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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론은 어쩌다
아밀(김지현) 지음 / 비채 / 2025년 9월
평점 :
'아밀'이라는 작가명은 '김지현' 번역가의 필명이다. 평소에는 주로 영미 문학을 번역하고, '아밀'이라는 이름으로 소설과 에세이 등을 작업한다고 한다. 2018년, 2020년 SF어워드에서 수상하기도 했으며, 웹진 <거울>의 필진이기도 하다.
『멜론은 어쩌다』는 총 8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나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
「어느 부치의 섹스 로봇 사용기」
「아이돌 하려고 태어난 애」
「노 어덜트 헤븐」
「성별을 뛰어넘은 사랑」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인형 눈알 붙이기」
「야간 산책」
처음에 목차를 훑었을 때는 SF 퀴어소설집이라 섣불리 생각했다. 처음 두 편을 읽을 때도 기존의 퀴어 소설들과는 다르게 "유쾌하고 웃긴 SF 퀴어소설집"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세 번째 소설부터 이 책에 대한 견해를 수정해야 했다. 『멜론은 어쩌다』는 단순히 웃긴 퀴어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 발을 붙인 채 상상력으로 내달리는 소설"이다. 이를 3차원(현실)과 4차원(상상)의 사이에 있는 "3.5차원의 소설"이라고 이름붙여 보고 싶다.
8편의 소설을 모두 읽고 찬찬히 되짚어보면, 「나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 「어느 부치의 섹스 로봇 사용기」 이 두 편에도 3.5차원의 흔적이 있다. 「나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는 주인공의 오랜 친구가 주인공을 좋아하는 레즈비언이자 뱀파이어다. 그리고 아밀 작가는 뱀파이어가 인간과 무리 없이 공존을 하고 있는 세계관을 그리고 있다. 뱀파이어는 인간의 혈액을 얻기 위해서 "중고 거래 사이트"를 이용하기도 한다.
「어느 부치의 섹스 로봇 사용기」는 생성형 AI의 대화 기능이 탑재된 성인용 로봇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이 소설은 AI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고, 오히려 로봇에게서 위안과 자신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주인공을 통해 다가온 AI 시대에 사람은 무엇이며, 관계는 정말로 어떻게 맺어져야 하는가를 고민하게끔 만든다.
마찬가지로 퀴어적인 요소가 담긴 「성별을 뛰어넘은 사랑」은 『멜론은 어쩌다』에서 가장 재밌게 읽혔다. 현실의 관념을 정반대로 뒤집은 게 인상적이다. 이 세계관에서는 "동성애"가 주류이고, "이성애"가 성소수자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그대로 존재해서, 이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취향을 숨기고 남몰래 연애를 한다.
이런 게 바로 성별을 뛰어넘은 사랑이구나. 은아는 처음 맛보는 신세계에 경탄했다. 어떻게 사람이 자신과 다른 성별과 사랑을 한다는 비틀린 욕망을 품을 수 있는가. 그건 뭔가 남다른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 아닌가 생각했는데, 자신처럼 평범한 여자도 이성애에 빠질 수 있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구나 싶었다. 아니면 자신이 사실은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거나.
「성별을 뛰어넘은 사랑」, 166쪽
「아이돌 하려고 태어난 애」는 퀴어적인 요소는 없지만 「어느 부치의 섹스 로봇 사용기」나 「성별을 뛰어넘은 사랑」와 함께 묶어볼 수 있을 듯하다. 세 소설 모두 지금 이 상태로 기술이 발전해나간다면 얼마든지 도래할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어느 부치의 섹스 로봇 사용기」는 특이점이 와 일상적인 대화나 감정의 교류가 가능한 AI가 등장한 소설이고, 「성별을 뛰어넘은 사랑」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인공 수정을 통해서 출산이 가능해져서 성애의 주류가 동성애로 변했기 때문이다.
「아이돌 하려고 태어난 애」에서는 유전자를 편집해 탄생한 최고의 아이돌 "강모아"가 등장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그 최고의 아이돌과 같은 그룹의 멤버다.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강모아에게 애증을 느낀다. 그러나 강모아에게 빛만 내리쬐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워 유전자 편집에 반대하는 운동가들이 있고, 그들과 강모아는 다투게 된다. 주인공은 그 날, 문득 이상한 메세지를 보게 된다. 그 작은 사실을 접한 주인공은 충격에 빠진다. "아이돌"로서 겪어야 했던 모든 어려움을 강모아는 유전자가 편집됐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잘 극복해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태복음, 18장 3~5절
「노 어덜트 헤븐」은 "천국은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라는 성경 말씀에서 시작한다. 사람은 죽어 천국이나 지옥에 가게 되는데 이를 위해 재판을 받게 된다. 이 소설에서 작품집의 제목인 "멜론은 어쩌다"가 나온 것 같다. 주인공 "멜론"이 엄마의 재판에 증인으로 불려나가게 되는 게 소설의 전체적인 골자다. 천사와 악마가 신 앞에서 치르는 법정 다툼이 생생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 있어서 나는 문득 결말에 조금 의문을 품었다.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보건대 따뜻한 결말을 쓴 것 같지만 어쩐지 나는 의심을 거두기 어려웠다.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과 「인형 눈알 붙이기」에는 "마녀"가 등장한다.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은 손가락이 짧아서, 혹은 재능이 부족해서 고통받는 피아니스트가 주인공이다. 자신의 라이벌이 마치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어느 날 만난 마녀가 이 사차원의 벽을 넘게 만들어준다고 한다. 남들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손의 좌우를 반전시켜서 연주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이 제안을 수락하면서, "3차원의 세계에 머물렀을 때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성공을 거머쥐면서, 주인공은 자신이 치른 댓가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다.
「인형 눈알 붙이기」는 "3.5차원"의 소설이라는 말이 적합한 소설이다. 마녀는 마녀인데, 사업자등록증도 내고 세금도 내고 법적인 규제도 받는 마녀다. 주인공 마녀는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일생의 목표다. 그래서 흑마법과도 거리를 두고 살면서 축복 인형에 눈알을 붙이며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던 어느날, 신비주의 컨셉 아이돌의 축복 인형을 만들어 달라는 오타쿠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목표가 흔들리게 된다. 현실에 붙어 있기는 한데, 반쯤 몸이 떠 있는 것만 같은 세계관이 이 소설집의 미덕이란 점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야간 산책」은 이 작품집에서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한 작품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묘하게 현실적이면서도 기발한 상상력으로 직조해낸 세계관이 이 작품집의 강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야간 산책」은 전반적으로 상상의 세계에 많이 치우쳐 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편지 형식으로 된 고백체 문학을 잘 읽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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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론은 어쩌다』는 3.5차원의 소설이다. 이런 소설들이 재밌는 이유는 현실과 상상력의 절묘한 결합에 있다. 현실은 일종의 제약이 되어주는데, 상상력이 제멋대로 튀어나가는 걸 얼마간 제지해준다. 게다가 현실적인 조건들이 주인공에게 보다 쉽게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겁이 많아 인형에 눈알만 붙이게 된 마녀처럼.
게다가 "아이돌 하려고 태어난 애",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노 어덜트 존", "성별을 뛰어넘은 사랑"과 같은 제목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평소에 작가에게 대중이 쓰는 유행어를 재조립하고 싶어하는 "언어유희적 욕망"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대중은 흔히 재능이 넘치는 아이돌(또는 가수든 배우든)을 보고는 "저 친구는 아이돌을 하려고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걸 가지고 정말로 아이돌을 하기 위해 태어난 아이를 소설에 등장시킨다.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역시 "넘사벽"이란 줄임말로 자주 쓰였던 유행어였는데, 작가는 정말로 차원을 넘나드는 피아니스트를 등장시킨다. "노 어덜트 존" 역시 "노키즈 존"을 뒤집고 성경 말씀을 가져와 천국이 노 어덜트 존이라는 설정으로 재탄생시킨다. "성별을 뛰어넘은 사랑" 역시 "어떻게 사람이 성별을 뛰어넘은 사랑을 할 수가 있어, 사랑은 당연히 같은 성끼리 하는 거지."와 같은 농담을 가져와 만들어낸 세계관이다.
하지만 이 상상력에서만 끝나지 않고 작가는 작품마다 좀 더 깊게 고민해보아야 할 것들을 남겨놓는다. "아이 같다는 것은 진정 무슨 의미인가?", "성별을 뛰어넘거나 뛰어넘지 않거나 사랑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과 교감할 수 없는 음악적 재능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로봇과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지 못하는 인간 중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 관계인가?" 등등. 그리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책을 덮고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현실적인 상상력이 풍부한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