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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돌멩이 - 2026년 제4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ㅣ 이상문학상 작품집
위수정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6년 1월
평점 :
올해로 제49회를 맞이한 <이상문학상>의 대상은 위수정 작가에게 돌아갔다. 역대 최초로 수상자 전원이 여성이라고 한다. 이번 작품집을 살펴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예심 심사위원에 해방촌 독립서점 <고요서사>의 주인인 차경희 씨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문학사상사에서 다산책방으로 상의 운영권이 넘어온 이후로 여러가지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는 듯하다. 개인적으론 수상작들과 일반 독자 사이의 괴리감을 줄이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 위수정, 「눈과 돌멩이」
대상을 수상한 위수정 작가의 「눈과 돌멩이」는 여러모로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귀신이 없는 집」과 닮아있다. <젊은작가상> 수상 소감에도 적었듯이 하나의 일본 설화에서 뻗어나온 두 소설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코요"라는 이름을 쓰는 등장인물이 두 소설에 모두 등장하고, 두 사람은 모두 크로스드레서(CD)이다. 그 설화에 기반한 작품을 한 편 더 쓰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귀신이 없는 집」과의 이런 교차점을 제외하고도 「눈과 돌멩이」는 김지연 작가의 등단작인 「작정기」를 떠올리기 한다. 「작정기」 역시 여행을 함께 준비했던 친구가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해서 혼자 일본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 이야기다. 「눈과 돌멩이」 역시 수진이 주도했지만 차마 이루어지지 못했던 여행이 재한과 유미가 수진의 뼛가루를 뿌려주는 일종의 애도 여행으로 전환된다.
또한 작년에 <김승옥 문학상>을 수상한 최은미 작가의 「김춘영」을 얼마간 떠올리게도 한다. 눈으로 인하여 산에서 고립이 되어, 재한과 유미는 결국 CD인 코요의 집에 하룻밤 머물게 되는 설정에서 그러하다. 눈으로 온통 둘러싸인 산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웃음을 동반하지만 쓸쓸하다.
난 곱게 늙고 싶다.
유미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꼭 늙어라, 곱게.
- 「눈과 돌멩이」, 46쪽
"꼭 늙으라"는 당부는 "죽지 말고 오래 살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귀신이 없는 집」을 읽을 때도 위수정 작가가 쓰는 대사가 기억에 남았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런 점이 눈에 들어온다.
근데 나, 열나는 거 같아. 수형이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그러네. 추운데 땀 흘려서 그런가 보다. 그런데 아이스크림은 왜 먹냐. 약 먹자. 수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이 없어.
사 오면 되지.
아니야, 그냥 앉아 있어. 기분이 좋거든. 몽롱한 게.
- 위수정, 「아무도」
개인적으로 위수정 작가의 「아무도」를 인상적으로 읽었는데, 「눈과 돌멩이」에서도 이와 유사한 감각이 소설에서 드러난다. 「눈과 돌멩이」 속 재한은 비행기를 타고와 폭설 속 산행이 주는 피로, 전날밤 잠을 자지 못한 노곤함, 거기에 맥주가 주는 노곤함이 더해진 상태로 하루를 마감한다. 이렇듯 신체의 감각이 중력을 잃어 현실 감각이 떠다니는 듯한 상태는 「아무도」의 화자에게서도 발견된다.
세계가 나뉘는 데 한 발짝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재한은 이해했다.
(…)
재한은 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의 결단으로 모든 것을 망가뜨릴 수 있다. 끝낼 수 있다. 수진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눈과 돌멩이」, 45~46쪽
소설을 읽는 동안, 그리고 다 읽고 나서도 도대체 "수진"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독자는 알기 어렵다. 이 점은 소설 속 인물인 재한과 유미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이 여정은 먼저 떠난 이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남겨진 자들의 여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애도를 하기 위하여서는 그 애도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부터 전제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 김혜진, 「관종들」
김혜진 작가의 미덕은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순간들에서 소설적인 순간을 건져 올려내는 거라고 말해도 될까? <김승옥문학상>을 수상했던 「빈티지 엽서」나 장편소설 『오직 그녀의 것』, 그리고 「관종들」은 우리 주변의 흔히 있을 법한 이야기다.
게다가 김혜진 작가의 소설들은 술술 읽힌다. 사람들은 종종 "가독성"에 대하여 한 가지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다. 너무 쉽고 뻔하게 쓰여진 거 아니냐는. 기실 그건 문장이 담고 있는 서사에 달려 있는 문제다. 문장 자체만 놓고 보았을 때, 술술 읽히게 쓴다는 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쉬운 문장 같은데도 문장의 호흡이나 구성, 단어선택 등에 있어서 독자의 "읽기"를 방해하는 작품들이 더 많다. (물론, 실험적이거나 전위적인 작품에 대해서는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자신만만함은 잦아들고 다시금 미심쩍은 마음이 올라오고 있었다.
자신이 유별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문제는 바로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
「관종들」, 141쪽
「관종들」의 주인공들은 아이러니하다. 그들이 "관종"이라는 멸칭을 얻게 된 이유가 그렇다. 그저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좋은 "정해"와 고치는 것이 좋은 "영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실한 사회구성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이 타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길 원해서, 주목 받는 걸 즐겨서 이웃을 불편하게 만드는 걸까? 오히려 정반대의 이유 아닐까. 타인에게, 사회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가져서.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항변의 이유는 마련되어 있다. 자신들의 소홀함으로 인하여 영구적인 장애를 얻은 딸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죄의식이 그들이 자꾸만 눈에 보이는 사소한 불의에 대해 눈감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일견 어린 자식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던 자신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애꿎은 주변 사람들에게 전가시키고, 사소한 공동체 윤리를 지키지 않는 이웃들에게 투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잘못된 곳을 향하는 원망은 결국 주변인들 입에서 "관종"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하며, 친언니인 정미마저도 정해를 나무라게 만든다.
정해야, 다른 사람들 심기를 건드리면 좋아? 다른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나아?
「관종들」, 152쪽
이에 대하여 정해도 항변을 하지만, 그 항변은 어쩐지 자신을 향해 되돌아오는 것처럼 들린다.
원래 손가락질하는 건 쉬워. 언니처럼 말하는 건 쉬운 일이라고. 무슨 일이든 터지고 나서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야! 안 그래?
「관종들」, 153쪽
이 대목에서 정해와 영기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딸 호정에 대한 무거운 죄책감이고, 그들이 여전히 후회라는 지옥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리하여 그들은 "관종들"이라는 모멸적인 호칭 속에서도 타인에 대한 관심을 거두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것이 그들이 비가역적인 장애를 얻은 딸에게 할 수 있는 "사과"이므로.
- 성혜령, 「대부호」
성혜령 작가의 「대부호」는 수상작품집 중에서 제일 좋았던 작품이다. 이전의 작품집 『버섯농장』을 읽을 때에는 그저 하드보일드적이거나, 불길하고 서늘한 분위기를 즐겨 쓰는 작가로 기억했다. 「대부호」는 이전 작품들과는 조금 결이 다르게 읽혔다.
12·3 비상계엄은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역사상 두 번째로 대통령의 탄핵이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하여 정권이 바뀌었고, 사회는 여전히 극단적인 사상을 지지하는 집단으로 나누어 싸우기를 멈추지 않는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김승옥 문학상>을 수상한 최진영 작가의 「돌아오는 밤」이나, 이희주 작가의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 길란 작가의 「법의 아름다움」은 그 당시의 혼란상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넓게 보면 성해나 작가의 「스무드」 역시 이 안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대부호」 역시 이른 바 '반탄 진영'에 열려한 지지를 보내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다. 오빠도 나어린 채로 죽고, 아빠도 돌연 사망했을 때, 세상에는 엄마와 '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엄마는 광화문 집회에 나갔다가 사고를 당해 응급실에 실려온다.
나는 내심 엄마가 깨닫기를 바랐다. 몸이 아플 때 의지할 사람이 이제 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도.
(…)
나는 아주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오빠가 죽은 뒤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나라를, 우리 가족만 조용히, 아니, 요란히 무너지고 있는 이 폐허를, 나도 한 번쯤은 버리고 싶었다.
「대부호」, 183쪽
요양이 필요한 엄마를 보살피면서 '나'는 격조했던 시간이 빚어낸 엄마의 변화가 낯설다. '나'는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외국 기업에 취직하는 걸 목표로 삼아왔다. 하지만 그게 성사된다면 엄마를 홀로 한국에 둬야 한다는 사실이 부채의식처럼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엄마와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그 부채의식마저 털어버린다. 오빠의 죽음을 덮는 데 일조한 정치 세력을 지지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지지할 수 있느냐고 묻는 '나'에게 엄마는 반문한다.
떠나고 싶은 게 이 나라야, 나야? 아니면 너야?
-「대부호」, 190쪽
번번이 최종 합격에 실패하던 본사 관리직 자리에 마침내 합격한 나는 이제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결심을 세웠지만,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또다시 '나'의 결정을 흔들어놓는다. 자신의 자취방으로 돌아가려는 '나'의 캐리어는 도무지 닫히지 않는다.
나는 캐리어를 주먹으로, 발로 내리쳤다. 왜, 안 닫히냐고, 왜. 엄마가 인기척도 없이 내 방에 들어와서 캐리어 위에 앉았다. 엄마의 무게로 캐리어가 겨우 맞물렸다. 나는 재빠르게 지퍼를 채웠다.
-「대부호」, 195쪽
말없이 들어와서 앉는 장면도,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지퍼를 채우는 것도, 가족이 겪는 갈등과 해소의 구조를 경제적으로 그려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는 왜 '반탄 세력'을 옹호하는지 고백한다.
뭔가 바꾼다고 말하는 사람들, 엄마는 꼴보기 싫더라. 노동자, 인권, 그런 말 하는 사람들, 진짜 싫어. 바꿀 수 있었으면, 우리 현식이가 안 죽어도 됐잖아. 그런 생각 하면 엄마는 살 수가 없어.
-「대부호」, 196쪽
작품 뒤에 달려 있는 대담에서 성혜령 작가는 '엄마'의 입을 빌려 너무 쉽게 이야기해주는 장면이 아닌가 고민했다는데, 나 같이 미욱한 독자에게는 이 장면이 더 크게 와닿았다. 사실 나 역시 '반탄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이 장면을 읽고는 저 수많은 이들 중에는 이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소설이 지금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은 사실상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왜소해졌다. 앞으로도 더 그럴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소설이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불가해한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다. 나에게 「대부호」는 그런 이해의 지평에 가닿은 소설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 이민진, 「겨울의 윤리」/ 정이현, 「실패담 크루」/ 함윤이「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
이민진 작가는 이번에 처음 이름을 들어보았다. 심사평에 의하면, 「겨울의 윤리」가 「눈과 돌멩이」와 막판까지 대상의 자리를 놓고 겨뤘던 작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주인공 '해진'이 "과거"를 버리는 이야기다. 그 과거에는 자기 자신도 있으며, 자신을 버린 어른들도 포함된다. 이런 과거를 "해진"이라 이름 붙여주고 타인처럼 대하는 서술 구조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정이현 작가의 「실패담 크루」는 계간지에 실렸을 때 읽었는데, 그때도 재밌게 읽혔다. 김혜진 작가의 경우처럼 정이현 작가도 작품 활동을 오래한 연륜이 있는 작가인데, 이들을 보면서 소설은 이렇게 써야하는 구나, 배우게 된다. 실패담을 풀어내는 데 완벽하게 실패하여 오히려 성공하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윤이 작가의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는 <젊은작가상> 수상집에서 읽었기 때문에 따로 읽지 않았다.
모든 작품들 역시 수상할 이유가 있는 좋은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한 가지 우려스러운 부분은 남성 작가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지금 남성 작가를 위한 쿼터제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 문학을 읽는 "남성" 독자가 극히 드물다는 점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읽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한국 문학을 읽는 독자의 대부분이 "여성"이기에 쓰는 사람도 여성이 더 많은 건 당연하게도 보인다. 다만, 한국 문학이 남성의 이야기까지 포괄할 수 있으려면, 좋은 남성 작가들도 더 많이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수상 작품집에선 남성 작가들의 이름을 볼 수 있기를 고대하며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