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 X - 트위터를 둘러싼 440억 달러의 싸움
커트 와그너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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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가 된 트위터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설명하는 흥미로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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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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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소설가로 꼽히는 줄리언 반스의 신작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를 읽었다. 줄리언 반스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2011년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이후 한국에 소개되는 줄리언 반스의 소설 제목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따라,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로 제목의 결을 맞추고 있다.



줄리언 반스는 초기작인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 시작했던 '픽션, 논픽션, 자서전이 합쳐진' 하이브리드 형식을 다시 한 번 빌려와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를 썼다.



*  *  *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의 첫 장을 펼친 독자는 예상치 못한 당혹감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소설이라기보다 흡사 뇌과학서나 심리학 개론서를 펼친 듯한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1장은 인간의 기억에 대한 깊이감 있는 고찰을 담고 있다.


불수의 자전적 기억(IAM: involuntary autobiographical memory), HSAM 등등의 전문 용어와 읽기 난해하기로 정평이 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이 출몰한다. 이 장을 읽어나가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기억에 대한 기억'에 압도당한 모습을 그린 것 같기도 하다.



한 철학자 친구가 나에게 지적한 대로 뇌는 자신이 처리하고 지나가는 모든 것을 일일이 우리에게 알려줄 수가 없다. 그러면 우리는 압도당할 것이다. 너무 많은 정보에 파묻혀, 우리는 바들바들 떨며 훌쩍거리는 동물이 되고 말 것이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36~37쪽.





줄리언 반스가 밝혔듯이,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설을 써온 40년이 넘는 여정을 함께해 준 독자들을 향한 '작별인사'다. 이를 드러내듯이, 소설의 마지막 장은 애틋함과 섭섭함을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 이르서야, 나는 1장의 의미를 겨우 헤아릴 수 있었다. 


1장에는 줄리언 반스가 왜 이토록 아름답지만 쓸쓸한 작별 인사를 준비해야 했는지 그 이유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인내심을 갖고 이 난해한 첫 관문을 통과해야만 작가가 설계한 이야기의 본질에 닿을 수 있다. 1장의 의미는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의 전체적인 뼈대는 '스티븐'과 '진',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다. 대학 동기였던 세 사람은, 줄리언 반스를 통해서 친해졌고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졸업할 무렵, 헤어졌고 오랜 시간이 흘러 재회하게 되면서 소설은 본궤도에 오른다.



"너는 한 번도 없어?" 그가 물었다.


"한 번도 뭘?"


"돌이키려 한 적."


"있지, 한 두번. 마누라가 죽은 뒤에. 어쩌면 세 번."


"그래서?"


"늘 나쁜 생각이었어. 아니, 그건 진실이 아니군. 한 번은 좋은 생각이었고, 한 번은 그럴 뻔했고, 한 번은 나쁜 생각이었어."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114~115쪽.






노련한 이야기꾼인 줄리언 반스는 독자로 하여금 궁금하게 만든다. 과연 관계를 돌이키려는 시도가 '좋은 생각'이었을지, '그럴 뻔했을지', 아니면 '나쁜 생각'이었을지.


분명 두 연인은 이 중에 하나의 결말을 맞이하게 되지만,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를 다 읽고나면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이 뻔하디 뻔한 연애소설은 아닌 까닭이다. 오히려 작가가 평생을 통해 길어 올린 삶의 진실을 건네는 고백에 가깝다. 특히 상실에 대한 다음 문장은 오래도록 곱씹게 된다.





모든 죽음은 2차 피해를 준다. 죽어가는 사람은 곧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반면, 슬픔에 시달리는 사람은 앞으로 긴 세월 동안 그 영향을 받게 된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94쪽.




일본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 역시 『나란 무엇인가』(21세기북스)에서 '상실의 2차 피해'를 '분인(分人)의 죽음'으로 설명한 바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가.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까지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 앞에서만 가능했던 나의 분인의 삶도 끝난다.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고 다시는 그때의 나로 살 수 없다." 




그의 비극은 사랑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의 비극은 사랑을 할 수는 없는데 그녀가 주고자 하는 것이 사랑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182쪽.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종종 인간관계에 지칠 때마다 되새기는 생각이 있다. 내가 누군가를 아끼는 온도와 누군가가 나를 아끼는 온도는 다르다는 것. 비극은 거기서 시작한다고. 줄리언 반스는 그 사실을 아름답게 빚어 한 편 소설로 썼다.



*  *  *









작가가 생전 마지막으로 남기는 작품을 유작이라고 한다. 대체로 소설가들은 무엇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임을 공공연히 말하지 않는다. 단호하게 절필을 선언한 김승옥 작가가 예외적인 사례다.


'유작'을 대신하는 '작별 인사'라는 말은 어쩔 수 없이 쓸쓸함을 품고 있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를 읽는 내내, 소설이 작별인사가 될 수 있는가, 어떤 형식이 작별 인사에 어울릴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 질문은 이 소설의 제목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의문과 결합된다. 



1장을 읽어나가면서, (당연하게도) '떠난 것'이 기억이라고 막연히 추측했다. 4장까지 읽어나가면서도 감을 잡기 어려웠다. 마침내 5장에 이르러서야 좀 더 구체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글을 발표한 지 44년이 지나니 내가 나 자신을 반복하기 시작하고, 똑같은 낡은 비유와 밈으로 돌아가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좋아하는 말을 되풀이하고, 심지어 (실제로는 아니기를 바라지만) 내 우스개마저 반복한다는 느낌, 또는 생생한 두려움도 있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247쪽.




떠남은 대개 도착에 이른다. 물론 한 번도 항구를 떠난 적이 없던 저 프랑스의 시적 몽상가들을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역, 버스 터미널, 공항에서 우리는 출발과 도착 알림판을 본다. 우리는 가고, 우리는 도착하고, 우리는 귀환에 나서고, 다시 집에 다다른다. 우리는 그런 타성을 가지고 산다. 하지만 그런 궤도는 더 크고 더 모순된 구조 안에 놓여 있다. 우리 삶에서는 도착이 먼저 오고 떠남은 마지막에 온다. 도착으로 이어지지 않는 떠남이지만.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215쪽.




책의 원문 제목을 확인했을 때, 사소한 의문이 있었다. 원문 제목은 'Departure(s)'다. 그저 출발, 떠남 정도를 의미할 뿐이다. 위의 문장에도 나오는 '공항'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 의문은 위 대목에 이르서야 해소되었다. 



삶을 도착으로 시작해, 떠남으로 끝나는 과정으로 본 줄리언 반스는 떠나기 직전에 마지막 인사를 건넨 것이다. 인생을 소풍에 비유했던 시인처럼. 그러니 이 소설은 인생의 황혼기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잔잔한 위로가 될 것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소풍」





작중 '진'의 입을 통해 줄리언 반스는 스스로를 '어쩔 도리가 없는 X 같은 소설가(117쪽)'라고 자조한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줄리언 반스만이 쓸 수 있는, 독자를 위한 우아하고 아름다운 작별 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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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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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가 건네는 아름다고 우아한 작별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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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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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만이 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장편소설, 『오직 그녀의 것』, 문학동네



소설가 김혜진의 10번째 소설 『오직 그녀의 것』을 읽었다. 『오직 그녀의 것』은 주인공 '홍석주'의 삶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다. 소설 말미에도 석주가 스스로 복기하듯이, "극적인 사건도, 놀라운 반전도 없는 서사. 개성도 매력도 없는 주인공이 완성해 나가고 있는 그 스토리"(263쪽)에 가깝다. 소설 전반을 훑어봐도, 그나마 드라마틱하고 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은 "결혼을 포기하는 지점" 정도만 꼽을 수 있다. (이것도 그저 물 흐르듯이 흘러가다보니 사실 그렇게 인상적인 사건이라는 느낌은 주지 못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를 연상시킨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까. 세상 사람들은 세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스토너』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 『스토너』를 읽었지만 좋아하지 않는 사람, 『스토너』를 읽고 인생책으로 꼽는 사람. 세상의 모든 책이 다 그렇겠지만, 『스토너』, 그리고 『오직 그녀의 것』과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책은 이런 호불호가 더 극명하게 갈리는 듯하다.


남들이 보기엔 의미도 없어보이고, 그다지 중요해보이지 않은 일에 두 소설의 주인공, 스토너와 석주는 강하게 매료된다. 그리고 끝내 한 번뿐인 삶을 그 일에 내던진다. 이들의 여정을 지켜보는 독자는 혼란에 빠진다. 이게 그럴 만한 일인가? 동의하는 사람은 주저없이 그 인물을 사랑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스토너』를 인생책으로 꼽는다. 하지만 끝끝내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책을 그저 지루한 책으로 여기게 된다.



김혜진 작가의 소설 『오직 그녀의 것』은 추천사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응답하라 1988>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홍석주가 처음 편집일을 시작한 시기가 90년 대 어간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한 인물의 20대부터 60대까지 장장 40 여년을 차분히 조망해간다는 점에서 <폭싹 속았수다>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석주는 소심하고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다. 삶을 통틀어, 그녀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가 있는데, 그 첫시작이 '소설 창작수업'을 청강한 일이었다. 인기 수업인지라 들을 수 없게 되었는데, 석주는 무작정 교수를 찾아가 청강을 부탁한다. 처음에 거절했던 교수도 이내 석주에게서 무언가를 느낀 듯이 청강을 허락한다. 석주는 교수(를 비롯한 다른 선배 편집자들)의 호의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소설 말미에 깨닫는다. 이 수업이 종강하고 석주는 교수에게서 책을 한 권 받는다. 그리고 이 때 느낀 감정은 석주의 인생 항로를 완전히 바꾸어버린다. 





창을 통과한 햇살이 푸르스름한 표지의 한 부분을 환하게 비추었다.



(중략)



추운 날씨였지만 한기를 느낄 수 없었다. 쌀쌀한 겨울의 정오 속에서 꺼지지 않는 어떤 강력한 온기를 손에 쥔 사람은 자신 하나뿐인 것 같았다.


25~27쪽




외부의 풍경을 묘사함으로써 인물의 내면을 은근히 드러내는 기법은 현대 소설이라는 형식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직접적인 감정 표현에서 벗어나 은유적으로 인물을 보여줄 수 있는 세련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전위가 시간이 흐르면 그 빛이 퇴색하듯이, 이제는 다양한 도구 중 하나로 여겨질 뿐이다. 하지만 김혜진 작가는 이 소설에서 그 도구를 가장 중요한 주인공의 대변자로 삼은 듯하다. '햇살'은 홍석주의 인생 전반에 걸쳐 등장하면서, 석주가 겪는 희로애락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오층짜리 건물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났다. 건물이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듯한 그 찰나의 모습은 석주가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출근길에 꽤 적응한 뒤에도, 회사생활에 제법 익숙해진 뒤에도 처음 보는 것처럼 놀라운 데가 있었다.


39쪽.




식사를 시작할 떄엔 오기서의 검은 구두를 환하게 덮고 있던 햇살이 미세하게 거리 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56쪽.




날이 개는 모양인지 가느다란 햇살이 책상 끄트머리에 걸려 있었다.


66쪽.




창을 통과한 햇살이 그의 구부정한 뒷모습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97쪽.




두 사람은 애매한 말들을 주고받다 아무런 소득 없이 카페를 나왔다. 오후의 강한 햇살이 두 사람 발밑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127쪽.



화창했던 날씨는 흐려졌고 오후가 되자 급격히 어두워졌다.


247쪽.




그녀는 창을 통과한 햇살이 조금씩 책상 안쪽으로 밀려드는 것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이윽고 햇살이 그녀가 검토중인 원고 뭉치의 모서리를 환하게 만들었다.


264쪽.



소설은 애써 석주와 거리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그녀를 관찰하는 카메라 렌즈가 되겠다는 듯이. '그녀'라는 호칭이 주는 다소 딱딱한 뉘앙스와 작가가 서술하는 석주의 내면은 어느 정도 정제된 언어와 표현들이다. 직접적이거나 절절하게 와닿지 않는다. 이 거리감이 소설 전반의 고요하고 잔잔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거리감과 더불어 일견 평평해 보이는 서사는 때때로 독자로 하여금 몰입감을 느끼기 어렵게 만든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석주라는 주어를 지워버린다면, 편집자의 에세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김혜진 작가는 '햇살'에게 더 큰 역할을 부여한 것처럼 보인다. 석주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모든 걸 다 말해주는 것보다 햇살이 석주의 감정과 생각을 더 내밀하게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석주가 연애에서 삐걱거릴 때 그동안 자주 등장하던 햇살에 대한 묘사는 소거되어 있다. 그 연애의 결말을 암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사람이 있고, 그저 인생이 흘러 가는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 마음 가짐의 문제라고 치부해버리기엔 인생은 너무 복잡하다. 인생을 긍정하는 정도의 차이쯤이라고 적어보고 싶다. 우리 앞에 놓은 삶은 석주처럼 오직 자신의 것을 획득해 내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대단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 여정은 오직 석주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녀만의 것이었다.


264쪽.




그렇다면, 무엇이 석주만의 것이었을까. 다 읽고나서 든 생각은 이렇다. 오직 햇살만이 그녀의 것이었다. 햇살이 석주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감정의 변화를 느낄 때마다 등장하는 점에서 유추해볼 수 있지만, 햇살이 가지는 속성 때문이기도 하다. 햇살은 손에 쥘 수 없다, 당연하게도. 그리고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다면 평소엔 잘 느끼기도 어렵다. 또한 누군가가 명확히 소유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같은 햇살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눈이 부셔서 짜증이 난다고 말할 것이고, 다른 이는 따뜻해서 사랑스럽다고 말할 것이다. 



주어를 한 번 바꿔볼까. 햇살에서 문학으로. 


문학은 누군가가 명확히 소유한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고, 같은 작품을 읽고도 서로 상반되는 해석을 내놓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결국, 석주는 그 햇살 같은 문학을 사랑했던 게 아닐까. 석주가 아래와 같은 사랑을 준 대상은 그 누구도 아닌 문학이었다. 



세상보다 늦되고, 허무해보이기까지 하고, 자꾸 마음을 다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그 언저리에라도 있고 싶은 것. 그럼에도 그 곁에 머물고 싶어지는 것.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석주가 아는 사랑은 문학을 통해 배운 것이어서 비현실적이고 불완전했다. 그녀는 사랑이 한 사람의 삶을 전복시킬 수 있음을 알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다. 사랑은 그것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주어지는 특권 같았고, 허구의 형식 안에서만 존재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기도 했다.


144쪽.


그 무렵 석주는 자신의 취향을 조심스레 점검하기 시작했다. 규한과 비교하면 자신이 애정하는 글들은 어딘가 구태의연하고 무미건조해 보였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과는 무관하게 늘 같은 자리에 머무는 듯했고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런 고민이 조바심이 되고, 불안으로 번질 때도 있었다.


168쪽.


좋아하는 게 이렇게 무섭습니다. 밉고 싫고 그만두고 싶어도 꾸역꾸역해나가게 되거든요.예전에 제 사수가 그러더군요. 뭘 좋아한다는 게 원래 그런 거라고. 더 좋아하고 많이 좋아할수록 마음 다칠 일이 많다고.


253~254쪽.




출판과 관련된 소설이다 보니 몇몇 현상을 포착한 문장들이 재미있었다. 




어떤 독자들은 좀 늦게 오기도 해요.


132쪽.



저자의 손을 떠난 책은, 독자들의 내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다시 쓰이고 완성되어가는 듯했다.


187쪽




또한 작중 등장하는 에세이집 『내 마음의 지도를 따라』는 TV 프로그램에서 한 연예인이 언급하자 판매부수가 훌쩍 뛰는데, 인플루언서의 입김이 큰 영향력을 끼치는 작금의 출판 현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끔 한다. 장편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문장들이 매끄럽고 정갈해서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 역시 큰 장점이다. 



다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출판계가 지나온 역사에 정통한 이들이라면, 그다지 개의치 않을 수 있겠으나 일반 독자들에게는 '시간대'에 대한 감을 잡기가 어려워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졌다. 작중 저자 안정묵은 故 마광수 작가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러한 일은 거진 20여 년 전의 일이었다. 물론, 한 편의 소설에서 한 사람의 40여 년의 여정을 담아내다보니 그랬을 거라 짐작은 하지만, 시간대가 너무 훅훅 넘어가 작중 인물이 속한 시간대가 어디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또한 종종 어느 대목은 너무 에세이 같기도 해서 소설을 읽는 것인지 에세이를 읽는 것인지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소설을 읽는 것과 에세이를 읽는 것은 독자가 바라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평소에 오타에 대해서 사람이 하는 일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는데, 어쩐지 교정교열로 사회에 발을 디딘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에서 오타를 발견하게 되니 더 눈에 띄는 기분이었다.



골목 안쪽에 차리한 두번째 가게 (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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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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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영도의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에서는 드래곤을 이렇게 묘사한다. 망각의 축복을 향유할 수 없는, 그래서 그 무엇도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불행한 종족. 전지전능한 드래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기억까지 생생히 간직해야 한다. 인간은 드래곤에 비해 훨씬 약하지만, 대신 신에게 망각이라는 축복을 선물 받았다. 생생한 고통도, 잠겨 죽을 것 같은 슬픔도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고 결국은 잊을 수 있다. 그리하여 망각의 힘으로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도모할 수 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살면 살아진다’는 메세지 역시 우리 인간의 삶이 망각에 빚을 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김금희 작가의 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한 인간이 이러한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서 자신을 수리해 나가는 여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소설은 영두가 창경궁의 대온실 수리 공사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으면서 시작된다. 표면적으로는 건축 보고서의 작성 과정이 주요 서사이지만, 점차 영두의 내면을 치유하는 작업으로 확장된다. 산아와 스미의 관계, 리사와의 과거, 대온실 설계자 후쿠다 노보루의 삶, 그리고 문자 할머니의 삶이 하나씩 얽히게 되면서 보고서 바깥의 진짜 이야기가 완성된다.




   그러나 영두는 끝내 수리 보고서를 완성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박유진과 이창충이 살아 있었다는 점이 밝혀지며 영두가 기획했던 초기 형태로는 결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언뜻 영두의 목표는 좌절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완성하진 못했지만, 영두는 자신만의 수리 보고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 싶어 망각을 결심’했던 낙원하숙에서의 기억과 대면하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했다. 대온실 수리보고서 작성을 맡지 않았다면 얻지 못했을 성과였다.



*



   읽는 내내 소설은 이런 질문을 품고 있는 듯했다. ‘망각된 기억은 반드시 복원되어야 하는가?’ 소설은 이 질문에 있어서 두 개의 상반된 답을 보여준다. 우선 영두를 통해 제시되는 답이 있다. 망각된 기억은 복원되어야 한다는 쪽이다. 낙원하숙 시절의 영두에겐 절박한 믿음이 있었다.




   “사람을 믿는 게 잘못은 아니야. 네 말대로 그렇게 혼자라면 믿어야 살 수 있으셨겠지.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누군가를 믿기도 해.” (102쪽) 



   이 발화에서 영두는 할머니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영두는 이를 통해 마치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경한 영두는 춘당지의 얇은 얼음 위에 서 있듯 위험한 상태에 놓여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혼자였던 영두 역시 누군가를 믿고 싶었고, 그 대상은 불행하게도 리사였다. 리사가 간간이 보여주는 친절한 면모가 영두에게 기대감을 주었고, 영두는 리사와 친구 또는 자매처럼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리사는 이 믿음을 배신으로 되돌려준다. 이로 인해 어린 영두는 그 시절 자체를 도려내 버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남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망각을 택한다.


   모든 망각을 축복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축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망각은 좋은 기억들은 남겨둔 채, 고통스러운 기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잊혀져 가는 것이다. 반면에 영두가 겪은 망각은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일종의 ‘난폭한 망각’이다.


   당연하게도 인생에서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은 물과 기름처럼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결국 상처를 강제로 도려내기 위해서는 그 상처에 붙어있는 좋은 기억들도 함께 버려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망각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 상처를 입은 초기에 올바른 대처를 하지 못해 겪는 망각의 후유증인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을 지난 시간 속 좋은 기억과 경험을 반추하며 극복해낸다. 난폭한 망각은 이런 가능성까지도 없애며, 나아가 새로운 고통 앞에서 또다시 난폭한 망각을 수행하게끔 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그렇게 된다면, 먼 훗날 돌이켜 보았을 때 인생에 숭덩숭덩 구멍이 나 있는 걸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정작 기억할 만한 것은 거의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식으로 망각된 기억은 올바르게 복원되어야 하고 치유해야 한다. 




   하지만 이 후유증을 치유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억지로 묻어둔 과거를 현재로 가지고 와 고통을 다시 직면해야 한다. 그래서 소설의 후반부에 발굴 작업이 등장하는 건 의미심장하다. 발굴은 과거의 기억을 아주 조심스럽게 꺼내어 보고 원래의 의미를 되찾아 주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영두 개인의 차원에서도 일종의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처럼 다가온다.


   영두의 발굴은 산아와 스미의 관계를 통해 과거의 자신과 리사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되어, 기억 속에 묻혀 있던 할머니의 진심까지 건져내게 된다. 자신을 돕기 위해 손을 건네주던 그 마음을 말이다. 나아가 낙원하숙에 얽힌 할머니의 진심과 과거에 올바른 의미를 되찾아 주면서 부채의식을 치유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할머니의 과거를 복원하며 영두의 발굴은 종료된다. 꼭 예비한 것처럼 이 직후에 영두는 첫사랑, 순신과 재회한다. 이 애틋하고 귀여운 재회는, 영두가 고통과 함께 망각해야만 했던 그 시절의 빛나는 조각을 성공적으로 복원해냈음을 증명한다.




   이 작품이 더욱 특별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망각된 기억에 관해 단 하나의 해결책만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을 보존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탐색하면서 상반된 결론도 제시한다.


   이를테면, 유진의 경우가 그렇다. 소설 내내 과거의 오해를 바로잡아 온 영두는 유진과의 조우에서는 전혀 다른 선택을 보여준다. 유진은 이창충을 은인으로 오해하고 있었고, 영두와 할머니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영두는 유진과의 대화 끝에 이 오해들을 바로 잡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는 누군가에겐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는 일이 더 큰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는 점을 부드럽게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놀랍다. 이런 경우에는 올바른 과거가 망각 속에 머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이 작품은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우아한 시도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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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사실은 살면서 억지로 망각하게 되는 것들 중 대부분은 우리가 ‘너무’ 좋아했던 것들이라는 점이다. 너무 싫어하는 것들은 오히려 어떤 기대도, 믿음도 주지 못하므로 상처를 주진 못한다. 우리에게 불쾌감만 안길 뿐이다. 영두가 낙원하숙을 망각해야만 했던 것도 역설적으로 그 시절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후쿠다 노보루가 포도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뻔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영두가 산아에게 건넨 ‘너무를 조심하자.’는 조언은 분명 인상적이다. 이 문장은 경고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다정하다. 영두의 경험처럼 사랑, 믿음, 기대 같은 감정은 한없는 중력으로 우리를 끌어당기지만, 때로는 그 결과로 고통도 안겨준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감정들을 경계하고 회피하는 삶이 과연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소설 안에는 산아, 영두처럼 ‘너무 좋아하는 것들이 있는 사람’들과 리사처럼 ‘너무 좋아하는 것들이 없는 사람’들이 뒤섞여 등장한다. 산아, 영두는 각각 너무 좋아했던 스미와 리사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주어진 고통을 극복하면서 한층 성장한다. 


   반면에 친구를 곤경에 빠뜨릴 정도로 나름 고군분투했던 리사의 ‘다크’한 삶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아들과 할머니의 낙원하숙에 대해서도 크게 애정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기적이고 밉살맞은 모습을 보여주는 리사는 성장이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너무’ 좋아했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성숙해질 경험을 놓친 것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너무 좋아했던 기억은 종종 고통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상처를 굳은살로 바꾸며 성숙해진다. 영두에게 낙원하숙에서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산아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성숙한 어른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지점은 영두와 리사가 각각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대하는 방식을 통해 대비된다. 영두는 친구의 딸인 산아에게 따뜻한 태도를 보여주지만, 리사는 자식에게마저도 서툰 훈육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또한 우리를 매 순간 무한경쟁의 쳇바퀴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끊임없이 서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만든다. 심지어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마저도 포기하라고 종용하기도 한다. 이 소설에는 이창충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악역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리사와 장 과장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리사와 장 과장도 선명한 악인이라기보다는 그저 세상의 규칙에 수긍한 사람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쿠다 노보루가 포도뿌리혹벌레와 장티푸스라는 복병 앞에서 포도에 대한 열망을 포기했다면, 창경궁 대온실을 세울 수 있었을까? (물론, 후쿠다 노보루는 가상 인물이지만 말이다.)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그저 ‘다크’한 삶에 빠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너무’를 조심하되, 너무 조심하고는 싶지 않다. 짓궂은 삶은 반복적으로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다시 누군가를 믿고 기대해야 한다. 남에게 건넨 기대가 다시 고통으로 돌아오더라도, 언젠가 그 순간들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스스로를 수리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운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영두는 낙원 하숙에서의 시간을 떠나보낸 것 같았지만, 정작 나는 책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난생처음으로 창경궁으로 향했다. 구름이 낮게 깔려 햇살이 비추지 않던 날이었다. 춘당지를 헤엄치는 잉어와 수면에 닿을 듯 흐드러진 버드나무 사이를 누비는 오리를 보았다. 좀 더 걷자, 철조와 목조가 혼합된 흰색 대온실이 보였다. 외국인 부부가 한복을 입은 채, 프랑스 양식의 정원과 대온실을 배경으로 삼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국의 의복, 일본인이 지은 서양식 건물과 정원 속 외국인들은 이질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나무들은 고궁을 세속과 격하려는 듯 소음을 빨아들였고, 간간이 울리는 경적만이 고요를 범했다. 서울에, 그것도 도심의 한복판이나 다름없는 종로에 이런 은밀한 고요를 간직한 곳이 남아 있다니, 그 기묘한 간극의 공존이 새삼스러웠다. 별세계 같았다. 그 별세계에서 산아와 스미가 뛰어노는 모습을 보았고,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리코와 유마를 지나쳤으며, 얼어붙은 춘당지 위에서 스케이트 타는 영두와 리사를 본 듯했다. 


   번잡한 도심으로 돌아가기 전, 홍화문 문턱 앞에서 생각했다. ‘너무’를 조심하되, 그것을 피하지는 말자고, 그래서 믿음과 기대에게 기꺼이 또 속아보자고. 낮게 깔린 구름을 헤집고 햇살이 한 줄기 내리쬐었다. 창경궁을 빠져나오자, 이제야 정말로 책을 덮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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