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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영도의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에서는 드래곤을 이렇게 묘사한다. 망각의 축복을 향유할 수 없는, 그래서 그 무엇도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불행한 종족. 전지전능한 드래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기억까지 생생히 간직해야 한다. 인간은 드래곤에 비해 훨씬 약하지만, 대신 신에게 망각이라는 축복을 선물 받았다. 생생한 고통도, 잠겨 죽을 것 같은 슬픔도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고 결국은 잊을 수 있다. 그리하여 망각의 힘으로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도모할 수 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살면 살아진다’는 메세지 역시 우리 인간의 삶이 망각에 빚을 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김금희 작가의 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한 인간이 이러한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서 자신을 수리해 나가는 여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소설은 영두가 창경궁의 대온실 수리 공사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으면서 시작된다. 표면적으로는 건축 보고서의 작성 과정이 주요 서사이지만, 점차 영두의 내면을 치유하는 작업으로 확장된다. 산아와 스미의 관계, 리사와의 과거, 대온실 설계자 후쿠다 노보루의 삶, 그리고 문자 할머니의 삶이 하나씩 얽히게 되면서 보고서 바깥의 진짜 이야기가 완성된다.
그러나 영두는 끝내 수리 보고서를 완성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박유진과 이창충이 살아 있었다는 점이 밝혀지며 영두가 기획했던 초기 형태로는 결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언뜻 영두의 목표는 좌절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완성하진 못했지만, 영두는 자신만의 수리 보고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 싶어 망각을 결심’했던 낙원하숙에서의 기억과 대면하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했다. 대온실 수리보고서 작성을 맡지 않았다면 얻지 못했을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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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소설은 이런 질문을 품고 있는 듯했다. ‘망각된 기억은 반드시 복원되어야 하는가?’ 소설은 이 질문에 있어서 두 개의 상반된 답을 보여준다. 우선 영두를 통해 제시되는 답이 있다. 망각된 기억은 복원되어야 한다는 쪽이다. 낙원하숙 시절의 영두에겐 절박한 믿음이 있었다.
“사람을 믿는 게 잘못은 아니야. 네 말대로 그렇게 혼자라면 믿어야 살 수 있으셨겠지.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누군가를 믿기도 해.” (102쪽)
이 발화에서 영두는 할머니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영두는 이를 통해 마치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경한 영두는 춘당지의 얇은 얼음 위에 서 있듯 위험한 상태에 놓여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혼자였던 영두 역시 누군가를 믿고 싶었고, 그 대상은 불행하게도 리사였다. 리사가 간간이 보여주는 친절한 면모가 영두에게 기대감을 주었고, 영두는 리사와 친구 또는 자매처럼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리사는 이 믿음을 배신으로 되돌려준다. 이로 인해 어린 영두는 그 시절 자체를 도려내 버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남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망각을 택한다.
모든 망각을 축복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축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망각은 좋은 기억들은 남겨둔 채, 고통스러운 기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잊혀져 가는 것이다. 반면에 영두가 겪은 망각은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일종의 ‘난폭한 망각’이다.
당연하게도 인생에서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은 물과 기름처럼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결국 상처를 강제로 도려내기 위해서는 그 상처에 붙어있는 좋은 기억들도 함께 버려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망각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 상처를 입은 초기에 올바른 대처를 하지 못해 겪는 망각의 후유증인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을 지난 시간 속 좋은 기억과 경험을 반추하며 극복해낸다. 난폭한 망각은 이런 가능성까지도 없애며, 나아가 새로운 고통 앞에서 또다시 난폭한 망각을 수행하게끔 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그렇게 된다면, 먼 훗날 돌이켜 보았을 때 인생에 숭덩숭덩 구멍이 나 있는 걸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정작 기억할 만한 것은 거의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식으로 망각된 기억은 올바르게 복원되어야 하고 치유해야 한다.
하지만 이 후유증을 치유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억지로 묻어둔 과거를 현재로 가지고 와 고통을 다시 직면해야 한다. 그래서 소설의 후반부에 발굴 작업이 등장하는 건 의미심장하다. 발굴은 과거의 기억을 아주 조심스럽게 꺼내어 보고 원래의 의미를 되찾아 주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영두 개인의 차원에서도 일종의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처럼 다가온다.
영두의 발굴은 산아와 스미의 관계를 통해 과거의 자신과 리사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되어, 기억 속에 묻혀 있던 할머니의 진심까지 건져내게 된다. 자신을 돕기 위해 손을 건네주던 그 마음을 말이다. 나아가 낙원하숙에 얽힌 할머니의 진심과 과거에 올바른 의미를 되찾아 주면서 부채의식을 치유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할머니의 과거를 복원하며 영두의 발굴은 종료된다. 꼭 예비한 것처럼 이 직후에 영두는 첫사랑, 순신과 재회한다. 이 애틋하고 귀여운 재회는, 영두가 고통과 함께 망각해야만 했던 그 시절의 빛나는 조각을 성공적으로 복원해냈음을 증명한다.
이 작품이 더욱 특별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망각된 기억에 관해 단 하나의 해결책만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을 보존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탐색하면서 상반된 결론도 제시한다.
이를테면, 유진의 경우가 그렇다. 소설 내내 과거의 오해를 바로잡아 온 영두는 유진과의 조우에서는 전혀 다른 선택을 보여준다. 유진은 이창충을 은인으로 오해하고 있었고, 영두와 할머니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영두는 유진과의 대화 끝에 이 오해들을 바로 잡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는 누군가에겐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는 일이 더 큰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는 점을 부드럽게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놀랍다. 이런 경우에는 올바른 과거가 망각 속에 머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이 작품은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우아한 시도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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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사실은 살면서 억지로 망각하게 되는 것들 중 대부분은 우리가 ‘너무’ 좋아했던 것들이라는 점이다. 너무 싫어하는 것들은 오히려 어떤 기대도, 믿음도 주지 못하므로 상처를 주진 못한다. 우리에게 불쾌감만 안길 뿐이다. 영두가 낙원하숙을 망각해야만 했던 것도 역설적으로 그 시절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후쿠다 노보루가 포도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뻔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영두가 산아에게 건넨 ‘너무를 조심하자.’는 조언은 분명 인상적이다. 이 문장은 경고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다정하다. 영두의 경험처럼 사랑, 믿음, 기대 같은 감정은 한없는 중력으로 우리를 끌어당기지만, 때로는 그 결과로 고통도 안겨준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감정들을 경계하고 회피하는 삶이 과연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소설 안에는 산아, 영두처럼 ‘너무 좋아하는 것들이 있는 사람’들과 리사처럼 ‘너무 좋아하는 것들이 없는 사람’들이 뒤섞여 등장한다. 산아, 영두는 각각 너무 좋아했던 스미와 리사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주어진 고통을 극복하면서 한층 성장한다.
반면에 친구를 곤경에 빠뜨릴 정도로 나름 고군분투했던 리사의 ‘다크’한 삶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아들과 할머니의 낙원하숙에 대해서도 크게 애정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기적이고 밉살맞은 모습을 보여주는 리사는 성장이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너무’ 좋아했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성숙해질 경험을 놓친 것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너무 좋아했던 기억은 종종 고통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상처를 굳은살로 바꾸며 성숙해진다. 영두에게 낙원하숙에서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산아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성숙한 어른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지점은 영두와 리사가 각각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대하는 방식을 통해 대비된다. 영두는 친구의 딸인 산아에게 따뜻한 태도를 보여주지만, 리사는 자식에게마저도 서툰 훈육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또한 우리를 매 순간 무한경쟁의 쳇바퀴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끊임없이 서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만든다. 심지어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마저도 포기하라고 종용하기도 한다. 이 소설에는 이창충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악역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리사와 장 과장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리사와 장 과장도 선명한 악인이라기보다는 그저 세상의 규칙에 수긍한 사람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쿠다 노보루가 포도뿌리혹벌레와 장티푸스라는 복병 앞에서 포도에 대한 열망을 포기했다면, 창경궁 대온실을 세울 수 있었을까? (물론, 후쿠다 노보루는 가상 인물이지만 말이다.)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그저 ‘다크’한 삶에 빠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너무’를 조심하되, 너무 조심하고는 싶지 않다. 짓궂은 삶은 반복적으로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다시 누군가를 믿고 기대해야 한다. 남에게 건넨 기대가 다시 고통으로 돌아오더라도, 언젠가 그 순간들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스스로를 수리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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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운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영두는 낙원 하숙에서의 시간을 떠나보낸 것 같았지만, 정작 나는 책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난생처음으로 창경궁으로 향했다. 구름이 낮게 깔려 햇살이 비추지 않던 날이었다. 춘당지를 헤엄치는 잉어와 수면에 닿을 듯 흐드러진 버드나무 사이를 누비는 오리를 보았다. 좀 더 걷자, 철조와 목조가 혼합된 흰색 대온실이 보였다. 외국인 부부가 한복을 입은 채, 프랑스 양식의 정원과 대온실을 배경으로 삼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국의 의복, 일본인이 지은 서양식 건물과 정원 속 외국인들은 이질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나무들은 고궁을 세속과 격하려는 듯 소음을 빨아들였고, 간간이 울리는 경적만이 고요를 범했다. 서울에, 그것도 도심의 한복판이나 다름없는 종로에 이런 은밀한 고요를 간직한 곳이 남아 있다니, 그 기묘한 간극의 공존이 새삼스러웠다. 별세계 같았다. 그 별세계에서 산아와 스미가 뛰어노는 모습을 보았고,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리코와 유마를 지나쳤으며, 얼어붙은 춘당지 위에서 스케이트 타는 영두와 리사를 본 듯했다.
번잡한 도심으로 돌아가기 전, 홍화문 문턱 앞에서 생각했다. ‘너무’를 조심하되, 그것을 피하지는 말자고, 그래서 믿음과 기대에게 기꺼이 또 속아보자고. 낮게 깔린 구름을 헤집고 햇살이 한 줄기 내리쬐었다. 창경궁을 빠져나오자, 이제야 정말로 책을 덮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