독에 관해 말하고 있지만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종이책이 전자책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전자책에 밀려 종이책이 영향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불안감을 안고 잉크 냄새를 맞고, 한장 한장 넘어가는 책장에서 맛볼 수 있는 감촉의 기쁨이라든지 전자책은 결코 따라올 수 없는, 흉내도 낼 수 없는-물론 전자책만의 장점도 있다. 두겁고 무거운 시리즈물을 아주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다든지 하는- 종이책에 대한 예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책 중독에 대한 백마디가 아니라 종이책이 주는 기쁨의 한마디가 아니였을까 싶다. 이러한 저자의 종이책에 대한 예찬론에 100% 공감을 하며, '단돈 몇푼에 때문에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유형인 나는 이 밤도 지난달에 빌려주고 아직 돌려받지 못한 책을 어찌 돌려 받아야 할지 노심초사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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