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 아세요? - 당신에게 어울리는 재즈를 찾아주는 윤희정의 친절한 재즈 이야기
윤희정 지음 / 나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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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의 쓰라림, 사랑의 눈물을 겪지 않은 사람이 인생의 참맛을 알 수 있을까 싶습니다.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수없이 상처 입어 눈물 흘렸는데,
상처를 감당할 수 없어 이별을 감행한 이후에도 고통은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무정했던 사랑이 찾아와 다시 시작해보자고 합니다.
이럴 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요?
그럴 때 꼭 들어봐야 할 노래가 있습니다.

윤희정.


내게 있어 재즈는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서 아주 간들어지는 목소리로
끈적끈적 유혹하듯 노래하는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영화에서 본 재즈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러했다.

허느적거리는 듯한 끈적임이 그닥 맘에 들지 않았고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재즈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날려버리며 나도 배우고 싶다,
나도 한 번 불러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박경림때문이었다.

어느 프로에선가 특유의 쇳소리로 재즈를 부르는 박경림의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으며
그녀에게 노래를 가르친 이가 옆에서 노래하는 윤희정이라 했다.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윤희정'이라는 재즈 가수이자 많은 이들의 재즈 선생님이라는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재즈에 대한 편견을 깨고
아~ 참 감미롭고 좋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지금도 재즈를 잘 모르지만
그렇게 재즈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꿔버린 그녀가 재즈에 관한 책을 냈다. 

재즈는 열정이다, 그리움이다, 휴식이다, 추억이다, 희망이다 라는
테마를 가지고 
자신이 재즈를 가르쳤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재즈를 말하고 있다. 
어떤 뜻을 담고 있는 곡인지,
언제 들으면 좋은지,
어느 때 부르면 좋은지, 
부르는 사람에 따라 같은 곡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자신의 인생이 담긴 재즈 이야기를
눈 앞에 관객을 앉혀놓고 같이 호흡하는 듯이, 대화 나누듯이
그렇게 재즈 한곡 한곡을 세세히 짚어주는 책이다. 

재즈의 '재'자를 몰르는 사람들까지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하고 있는데 
더 좋은 것은 노래를 들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글 속에 함께 자리 잡고 있는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띄우면 
저자가 직접 부른 또는 게스트들이 부른 재즈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인데
아쉽게도 스마트폰이 없는 내겐 그림의 떡이다. 


사실 책이 너무 두꺼워서 첨엔 살짝 놀라기도 했지만 
지식을 채우겠다는 생각으로 아님 그냥 독서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쭉쭉 읽어나가는 것보다는 
설명하고 있는 재즈를 같이 들으면서 책을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재즈가 외국 음악이라 영어로 불리우지만 본인은 한국 사람이고,
듣는 사람도 한국인이라
원어로 부를까 우리말로 부를까 노래를
부를 때마다 고민이라고 한다.
영어가 딸리는 난 우리말로 불르주는게 더 좋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원어로 부르는 것이 좀 더 재즈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뭐 어쨌든 둘다 나름의 좋은점이 있을테니
둘 다 좋다. 
좋은 노래는 머리로 듣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거니까.
왠지 와인과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은 재즈는
비 오는 날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도 읽은 김에 재즈 배우러 한 번 가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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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 - 175년 동안 바다를 품고 살았던 갈라파고스 거북 이야기 보름달문고 45
한윤섭 지음, 서영아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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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왜 우니?"
"해리엇이 죽잖아요."                                                                                                            "새로 태어나기 위한 거야. 올드가 늘 말했잖아."
"하지만 지금 친구들과 헤어지는 거잖아요. 그럼 이제 오래된 이야기는 누가 들려줘요?" 
                                                                                                        p104 본문중에서

나이를 떠나서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평생지기를 만난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그것도 멘토가 되어주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그런 친구라면 로또대박을 맞는 것 보다 더 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모르긴 해도 로또대박을 맞을 확률보다 이런 친구를 사귈 수 있는 확률이 더 적지 않을까. 친구라는 말은 쉽게 하지만 참 친구를 사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니까.

아기때 사람들에게 잡혀 동물원으로 오게 된 원숭이 찰리는 그런 행운아다.
같은 종의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손에서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는데 전혀 종이 다른 거북이 해리엇이 찰리의 친구가 되어 주고 엄마 같은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찰리는 해리엇을 통해 사랑을 배우고, 두려움을 맞설 수 있는 용기를 배우고, 자신을 괴롭히며 아픔을 안겨준 이가 당하는 고통을 고소해 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 줄 아는 넉넉함을 배웠다.
엄청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해리엇은 찰리에게 좋은 친구였으며, 부모였으며, 선생님이었다. 그런 해리엇으로 인해 무서운 세상에 홀로 맞서 나가야 하는 여리고 여린 원숭이 찰리는 자신의 정체성와 존재감을 지키며 성장할 수 있었다.

해리엇,
사람들의 손에 잡혀서 동물원까지 와서 175년을 산 거북.
해리엇의 고향 다른 거북들에게 사람이라는 동물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알려할 사명을 안고 고향의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다. 제일 어렸던 해리엇이 그 사명을 감당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해리엇이 사람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자신들의 희생으로 지킨 생명이 해리엇이었다. 그 아픔을 안고 175년을 살아오며 다른 여러 동물들의 멘토가 되어 주었던 해리엇을 보내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동물원 가족들. 해리엇이 없으면 옛날 이야기는 누가 해주냐며 울먹이는 아이의 말이 철없음이 아니라 해리엇에 대한 사랑임을 안다. 사랑스러운 친구 찰리로 인해 다시 한 번 바다를 보기를 원했던 175년동안의 소원을 이루는 순간. 그 순간을 만들어 주고 싶은 찰리가 울타리를 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해리엇에 대한 사랑의 힘이지 않았을까?

해리엇과 찰리의 우정, 그리고 다른 동물들의 사랑이 담긴 <해리엇>을 읽는 동안 마음이 따뜻해졌다. 내게도 해리엇과 같은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해리엇이 되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고 싶다.
누군가의 해리엇이 될만큼 따뜻한 가슴을 가진 넉넉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고 싶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군가 단 한 사람의 해리엇이 되어준다면 세상은 더 따뜻하고 살만하지 않을까 싶다.

거북이 수명이 어떻게 되지?
정말 175년이나 사는거야?                                                                                                       거북이 수명이 길다는 건 알지만 정말 몇 년이나 사는 거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던 <해리엇>은 진지하게 와닿았다. 친구라는 존재, 멘토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 준 동화였다. 공부나 능력을 키우는데 집중되어 아이다운 모습을 잃어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이 해리엇과 찰리와 같은 우정을 쌓아가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환경, 그런 세상을 만들어주는 것이 바람직한 부모의 역할, 진정한 어른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가슴 따뜻해지는 <해리엇>,
누군가의 해리엇이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해리엇>,
아이와 부모가 함께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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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력 - 경계로부터의 자유
김익철 지음, 강성남 그림 / 세림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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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인들은 크게 나눠서 보면 큰그림자의 존재조차 모른 채 너다움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큰그림자와 거리를 두고 끊임없이 코치를 받으며 자기다움의 자주적 삶을 준비하며 걸어가는 삶, 그리고 큰그림자와 하나가 된 나다움의 자주적 삶을 사는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금 나의 큰그림자는 어디에 서 있는지 가끔은 물어볼 필요가 있다. p157    
   

<야생력>은 자기계발서이다. 그러나 다른 책들과 다른점은 우화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야생력이라는 주제와 경계로부터의 자유라는 부제를 가지고 돼지들의 이야기를 통해 책을 읽는가운데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리고 3부 깨달음의 숲에서 우화를 통해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을 정리하므로 독자로 하여금 다시 한번 생각하고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준다.

바우와 큰발은 산을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한다. 그 산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밤마다 실려오는 산냄새에 바우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어느날 큰그림자가 찾아오고 바우는 본래 집돼지가 아닌 산돼지였으며 아직 야생의 본능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야생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먼저 몸과 마음의근육을 단련하며 훈련할 것을 권한다. 바우는 그 훈련에 큰발도 동참할 것을 권하지만 큰발은 이내 포기해 버린다. 바깥 세계를 동경하는 마음은 같지만 왜 나가야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이다. 뚜렷한 목표가 있고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 바우는 그 목표를 향해 어려움을 감당해 낼 힘이 생겼지만 막연한 동경만이 가득한 큰발은 스스로 단련하지 못하고 우리를 뛰어넘어가는 바우를 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 나가고 싶긴 하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바깥 세상이 어떻게 펼쳐질까 하는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큰발을 보면서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자기계발서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좀 더 나은 나와 나의 세계를 꿈꾼다는 것이다. 변화한다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모습은 책을 통해 지식을 채울 뿐 변화하기 위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동경만 부풀릴 뿐이었다. 내가 꿈꾸는 세계를 나아가기 위한 준비운동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해 보지 않았기에 힘든 것이 당연함에도 큰발처럼 금방 포기하고 현실에 다시 안주하며 자괴감에 힘겨워 했다. 큰발처럼 동경의 눈길을 보내기는 하지만 막상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주저앉아버리는.... 이런 큰발을 향해 큰그림자는 말한다. 삶의 자유, 독립을 얻는 자란 어떤 울타리 안에 있던 신념과 원하는 바를 실행할 수 있는 힘을 갖춰서 그 울타리가 장애가 되지 않는 무경계의 삶을 사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어쩜 이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무조건 벗어나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을 내가 만족스러운 곳으로 바꿀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그냥 주어진 환경이나 삶에 안주해서 적당히 타협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공간의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정세성과 삶의 목표가 확실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일테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울타리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의 취약, 자신의 역량의 한계가 자유로 가는 길에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저자의 말이 크게 와 닿는다.

   
  역랑은 없고 신념의 힘만 크다면 평생 자기갈등에 빠진 몽상가로 살다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신념은 없고 역량만 갖췄다면 세상의 놀잇감 내지 기회를 잡지 못하는 어리석은 재주꾼의 삶을 살다가 갈 것이다. 하물며 신념도 역량도 없다면 그 삶의 양식이 아무리 화려하다 한들 생명의 가치를 상실한 한낱 고기 덩어리에 불과할 것이다. 네가 부디 저 너른 숲의 주인에게 요구되는 굳센 신념과 우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차별적이며 사실적인 역량을 갖추길 바란다. p35   
   

내가 속한 상황 속에서 갈등을 하고 있는 나였기에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절대 회사를 떠나지 마라'는 이 문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하는 그런 막연한 기대를 했던것 같다. 물론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백프로 내가 원하는 만족한 대답을 얻지는 못했다. 삶에 지침이라는 것이 원론적인 것이지 한 인생을 그대로 그려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아직도 바우가 되지 못하고 큰발의 상태에 머물러 있긴 하지만 내 울타리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는 되어 준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삶이 나다움인지, 너다움인지, 나다움을 위한 준비기간인지 파악이 됐기때문이다. 한 낱 고기 덩어리에 불과한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주어지는 먹이와 안전한 울타리에 만족하겠다는 큰발이나 먹이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환경과 상황과 싸워야 하는 삶을 선택한 바우도 어느 것이 옳다 그러다 판단하며 비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자신들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에 만족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누구도 남의 인생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스로가 변화하길 원한다면 점 더 나은 나를 위해 자아실현을 꿈꾼다면 두려움조차 이겨낼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 야생력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인지하고, 자신의 역량의 한계를 알고, 장애물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 진정으로 경계, 울타리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변화는 변화려고 꿈꾸는 자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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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플렉스에서 만나는 하나님
인은수 지음 / 두란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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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하지 못하고 대중이적이고 가벼운 영화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서 출발하는 <멀티플렉스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그렇다고 답한다. 은연중에 크리스천은 재미는 천박하거나 경건하지 못하다는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대중적인 재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장르를 불문하고 말이다.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영화는 분명 감독이 의도하는 바가 있지만 보는 이의 생각이나 관점에 따라 그 해석이 충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하나님을 떠올린 것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생명 연장을 위한 신기술을 만들거나 하는 뭐 그런 종류의 장면을 보면서 저런 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일까 사단의 사악한 속임일까 하는 정도였는데 저자는 장르를 가르지 않고 영화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라고 대답한다. 좋아하는 영화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8월의 크리스마스>를 꽤나 좋아한다. 특히 우산을 쓰고 말없이 걸어가는 그 장면을 좋아하고, 정원이와 다림이의 풋풋하면서도 아련한 그들의 사랑이야기가 좋고, 배경 음악이 좋고...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그렇게 다가오는 잔잔한 감동이 좋다. 그런 이유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몇 번이나 봤지만 한 번도 정원이의 '초원 사진관'이 시편 23편에 나오는 "초장"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이 생명의 연장을 보여 준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서도 예수님을 연상해 본적이 없다. 인상 깊게 봤던 영화 <그린 마일>의 존 코피가 죽어가는 것을 보며 슬퍼했지만 그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떠올리지는 않았었다. 그냥 내게는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 같은 사랑이야기였고, 스트레스 확 날려버릴 수 있는 통쾌한 액션 판타지였고, 저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감동적인 영화일 뿐이었는데 멀티플렉스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저자가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학적이 아니라 할지라도 상당 부분에 설득력이 느껴진다.

아마도 이것이 저자와 나의 관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시네마테라피에 관심이 많은 나는 영화를 보면서 저 영화를, 저 장면을 상담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처럼 저자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관점의 차이, 무엇을 바라보는가 하는 것의 차이일 것이다.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영화를 설명하고, 그 속에서 담고 있는 내용들을 통해서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신앙으로 연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대중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면 대응해야 할지 말하고 있다. 무조건적으로 경건하지 못하다고 선을 그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직도 영화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진 이도 있는데 더 죄악시 하는 게임을 통해서도 성경을 읽고 쓰고, 기도 도우미 아바타로 기도생활과 교회생활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선교지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화적 충격과 갈등을 미리 접해 볼 수도 있지 않겠냐는 저자의 생각은 참으로 놀랍다. 나 또한 영화를 무지하게 좋아하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에 기독교인이 문화를 즐긴다는 것에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편인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멀티플렉스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크리스천이 영화라는 대중문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마음으로 즐기며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 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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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반양장) - 아동용 사계절 아동문고 40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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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마당을 나온 암탉>은 동화다.
알을 낳고 싶어 하는 암탉이 우여곡절 끝에 청둥오리의 알을 품게 되면서 오리의 엄마가 되어가는 ‘잎싹’의 삶을 그리고 있다. 양계장의 철망에 갇혀서 주는 모이를 먹고 알을 낳으면 그 알을 한 번 품어보지도 못한 채 빼앗겨 버리는 자신의 삶이 너무나도 싫은 암탉은 이가 잘 맞지 않은 문틈 사이로 보이는 마당의 세계를 동경하며, 그런 삶을 갈망한다. 아카시아 잎을 보며 자신의 이름을 ‘잎싹’이라 이름 지으며 기뻐한다. 햇볕을 받아들이고 떨어지면 거름이 되어 꽃을 피우는 잎사귀를 보며 지은 ‘잎싹’이라는 이름에서 암탉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 짐작이 되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잎싹은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며 지은 이름처럼 그렇게 낳지는 않았지만 품어서 부화시킨 청둥오리 ‘초록머리’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고, 어미의 마음을 품고 자신의 목숨을 족제비 가족을 위해 내어주므로 삶을 마감하는 이야기로 그려지고 있다.


밤낮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로 알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알에서 부화된 자식이 저수지까지 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아비 천둥오리,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부모의 연을 맺어 사랑하며, 지켜주다 또 다른 아이들을 위해 족제비에게 기꺼이 제물이 되어 주는 어미 잎싹, 살아 있는 생물을 목숨을 위협해서 닭이나 오리에게 철천지 원수가 될 수밖에 없지만 배고플 때만 사냥을 한다는, 자식들이 먹이를 위해 사냥을 하는 미워할 수만은 없는 족제비를 통해 자식을 향한 부모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준다. 또한 그렇게 애지중지 내 품속에 안고 키우는 것만이 최선이며 사랑이 아니라 품에서 떠나보내는 것 역시 더 큰 사랑임을 말하고 있다. 요즘은 결혼을 해서도 홀로 서지 못하는 자식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데 잎싹은 다 자란 초록머리가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닌 천둥오리로써 자신의 삶을 당당히 개척하며 살아 갈 수 있도록 보내 주는 것이 초록머리를 위한 사랑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잎싹의 삶을 통해 <마당을 나온 암탉>은 사랑과 헌신, 희생 그리고 이웃을 위한 배려 등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 각양각색 사람들이 가진 여러 면들을 보여 주고 생각하게 만들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꿈‘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사랑이나 희생 등 여러 가지 장치를 만들어 놓고 있지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꿈‘에 관해서가 아닐까 싶다. 잎싹이 꿈꾸는 세상, 잎싹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알을 품고, 그 알이 깨어나면 마당의 암탉처럼 자신도 나들이 하고 싶은, 엄마가 되고 싶은 것이다. 잎싹이 양계장을 벗어나고, 안주하고 싶었던 마당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닭들처럼 주인이 주는 모이를 배불리 먹으면서 알을 낳고 살아가는 그 삶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고, 마당 헛간의 한 구석에서 소리 없이 살았을 테지만 잎싹은 그런 삶이 아닌 다른 삶을 꿈꾸었기 때문에 마당을 벗어나 험하고 무서운 세상으로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이 빛을 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릴 수도 있었던 한 생명을 살리는 밑거름으로 이어졌다. 초록머리를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삶을 놓는 그 마지막 순간에 ’날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왜 한 번도 나는 연습을 해 보지 않았는가 하는 부분에서도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꿈‘임을 짐작할 수 잇다.

’꿈‘이 있고 그 ’꿈‘을 위해 최선을 다 할 때 우리의 삶은 더욱 아름다고 풍성해 질 것이다. 물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잎싹처럼 많은 위험과 고난 앞에 상처입고, 넘어지고 쓰러지겠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능히 이겨 낼 수 있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자함이 아니었을까? 어떤 세상에 살던, 어떤 환경 속에 있든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포기하지 않으면 이룰 수 있다는 것, 혹여 설사 이루지 못한다할지라도 그 꿈으로 인해 아름다운 용기를 낼 수 있으며, 그로인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그리고 이미 꿈을 잃고 현실에 묻혀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하고자 하는 말인 듯 싶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지? 밭?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마당을 나온 암탉은 꿈을 이룰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어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다. 이미 주어진 환경에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겨워하며, 힘겨워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아직도 꿈을 꾸기에 그리고 그 꿈을 향해 나아기기에 늦지 않았음을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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