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소설가
임현 지음 / 창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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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이 되고 마는 선의, 그리고 아이러니





임현의 세 번째 소설집 『행복한 소설가』를 읽었다.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으며, 목차는 다음과 같다. 2026년 김승옥문학상 수상작인 「너는 나의 이야기」는 수록되어 있지 않았고, 2026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은 수록되어 있었다.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부딪히는 돌과 바위들에게

느리게 흩어지기

분재

나를 아는 사람들

행복한 소설가



여덟 편을 다 읽고 남은 첫인상은 글이 어쩐지 읽기 편해졌다는 것이다. 근래 한국 소설 전반에서 감지되는 '소설의 에세이화'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가독성이 좋아졌다는 점은 앞선 소설집 『그 개와 같은 말』이나 『그들의 이해관계』와 비교했을 때 가장 크게 느껴지는 차이였다. 두 소설집에는 중간중간 멈칫하게 되거나 쉬이 넘어가지지 않는 문장이 더러 있었다. 2014년에 등단해 13년째 작품 활동을 이어온 작가이니 문장이 더 유려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문장의 문제라기보다 소재의 차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선 소설집에서 임현은 독자가 불편해할 만한 소재를 거침없이 다루곤 했다. 나는 임현 작가가 건드리는 불편함을 좋아한다. 특히 「고두」를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고, 지금도 내가 읽은 한국 단편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고두」나 「엿보는 손」 같은 작품은 결말에 이르기까지 차곡차곡 쌓아 올린 불편함과 긴장을 마지막에 기어이 터뜨린다. 반면 이번 소설집은 그 불편함과 긴장을 유지하되 끝내 터뜨리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난 뒤 오래 곱씹게 되는 불편함은 앞선 소설집보다 조금 옅게 남았다. 




표제작「행복한 소설가」를 읽을 수 있는 문장 웹진






「행복한 소설가」 — 행복해서 쓸 수 없는 사람



그런 변화를 느끼며 읽어나가다 만난 표제작 「행복한 소설가」는, 어째서인지 작가의 오토픽션처럼 읽히기도 했다.



소설 창작 수업을 듣거나 작법서를 읽으면 글 쓰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쓰지 말라고 가르친다. 아마 그 주인공이 세상을 포착하는 시선과 사유가 작가 자신과 너무 밀착한 나머지, 시야가 좁아지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0년 넘게 활동한 소설가라면 예외가 아닐까.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야 하는 직업적 숙명 탓에 그들은 결국 자기 내면으로 침잠할 수밖에 없는데, 그 자신의 직업이 하필 작가이므로 '글 쓰는 사람'에 대한 탐구를 영영 피해 갈 수는 없어 보인다.



실제로 소설 곳곳에는 작가 본인을 연상시키는 문장이 더러 있다. 이를테면 임현 작가는 서울예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첫 소설집이 출간된 이후로 줄곧, 나는 일주일에 사나흘은 문예창작학과나 사설로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행복한 소설가」, 254쪽


「행복한 소설가」의 '나'는 소설을 쓰며 대학과 사설 아카데미에 출강하는 강사다. '나'는 첫머리부터 선배 작가를 떠올리며 소설가라는 직업을 깊이 들여다본다. 개인적으로는 표면에서 흘러가는 사건(아내 연재의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일)보다, '나'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생각들이 훨씬 흥미로웠다. 성공한 사람은 자서전을 쓰고 여전히 안타까운 사람이 소설을 쓴다는 대목이 특히 그랬다.


오히려 이미 불행한 사람들 중 누군가 소설을 쓰는 거라고 말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똑같은 고생담이라 할지라도 나중에 성공한 사람들은 자서전을 쓰고, 여전히 고만고만하게 안타까운 사람들이 소설을 쓴다. 심지어 나름대로 이름 좀 알려졌다는 성공한 사람들이 왜 자꾸 에세이를 출간하겠나. 소설가란 모름지기 자기 자신의 평범한 불행을 현재진행적으로 고백하는 존재들이다.

「행복한 소설가」, 261쪽


'나'는 근래 소설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있는데, 그 이유를 스스로 '소설을 쓸 만큼' 충분히 불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를 그 상태로 밀어 넣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내 연재다. 연재는 사실 굉장히 이상적인 아내다. 소설가인 '나'의 수입이 변변찮아도 불평하지 않고, 소설이 잘 써지지 않는 고통에 공감하며, 그의 작업에 도움이 되려 애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나'에게는 딜레마가 된다.



내 행복의 근원. 나의 모든 것. 그리고 좀처럼 내가 무얼 쓸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행복한 소설가」, 267쪽



'나'는 연재 덕분에 불행하지 않고, 소소하게나마 행복하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불행한 자들의 전유물인 소설을 쓸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아이러니'가 여기 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슴슴하게 끝맺는다. 불행하지도 않고 그럭저럭 행복하기 때문에 소설을 쓸 수 없는 소설가의 이야기로.


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별로 화가 나지도 억울하지도 않은 무난한 날들을 보내는 중이다. 자주 내게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떠올리며 무언가를 써보려고 하지만 한결같이 잘 되지 않았다.


「행복한 소설가」, 296쪽




소설집 곳곳에 심어둔 아이러니



'아이러니'의 흔적은 소설집 곳곳에서 발견된다.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에서는 결말 부근에 흰 눈이 등장하는데, 흰 눈이 지니는 보편적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우리는 흔히 눈 덮인 풍경에서 추함과 상처와 아픔을 가려주는 화해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흰 눈은 추악한 현실의 문제를 아주 잠깐 덮어두는 역할에 그친다. 교묘한 위장술이라 불러도 좋겠다. 작중에는 '체호프의 총'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어찌 보면 이 흰 눈은 끝내 사라지지 않은 채 언젠가 기어이 격발되고야 말 문제들을 잠시 가려두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에서도 아이러니는 빠지지 않는다. 화자는 남자의 어머니 때문에 결별을 결심한다. 그러나 이후 금전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남자에게 큰 목돈이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먼저 연락을 한다. 그런데 그 목돈의 출처가 바로 그 어머니의 보험금이다. 톰 포드의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가 함께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재우는 기옥과 조금 달랐다. 오히려 선우에게 베푸는 마음을 가르치고 싶었다.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할 줄 알고,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누군가를 더 측은하게 여기는 아이로 자랐으면 했다.

「분재」, 195쪽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아이러니는 「분재」 에 있다. 아이를 입양한 부부가 등장하고, 양부 재우는 선우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베푸는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버려진 아이인 줄 알고 데려와 몇 년간 정성껏 키웠는데, 어느 날 친모가 나타난다. 아이는 양부모와 친모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자리에 놓이고, 재우가 가르친 대로 '생각이 깊고 사려 깊은' 행동을 한다. 가르친 대로 자란 아이의 선함이 가르친 사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셈이다. 읽으면서 김영하 작가의 「아이를 찾습니다」와 짝을 지어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찾습니다」는 잃어버렸던 아이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되찾았을 때 밀려오는 이상한 감정을 다룬 작품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 에서는 '선의'와 '위선'이 뒤섞인다. '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선배를 돕기 위해 선뜻 선배의 빈 가죽 공방을 자신의 작업실로 빌린다. 선배네와 '나'의 부부는 함께 여행을 가고 반찬을 주고받는 사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나'와 아내는 그 반찬을 잘 먹지 않아 일종의 골칫덩어리로 여긴다. 공방이 있는 건물의 번영회 사람들과 얽히면서 '나'는 자기 선의가 어디까지가 선의였는지를 되짚게 된다. 선의의 선(線)은 어디쯤에 그어져 있는지, 겉으로 친밀한 관계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여러모로 곱씹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고백의 형식으로 돌아온 작품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는 이 소설집에서 이전 작품들의 경향을 가장 뚜렷하게 계승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나는 임현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면 고백체를 잘 쓰고 즐겨 쓰는 작가라는 인상을 함께 떠올리곤 한다. 「고두」와 「엿보는 손」, 「목견」,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이 모두 고백체로 쓰여 있고, 나는 이 작품들을 전부 좋아한다. 독자를 놀라게 하거나, 찝찝하게 만들거나, 끝내 충격에 빠뜨리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앞선 작품들보다 한 걸음 더 '고백'의 형식에 가까워졌다고 해도 될까. 화자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신부이기에, 이 발화는 자연스럽게 고해성사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를 뒤섞으며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법이 피해자의 피해를 온전히 회복시켜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부각하고, 선과 악을 함께 품은 인물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간 뒤, 그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판단은 끝내 독자에게 넘긴다.


이 소설들을 다 읽고 나면 판결문 대신 진술서 한 장을 손에 쥔 기분이 된다. 어쩌면 그것이 이 소설집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자세인지도 모르겠다. 선의라 믿었던 것이 어느 지점에서 위선으로 미끄러지는지, 그 선을 각자 그어보라고.



읽고 나니 임현 작가의 장편 소설은 아직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장편 한 권 정도는 나온 것 같은데, 장편소설은 아직 없는 듯하다. 한국 문학이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단편을 위주로 돌아가긴 하지만, 그래도 장편을 꼭 쓰긴 하는데, 등단한 지 10년이 넘은 작가의 장편 소설이 없다는 점이 신기했다. 어쩌면 임현이 '행복한 소설가'여서 쓰지 못하는 걸 수도 있지만, 작가의 장편소설도 꼭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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